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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역사 일본사 이야기 45 :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국 통일[발롱도르~]

40편 하극상의 시대, 전국시대

41편 : 오다 노부나가 제 1편

42편 : 오다 노부나가 제 2편

43편 : 오다 노부나가 제 3편

44편 : 오다 노부나가 제 4편

 

-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통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천하인이 된 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였다.

 

01.jpg

▲ 토요토미 히데요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와리(尾張; 현재의 아이치현)

지자무라이(地侍; 일반 농민 출신의 하급무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처음엔 키노시타 토키치로(木下藤吉郞)라는 이름이었는데,

그는 노부나가의 눈에 들기 위해 추운 신발을 몸에 품고 있는 등의 어필을 하거나

온갖 잔일을 도맡으면서도 절대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자세로

오다 노부나가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 물론 노부나가의 신발에 관련한 이야기는
명확한 기록이 있는 것은 아니고 전설적으로 전해지는 말이다. -

 

또한 전술적으로 기발한 아이디어도 자주 제시하여

결국 오다 노부나가의 밑에서 승승장구 하면서

두각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02.jpg

▲ 일본 NHK 대하드라마 '천지인(天地人)'에서의 키노시타 토키치로

 

이때 쯤부터 키노시타 히데요시(木下秀吉)라는 이름을 사용하지만

정확히 언제 개명한 것인지는 알 수 없고,

이후 1573년에 하시바(羽柴)씨로 개성을 하여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노부나가의 전국 통일 과정에서

그는 모리씨(毛利氏)를 공격하는 총대장이 되어

서국지방으로 파병된다.

 

하지만 빗츄(備中)의 타카마츠성(高松城)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모리씨의 대군과 대치하게 되어 모리씨에게 고전하게 되었고

이에 오다 노부나가에게 지원군을 요청하게 된다.

 

03.jpg

▲ 타카마츠성 수공(高松城水攻め)을 그린 삽화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가 출병하는 과정에서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이 일어났고....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에 의해 노부나가가 사망하고 만다.

- 혼노지의 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전 화 참조 -

 

하시바 히데요시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모리씨와 즉시 화해를 하고

교토로 회군하여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하였다.

(야마자키 전투)

- 야마자키 전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전 화 참조 -

 

04.jpg

▲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를 그린 삽화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 계승전

 

이렇게 배신자를 처단한 것으로 명분을 얻은 히데요시는

노부나가를 위해 법회를 여는 등의 행동을 통해

노부나가의 유업을 계승함을 표명하였고

그의 후계자 계승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 사후에 유력 후보자로 거론되던 자들은

오다 노부나가의 후손들

오다 가문의 중신의 필두였던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한 하시바 히데요시였다.

 

05.jpg

▲ 시바타 카츠이에

 

오다 가문의 당주를 정하기 위한 키요스 회의(清洲会議)에서

노부나가의 3남인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와

어린 애기였던 노부나가의 손자 산뽀시(三法師)가 후보로 올랐고,

히데요시가 밀었던 산뽀시가 후계자로 선정되었지만....

 

이 시기, 전국시대는 '하극상'의 시대이고,

오로지 능력에 의해 인정 받는 시대였기 때문에

큰 전공이 없어 아직 능력이 충분치 않은 오다의 후손들은

단순히 오다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후계자가 되기에는 명분이 부족했다.

 

더군다나 당시 세 살 밖에 안됐던 산뽀시는 더욱더...

 

06.jpg

▲ 산뽀시(훗날 오다 히데노부)

 

따라서 사실상 실권은

미츠히데 토벌 등으로 발언권이 가장 강했던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있었다.

 

이로 인해 기존에 오다 가문 가신 중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시바타 카츠이에의 영향력은 현저히 떨어졌고...

카츠이에와 히데요시의 대립이 심화되어

결국 둘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시즈가타케 전투)

 

07.jpg

▲ 시즈가타케대합전도

 

한편 자기 조카에게 당주 자리를 밀린 오다 노부타카도

히데요시에게 불만을 갖고 있었기에

히데요시와 대립한 시바타 카츠이에에게 접근하고 있었고

따라서 노부타카도 시바타와 함께 히데요시에 거병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히데요시가 승리를 하게 되어

카츠이에와 노부타카는 자결하게 되었고

하시바 히데요시는 유력한 경쟁자를 제거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08.jpg

▲ 오다 노부타카

 

그리고 그 해...

과거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가 있던 자리에

오사카성(大阪城)을 축조하면서 그곳을 거점으로 삼게 된다.

- 이시야마 혼간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 콘텐츠 43화 참조 -

 

09.jpg

▲ 오사카성 천수각

(사진 출처 : https://livejapan.com/ko/in-kansai/in-pref-osaka/in-osaka-castle_tenmabashi_kyobashi/spot-lj0010319/)

 

 

오다 노부카츠(織田信雄)와의 싸움

 

한편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이었던 오다 노부카츠도 있었다.

노부카츠는 키요스 회의에서 당주가 되지는 못했지만....

 

혼노지의 변 때 아버지를 구하려다 패하여 자결한

형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의 영지인

오와리국과 키요스성(清洲城)을 상속받는 것으로 결정된다.

 

오다 노부가츠는 이미 노부나가 생전에

이세·이가(伊勢·伊賀; 현재의 미에현)를 하사받아 영지로 갖고 있었기에

이로써 노부카츠는 3개의 국을 거느리는 거대한 다이묘가 될 수 있었다.

 

때문에 그는 처음에는 불만을 갖지 않고 히데요시를 지지하였고,

시즈가타케 전투에도 히데요시 편으로 참여하여

동생인 노부타카를 자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010.jpg

▲ 오다 노부카츠

 

그러나 시즈가타케 전투 이후

히데요시와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어

히데요시와 대립을 하게 되었고..

 

노부나가와 극진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도 노부카츠에 가담하여

아직 히데요시 밑에 들어가지 않은

토사(土佐; 현재의 코치현)의 쵸쇼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나

키이(紀伊; 현재의 와카야마현)의 무사집단인 사이카슈(雑賀衆)등과 모여

손을 잡고 히데요시에게 대항하게 된다.

 

image.png.jpg

▲ 토쿠가와 이에야스

 

이에 히데요시는 노부카츠를 치기 위한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전쟁 초반에는 히데요시가 유리하게 끌고 갔으나

노부카츠는 강한 실력자인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연합하고 있었기에

이후 전투에서 히데요시는 연패하고 만다.

 

image.png.jpg

▲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이 크게 승리를 거둔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

 

때문에 전쟁은 생각보다 길어졌고,

전선은 교착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에 히데요시 측은 강한 이에야스와의 직접적인 싸움을 피하고

노부카츠 쪽을 집중 공략하는 전략을 선택하여

노부카츠 세력에 혼란을 주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오다 노부카츠가 히데요시에게 굴복하여 화친을 요청하였고,

히데요시가 이를 수락하면서 전쟁은 허무하게 끝나버린다.

 

노부카츠가 히데요시와 화해하자

싸울 의미가 없어진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그냥 히데요시에게 항복하고

차남 오기마루(於義丸; 훗날 유키 히데야스)를 히데요시에게 양자로 보내며 강화를 맺고 말았다.

 

3.jpg

▲ 오기마루

 

 

관백(関白)이 된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통일국가의 완성

 

1585년 하시바 히데요시는 내대신(内大臣)에 임명되었다.

- 내대신 등 일본 중앙 관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 콘텐츠 17화 참조-

 

그리고 기세에 힘입어,

 

오다 노부카츠와 연계했던

사이카슈의 스즈키씨(鈴木氏)가 이끌던 키이와

쵸소카베 모토시카가 이끄는 시코쿠(四国)도 평정하였다.

(키슈·시코쿠 평정)

 

image.png.jpg

▲ 사이카슈 스즈키씨의 문장인 야타가라스(八咫烏)

 

키이와 시코쿠까지 손아귀에 넣은 하시바 히데요시는

이후 후지와라씨(藤原氏)의 일문이었던 코노에 사키히사(近衞前久)의 양자로 들어간다.

 

그리고 천황의 섭정을 하는 관백이 된다...

 

관백은 원래 천황의 외척으로서 섭관가(摂関家)를 형성하였던

후지와라씨 일족만이 임명 가능한 자리였는데,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후지와라씨 일족의 양자로 들어가서

관백이 되기 위한 명분을 얻은 것이다.

- 관백과 섭관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 콘텐츠 17, 18화 참조-

 

image.png.jpg

▲ 다섯개의 섭관가(코노에, 타카츠카사, 쿠죠, 이치죠, 니죠)의 후지와라씨로부터의 분리과정

 

뿐만 아니라 관백이 된 하시바 히데요시는

그 이듬해에 일본 율령 상 최상위 직인 태정대신에 올라가면서

조정으로부터 성을 토요토미(豊臣)라는 성을 하사 받아

드디어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되었다.

 

이로써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중심으로 한 정권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image.png.jpg

▲ <임진왜란 1592>에서 김응수 배우가 연기한 토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히데요시는 천황으로부터 일본 전국의 지배권을 이양 받았다고 주장하고

총무사령(惣無事令)을 내려 전국의 평화를 천명하였다.

이는 전국 다이묘에게 정전을 명령한 것이었고,

때문에 모든 계층의 전쟁, 사투가 금지되고 전국시대가 종식되었다.

그래서 총무사령은 토요토미 평화령(豊臣平和令)이라고도 불린다.


 이 평화령은 이후 히데요시가 전국을 평정할 때의 법적인 근거가 되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제 이 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전쟁을 일으킨 전국 다이묘들을

평화령을 위반했다는 명분으로 멸할 수 있었다.

 

image.png.jpg

 

이를 바탕으로 1587년에 큐슈의 시마즈씨(島津)도 정벌하였고,

 

1588년에는 쥬라쿠테이(聚楽第)에서 고요제이 천황(後陽成天皇)을 맞이하고

이 기회를 선전용으로 이용하여 전국의 모든 다이묘로 하여금

천황과 히데요시에게 충성 맹세를 하게 하였다.

 

쥬라쿠테이는 히데요시가 천하 정치를 펼치기 위해

교토에 신축한 성곽풍의 정청 겸 저택이다.

 

image.png.jpg

▲ 고요제이 천황 쥬라쿠테이 행차도

 

1590년에는 오다와라(小田原; 현 카나가와현 오다와라시)의 유력 호족인 호죠씨(北条氏)와

동북지방의 아이즈(会津; 현재의 후쿠시마현 아이즈와카마츠시)도 평정하면서

 

결국 최종적으로 전국 통일을 완성하게 되었다.

 

즉,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후계자로서의 길을 가면서

군사적 정복 뿐만 아니라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배경으로

전통적인 지배권을 활용하면서 새로운 통일국가를 완성시킨 것이다.

 

 

 

 

번외 1)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무라이면서도 무사의 최고봉인 쇼군이 되지 않고 관백이 된 이유

 

일본의 첫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를 설립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정해놓은 규정 때문임..

요리토모는 쇼군은 반드시 '겐지(源氏)'의 일족만이 될 수 있다라고 정해놨음.

그렇기 때문에 신분이 너무 낮고 겐지와는 어떠한 루트로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던 히데요시는 쇼군이 될 수가 없었음.

무로마치 막부의 아시카가씨(足利氏)와, 에도 막부의 토쿠가와씨(徳川氏)는 다 겐지 일족임

 

 

번외 2) '무가관백제'를 실현하길 원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

 

전국 통일을 끝낸 히데요시는 관백의 지위를 토요토미 가문이 세습하기를 원했음.

그래서 1591년 관백의 지위를 조카이자 양자인 토요토미 히데츠구(豊臣秀次)에게 양보하고 쥬라쿠테이도 주었음.

그리고 본인은 전임 관백을 부르던 직책인 타이코(太閤; 태합)가 되었음.

 

그런데 이걸 왜 조카에게 주었느냐...

바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친아들이 없기 때문..

 

그런데 1593년에 아들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賴)가 생겨버림.

그러자 조카 히데츠구와의 관계가 나빠졌고...

결국 1595년 모반을 꾀했다는 이후로 히데츠구를 유배보내고 쥬라쿠테이도 폐기하였음.

 

히데츠구는 유배지에서 할복 명령을 받고 할복하였고..

히데츠구의 목이 교토로 옮겨지자 그의 목 앞에서 그의 일족을 처형했음.

 

이후 토요토미 정권은 폐기된 쥬라쿠테이를 대체할 새로운 정청으로 후시미성을 지었는데

쥬라쿠테이의 건축물과 자재들이 여기에 이용되었음.

 

 

 

이전 회차 모아 보기 http://www.flayus.com/mystery

일본 고대사 요약 정리 https://www.flayus.com/33935902

일본 중세사 요약 정리 https://www.flayus.com/51801979

 

39편 오닌의 난 https://www.flayus.com/51772867

40편 전국시대 https://www.flayus.com/51890068

41편 오다 노부나가 1 https://www.flayus.com/54997662

42편 오다 노부나가 2 https://www.flayus.com/56780855

43편 오다 노부나가 3 https://www.flayus.com/56837236

44편 오다 노부나가 4 https://www.flayus.com/59269096

댓글 11

best 안유진 작성자 2020.10.03. 01:08
본문에 적혀있듯이 혼노지의 변 때 죽었습니다
best 펨국 2020.10.03. 06:41
히데요시가 관백자리밖에 올라가지 못한게 가바네 때문이었구나
역시 양질의 글!
에스덥 2020.10.03. 00:58
확실히 일본사 연재가 영국사 연재보다 양도 많고 내용도 질적으로 탄탄하네요......ㅎㄷㄷ.....
댓글
에스덥 2020.10.03. 01:00
 에스덥
그나저나...오다 아들들은 둘째랑 셋째가 권력다툼하면서 히데요시와 크게 싸웠네요 ㅎㄷㄷ.....

장남은 이미 죽었던건가요?
댓글
best 안유진 작성자 2020.10.03. 01:08
 에스덥
본문에 적혀있듯이 혼노지의 변 때 죽었습니다
댓글
혜요 2020.10.03. 01:41
자기들끼리 죽이는 내분이 많아서 으휴
댓글
best 펨국 2020.10.03. 06:41
히데요시가 관백자리밖에 올라가지 못한게 가바네 때문이었구나
역시 양질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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