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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역사 일본사 이야기 31 : 원나라를 막아준 신(神)[발롱도르~]

1206년..

칭기즈 칸은 유목민족을 통일하고

몽골 고원을 평정 한 후

기마병을 몰고 중앙아시아, 인도, 서아시아는 물론

유럽까지 진출하여 몽골대제국을 건설하였다.

 

1.png

▲ 칭기즈 칸

 

뿐만 아니라 동쪽으로도 진출해 서하와 금나라까지 정복하였으며

이후 칭기즈 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은 고려에까지 진출하면서

몽골 제국은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엄청난 영향력을 펼치게 되었다.

 

Mongol_Empire_map.gif

▲ 몽골제국의 영역 확장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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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빌라이 칸

 

1270년, 강화도에서 항쟁을 이어나가던 고려 왕실은

당시 무신정권의 짱이었던 임유무(林惟茂)가 피살당하자

개경(開京; 현재의 개성)으로 환도하고 몽골제국에 항복한다.

 

이렇게 쿠빌라이 칸은 고려를 제후국으로 만드는데에 성공하였고

수도를 카라코룸에서 중국의 대도(大都, 현재의 베이징)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원(元)이라고 칭하여 중국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남송과 일본까지

정복할 계획을 세우고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sou_map10ba.jpg

▲ 당시 동아시아 국가의 영역 

- 고려는 원의 제후국이므로 보라색 테두리로 영토표시가 돼있음. -

 

사실 쿠빌라이 칸의 최종 목적은 일본이 아니라 남송이었는데....

이에 고려를 배신때리고 몽골로 톡꼈던 고려인 조이(趙彛)가

일본을 몽골 편으로 끌어들여서 남송을 고립시키면

남송 정벌이 수월할 것이라고 조언하였고

쿠빌라이 칸은 이에 혹하여 급하게 일본을 섭외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쿠빌라이 칸은 고려를 통해서 가마쿠라 막부로 사신을 여러번 보내

대륙의 정세를 알리면서 몽골에 협조할 것을 요청했지만

역사상 외세의 침략을 한번도 받아본 적 없었던 막부에선 콧웃음 치면서 이를 계속 거절했고..

 

쿠빌라이 칸은 말로 해선 일본을 끌어들일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면서

일본이 원의 정복 대상 리스트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당시 막부의 싯켄이었던 호죠 토키마사(北条時宗)는

이에 대비하여 서일본의 슈고(守護)와 지토(地頭)들에게 수비를 강화하라고 명했다.

- 슈고와 지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 컨텐츠 27회차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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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죠 토키마사

 

쿠빌라이 칸은 즉각 고려에 병선을 건조하도록 명하였고

고려의 남성들을 징병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제주도에서 원에 대한 항쟁을 지속하고 있었던 삼별초는

일본에 국서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이런 삼별초의 존재는 원의 일본 원정에 크게 방해될 게 뻔했기 때문에

삼별초까지 확실히 토벌해버린다.

 

그렇게 1274년 전투 준비가 완료되었고 -  약 900척의 배에 약 3만 5천의 대군이었다고 함 -

고려와 원의 연합군(이하 여몽연합군)은 마산의 합포를 통해 일본으로 출발하였다.

 

 

제 1차 일본 침입(문영의 역)

 

문영의 역.png

▲ 문영의 역 당시 여몽연합군의 침략 경로

 

이들은 먼저 대마도(対馬島)이키(壱岐)를 침공했는데

그냥 말 그대로 박살이 났다.. (츠시마, 이키 섬 전투)

 

대마도는 그냥 하루만에 전멸 당했고,

이키는 이틀만에 함락 당했다..

 

일본 문헌인 《하치만구도쿤》에 따르면

민간인들까지 학살 당할 정도로 털렸다고 하는데...

 

임산부의 배를 갈라서 태아를 꺼내고

민간인을 포로로 잡아 코랑 귀를 베고

젊은 여자들은 강간하고 저항하면 손바닥을 뚫어서 줄을 메달아서 끌고다녔다고 한다...

 

5.png

▲ 이키섬 전투를 묘사한 그림

 

근데 막부군이 털릴 수 밖에 없었던게..

당시 일본 무사들의 전투는 일본 무사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행해져오던 무사도에 따라

1대1로 기마전을 해서 싸우는게 전투의 정석이었고 - 일기토 방식.. -

여몽연합군을 상대로 해서도 그렇게 싸우려고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대량으로 몰아붙이는 전법을 쓰는

최강의 육군을 가진 몽골군에게 털릴 수 밖에 없었던 것..

 

게다가 원나라는 유럽까지 정복했던 세계 최강국이었기에

서역에서 핸드캐넌(철포)과 수류탄을 가져와 사용했고

이에 칼, 창이랑 활 밖에 못쓰던 막부군은

당연히 펑펑 터지는 대포 소리에 겁을 먹어 전의도 상실하고

포 한방에 쓸려나갈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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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사용된 핸드캐넌인 동화창

- 사실 사거리도 성능도 좋은 건 아니었는데,

막부군의 전력이 너무 안좋은데다가 좁은 섬에서의 전투라 썰렸던 것. -

 

테츠하우.jpg

▲ 당시 사용된 수류탄인 테츠하우

 

여몽연합군은 기세를 몰아 타카시마(鷹島)에 상륙했다가

그대로 하카타(博多; 현재의 후쿠오카시 하카타구)로 향한다.

 

이들은 하카타만 서부 해안에 상륙해 진을 치고 교두보를 확보하였고

대대를 3개로 나누어 대규모 상륙 작전을 시작하였다.

 

이에 막부에서는 급하게 큐슈(九州)에 있는

모든 슈고와 지토와 고케닌들에게 총 동원령을 내렸고

하카타에선 쇼니 카게스케(少弐景資)가 약 2만명의 병력으로 이들에게 맞섰다.

 

그런데 첨에는 고전하던 막부군이

아카사카(赤坂; 현재의 후쿠오카시 아카사카)에서 선전을 하기 시작했다.(아카사카 전투)

이곳에서 키쿠치 타케후사(菊池武房)가 습격에 성공하였으며

쇼니 카게스케는 원군의 장수 유복형(劉復亨)을 활로 쏴 맞추기도 하였다.

 

7.JPG

▲ 아카사카 전투에서의 키쿠치 타케후사 군

 

막부군은 토리카이(鳥飼; 현재의 후쿠오카시 토리카이)에서도

무사들 여럿이 원군의 화살에 맞긴 했지만 나름 선전하였고

원군을 진지로 몰아내는 데에 성공하였다.(토리카이 전투)

 

물론 위 두 전투도 막부군이 선전했다일 뿐이지

피해 규모는 막부군이 훨씬 더 컸다.

- 참고로 위 두 전투는 하루 동안 이루어진 것. -

 

그랬기에 막부군은 원군을 진지로 몰아낸 뒤

다자이후(太宰府)의 미즈성(水城)에 집결하여

여몽연합군에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몽원합군도 앞선 전투에서 어느정도 피해를 받은 데다가

유복형이 화살에 맞기도 했으니 재정비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여몽연합군도 배에 올라 작전회의를 하면서 

막부군의 야간 기습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런데....

 

태풍.png

 

휘이이잉...

 

그날 밤...

갑자기 하카타에 대폭풍이 몰아닥친다..

- 심지어 10월이었는데... -

 

8.png

▲ 당시 태풍을 묘사한 그림

 

이 때문에 여몽연합군의 선박 900척 중 200여척이 침몰,

여몽연합군 병력 1만 5천명이 익사하면서

여몽연합군은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막부군은 태풍 덕에 허무하게 여몽원합군의 침략을 막을 수 있었고

이에 일본인들은 이 태풍을 카미카제(神風; 신풍)이라고 부르면서 기리기 시작하였다.

 

 

여몽연합군의 재정비

 

철수한 원군은 원으로 돌아가

쿠빌라이 칸에게 태풍에 깨져서 돌아왔다는 사실은 숨기고

일본 일부 지역을 쓸어버리고 왔다고 보고한다.

 

 이에 쿠빌라이 칸은 충분히 겁을 줬다고 판단하고

막부에 다시 사신단을 보내어 원에 항복하고 남송정벌을 도울 것을 청한다.

 

그러나..

가마쿠라에서 이들을 만나게 된 호조 토키무네는

원나라 사신들을 모조리 참수시켜 버린다.

그리고 사신단에 포함돼있던 통역과 안내 담당의 고려인 4명은

생포하여 포로로 가두어버린다.

 

이 고려인들은 4년동안 갇혀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 4년 사이에

원나라의 남송정벌이 성공리에 끝나고

중국 전역이 통일되게 되면서

굳이 일본의 협조를 받을 필요가 없어져버렸다.

 

쿠빌라이 칸은 남송과의 전쟁이 끝났는데도

4년째 사신단의 소식이 없자

새롭게 2차 사신단을 꾸려서 일본으로 보낸다.

 

그런데 이 사신단이 출발할 때 쯤

고려인 포로 4명이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고려 조정에 그간의 일을 보고 하였고

고려에선 원에 사신을 파견하여 이를 쿠빌라이 칸에게 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탈출한 고려인 포로들과 시기가 엇갈린 채 원을 출발한 2차 사신단도

이 사실을 모른채 하카타에 도달하게 되었고

하카타에 도착하자마자 참수당하고 만다.

 

이 소식들이 쿠빌라이 칸에게 전해지자

쿠빌라이는 완전히 빡치게 되었고...

바로 일본을 족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세워진 것이 고려의 정동행성(征東行省)...

 

정동행성.png

▲ 정동행성의 위치

- 풀네임은 정동등처행중서성(征東等処行中書省) -

 

고려의 충렬왕이 일본 정벌은 무리라는 입장을 전했음에도

쿠빌라이 칸은 일본 정벌을 밀어붙였고

정동행성에서는 일본 원정에 대한 총괄적인 준비가 이루워졌다.

 

또한 탐라총관부의 관할 하에 제주도에서 운영되던 목마장의

규모를 확대시켜서 일본 원정에 조달할 군마를 기르기 시작했다.

 

image.png

▲ 제주도 목마장 (사진 출처 : 제주의소리)

 

결국 충렬왕도 일본 원정을 막을 방법은 없다고 생각하고

일본 원정을 적극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또한 옛 남송땅에서도 징병을 실시하여

새로운 사단을 만들었다.

 

이렇게 여몽연합군(동로군)과 남송군(강남군)으로 두 사단을 평성하여

14만이라는 어마어마한 병력을 정비한 쿠빌라이 칸은 1281년 5월 출병을 하게 된다.

 

 

제 2차 일본 침입(홍안의 역)

 

홍안의 역.png

▲ 홍안의 역 당시 여몽연합군의 침략 경로

 

먼저 동로군이 마산 합포에서 5월에 출병하여

하카타를 토벌하여 우위를 점하기로 하였다.

 

강남군은 6월에 선발대와 후발대로 나뉘어 

중국 양자강에서 출병하여

큐슈를 기습해 동로군과 합류하여

큐슈 정벌을 마무리 지을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동로군이 생각보다 고전을 하게 된다.

 

대마도에서는 막부군이 극심하게 저항해오자

동로군 장수 몇명이 전사하여 후퇴하였고..

 

이때 후퇴하고 이키로 가 이키의 막부군을 전멸시켜 정복한 뒤

하카타만으로 쳐들어갈라고 했으나

막부가 하카타만 연안 전역에 쳐놓은 2m 짜리 방루에 막혀

하카타로 못가고 그 옆에 있는 시카노 섬으로 갔는데

시카노 섬에서도 밀려서 다시 이키로 돌아가고..

 

이키에 주둔하고 있다가 쇼니 카게스케 군대에 습격당하여

이키 섬마저 다시 막부군에게 뺏겼다...

 

image.png

▲ 하카타만 연안에 설치된 방루

 

image.png

▲ 실제 방루의 모습 (사진 출처 : 세이난가쿠인대학)

- 근데 사실 2m 밖에 안되기 때문에 그렇게 높은 건 아니었음.. -

 

image.png

▲ 하카타만 진입 전투

 

게다가 동로군 내에서는 역병마저 돌았다고 한다.

때문에 동로군 내에서는 철수하자는 목소리가 생기게 되었고..

결국 긴급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이 긴급회의에서 동로군을 이끄는 고려 장수 김방경(金方慶)이

강남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합류하여

양군이 같이 공격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동로군과 강남군은 타카시마에서 집결하여

전력을 다잡고 그곳에 진영을 축조하게 되었다.

 

한편 이 무렵 막부에서는 우츠노미야 사다츠나(宇都宮貞綱)를

6만명의 대군과 함께 큐슈로 파병했다.

 

image.png

▲ 우츠노미야 사다츠나의 동상

 

어쨌든 타카시마에서 정비를 하고 있던 원군은

막부군과 바다에서 자잘한 교전을 버리면서

큐슈를 쳐들어 갈 각만 재고 있었는데...

 

갑자기....

 

image.png

 

또 태풍이 몰아쳤다..

 

약 2000척의 함선들이

다 뽀사졌고...

 

image.png

▲ 당시 태풍을 묘사한 그림

 

이에 수 천명이 한 순간에 물에 빠져 죽고

원나라의 지휘관들은 멀쩡한 배 몇척을 찾아 원으로 톡껴버린다.

 

그리고 고려인 2만명 정도가 겨우겨우 일본을 탈출하여

고려로 돌아가는데 성공한다.

 

그래도 한 10만명 정도는 타카시마에서 살아남았는데..

막부군은 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대량으로 총공격을 밀어붙여

원나라 군을 싹다 쓸어버렸고

 

결국 이들에게서 항복을 받아내었다.

 

image.png

▲ 원군과 교전하는 막부군

 

포로로 잡힌 이들은 2~3만명을 제외하고

모조리 숙청되었다.

 

우츠노미야 사다츠나는 이 이후에 큐슈에 도착하여

고대로 다시 돌아갔다.. - 그냥 6만명이서 패키지 투어.. -

 

태풍 덕분에 두 차례의 외세 침입을 막아냈지만..

본토에서 벌어진 전쟁 + 태풍 피해로

일본도 거의 쓸리다시피 했기에

인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되었다.

 

더군다나 전쟁에서 공을 세웠던 고케닌들이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는데..

이는 막부가 재정난이었던 것도 있지만

방어 전쟁이다보니 이미 땅에 주인이 정해져 있어서

보상해 줄 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보상도 못 받고

고케닌들이 오히려 사비를 들여 복구사업을 진행하는 상황까지 치달았고

이에 빈곤해진 고케닌들은 막부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전 회차 모아 보기 http://www.flayus.com/mystery

일본 고대사 요약 정리 https://www.flayus.com/33935902

 

26편 원평합전 https://www.flayus.com/33694971

27편 가마쿠라 막부 성립 https://www.flayus.com/34560949

28편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죽음 https://www.flayus.com/34738407

29편 호죠씨의 실권 장악 https://www.flayus.com/353141

30편 죠큐의 난 https://www.flayus.com/35781686


 

댓글 9

best 나상호 작성자 2019.02.18. 08:52
저때 밀었으면 진짜 역사가 바꼈을듯 ㄷㄷ
근데 저 수류탄은 불붙여서 던져야되는데다가 무게가 4kg이라 투포환 던지듯이 던지거나 투석기로 날려야함 ㅋㅋㅋㅋ
best 갓용수조신 2019.02.18. 12:38
오.. 외세의 전쟁이라 역사를 바꾸는구만
다음편이 궁금해진다
슬레이어스박서 2019.02.18. 01:33
이때 일본 밀엇으면 또 역사가 어케됏을까 궁금하긴함 ㅋㅋ
근데 몽골애덜 수류탄까지 썼구나 ㄷㄷ
댓글
best 나상호 작성자 2019.02.18. 08:52
 슬레이어스박서
저때 밀었으면 진짜 역사가 바꼈을듯 ㄷㄷ
근데 저 수류탄은 불붙여서 던져야되는데다가 무게가 4kg이라 투포환 던지듯이 던지거나 투석기로 날려야함 ㅋㅋㅋㅋ
댓글
best 갓용수조신 2019.02.18. 12:38
오.. 외세의 전쟁이라 역사를 바꾸는구만
다음편이 궁금해진다
댓글
나상호 작성자 2019.02.18. 13:04
 갓용수조신
과연 막부는 어떻게 될 것인가..
댓글
포빨러 2019.02.18. 12:49
근데 우리나라 왜케 약하냐ㅠ
댓글
나상호 작성자 2019.02.18. 13:03
 포빨러
그래도 저기 참전한 국가들 중에선 해군은 젤 쎘다는...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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