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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정보/칼럼 축구칼럼 인조잔디 위의 황제들, DFB-할렌포칼 이야기[발롱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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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한 번쯤 상상해본 적 있지 않으신가요?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이 그 유니폼 그대로 입고 풋살 대회에서 겨루는 모습을 말입니다. 자선 풋살 대회에서 매번 활약한 네이마르처럼 볼 컨트롤이 좋고 개인기가 화려한 선수들이 경기를 주도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죠.

 

1.jpg2000년 바이에른 뮌헨과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경기. 메메트 숄(우측)이 몸을 던져 젤리코 소피치(중앙)의 슛을 막으려 하고 이를 카르스텐 얀커(좌측)이 지켜보고 있다. 당시 2부에 있던 BMG는 바이언을 상대로 1대 3 승리를 거뒀다. (출처: Getty Images)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모두가 상상만 했던 이러한 대회가 독일에 실제로 존재했었습니다. 그 대회가 바로 이번 글에서 소개해드릴 'DFB-할렌포칼'입니다.

 


 

1. DFB-할렌포칼의 출범


20/21 시즌 분데스리가는 매치데이 13~14 사이에 겨울 휴식기를 가졌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촉박하게 가졌던 그 겨울 휴식기의 기간은 고작 12일이었고 역사상 가장 짧았던 윈터 브레이크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가 아니더라도, 30년 전엔 무려 석 달을 쉬고 90년대엔 거의 두 달 가까이 휴식기를 가졌단 걸 생각해보면 익숙하게 받아들여지진 않을 것이다. 단적인 예로 88/89 시즌에는 전반기가 12월 초에 끝났음에도 2월 중순까지 경기가 재개되지 않았으니, 현시대의 축구 팬들은 그런 긴 기간을 낙도 없이 지내야만 한다는 생각에 끔찍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리고 이 지루하고 기나긴 겨울 휴식기를 활용할 방안을 모색하던 끝에 내린 결론이 바로 DFB-할렌포칼(DFB-Hallen-Pokal, 혹은 Hallenmasters)이었던 것이다. 할렌포칼이란 'Indoor Cup'의 독일어 표현으로 즉 인도어 풋볼을 종목으로 하는 대회였다. 풋살과는 차이가 있는, 약간은 다른 종목인데 이 차이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한번 자세히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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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슈투트가르트와 바이에른 뮌헨의 경기. 마우리시오 가우디노(좌측)와 슈테판 로이터(우측)가 볼 경합을 벌이고 있다. (출처: Sport1)

첫 할렌푸스발 경기는 1971년(베를린)과 1972년(에센)에 열렸었는데, 이미 몇몇 분데스리가 및 아마추어 클럽들은 윈터 브레이크를 나기 위해 참가했었다. 그렇게 꾸준히 진행하다 보니 다른 구단들도 관심을 보이며 하나둘씩 참여하게 되었고 1980년대에 들어서는 아예 붐이 일어나면서 TV에 중계하는 대회의 숫자 역시 늘어났다. 1987년 키커-슈포르트마가친은 총 14번의 토너먼트 경기를 통해 최고의 팀을 선정해 "할렌마이스터"라는 명칭을 부여하며 우승팀으로 발표했었는데, 첫 비공식 할렌마이스터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로 선정되었다.

이에 질세라 빌트지에서는 1987년에 슈투트가르트에서 최초로 비공식 할렌마이스터(인도어 풋볼 챔피언십)를 개최했다. 여기서는 함부르크 SV가 VfB 슈투트가르트를 1대 3으로 격파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DFB는 이러한 붐을 통해 할렌푸스발의 가능성을 알아차렸고, 1988년에 들어 자신들이 직접 주관하는 DFB-할렌포칼의 공식적인 출범을 발표했다.

 


 

2. 복잡한 value제 시스템에 따른 위기, 그리고 극복

 

14.jpeg키커지에서 1980년부터 편집자로 활동한 프랑크 루셈(Frank Lußem). (출처: Kicker)

"그 어떤 이도 (이 대회의) 규정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정작 다들 마치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굴었다. 그리고 만약 규정을 마침내 알아차린 이가 생기면 규정이 다시금 바뀌기 일쑤였다." 1980년부터 키커지의 편집자로 활동한 프랑크 루셈이 당시의 엉성하기 그지없는 대회 규칙을 회상하며 했던 발언이다.

초창기 대회에서 바이에른 뮌헨과 함부르크 SV 등 총 열 팀이 후반기 시작 전 실전 감각을 끌어올리기 위한 트레이닝 캠프를 선호한다는 명목하에 출전을 포기하며 할렌포칼은 흥행몰이에 난항을 겪었다. 대형 분데스리가 클럽들이 참여하지 않으면서 2부 리그 소속, 아마추어, 심지어는 해외 구단들도 대회에 자원하여 참가하였다.

1988년에 진행된 할렌 포칼은 진출 자격을 따내기 위한 총 18회의 토너먼트를 펼치고 여기서 우승한 팀이 파이널 토너먼트에 진출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얼핏 들었을 땐 간단해 보이지만 wert(이하 value)제는 대회 참가자들을 꽤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 총 18번의 토너먼트에서 각각 우승자가 나오면, 각 토너먼트에 부여된 value에 따라 우승의 가치를 다르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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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마이스터피날레를 위해 진행된 총 18회에 걸친 87/88 예선 토너먼트. (출처: Wikipedia)

Value는 해당 토너먼트의 참가팀 수준에 따라 배정되었는데 뮌스터에서 열린 토너먼트의 경우 굉장히 높은 수치가 배정되면서 오직 뮌스터에서만 참가한 VfL 오스나브뤼크가 마스터스피날레에 진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1988 마스터스피날레는 전 우승팀인 아인트라흐트의 연고지 프랑크푸르트에서 진행되었고 롤프 샤프슈탈 감독이 이끈 위어딩엔이 우승을 차지했다.

여러 이유에서 인기몰이에 어려움을 겪은 DFB는 1989년 대회를 시작으로 쇄신하고자 했다. 프랑크푸르트처럼 호스트 클럽은 피날레 시드에 고정이 되고, 디펜딩 챔피언과 전 시즌 리가 우승팀 및 포칼 위너 또한 그러했다. 그렇기 때문에 1989년엔 호스트 도르트문트와 디펜딩 챔피언 위어딩엔, 리가 마이스터 브레멘, 포칼 위너 프랑크푸르트가 시드를 얻었고 많은 관중을 불러들일 수 있는 바이에른 뮌헨도 혜택을 얻었다. 총 8팀이 피날레에서 겨룰 수 있었기에 나머지 25개의 참가팀이 나머지 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토너먼트를 통해 경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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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독일에서 쓰이던 화폐 도이체 마르크(Deutsche Mark, DM)의 모습. 독일은 2002년을 끝으로 마르크화의 사용을 중단하고 유로 화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출처: 유튜브 채널 'MegaBojan1993')

이러한 빅클럽들의 참여는 상금의 인상 없이는 이뤄질 수 없었다. DFB는 당해 대회부터 1등 상금을 10만 DM(독일 마르크), 2등부터 4등까지의 상금은 각각 7만 5천, 5만, 2만 5천 DM까지 끌어올리며 흥행을 위한 과감한 시도를 했다. 이는 피날레 진행 일주일 전에 이미 7000개의 티켓이 팔리는 대성공으로 이어졌다. 모든 토너먼트는 중형 규모의 홀에서 열렸기 때문에 거의 만석이 되도록 티켓이 불티나게 팔린 셈이다.

마스터스피날레의 진행 방식은 총 다섯번이나 변경되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1987년: 네 팀으로 두 번의 준결승 진행, 3위 결정전과 우승자를 가렸다.

1988년: 세 팀으로 구성된 두 그룹, 각 그룹의 1~2위 팀이 준결승 진출, 5위 결정전과 3위 결정전 및 결승전이 진행되었다.

1989년: 네 팀으로 구성된 두 그룹, 각 그룹의 1~2위 팀이 준결승 진출, 3위 결정전 및 결승전이 진행되었다.

1990~1997년: 네 팀으로 구성된 두 그룹, 각 그룹의 1~2위 팀이 준결승 진출, 결승전만이 진행되었다.

1998~2000년: 세 팀으로 구성된 네 그룹, 각 그룹의 1~2위 팀이 8강 진출, 준결승과 3위 결정전 및 결승전이 진행되었다.

2001년: 세 팀으로 구성된 세 그룹과 네 팀으로 구성된 한 그룹, 각 그룹의 1~2위 팀이 8강 진출, 준결승과 3위 결정전 및 결승전이 진행되었다.

 


 

3. 1989 할렌마이스터, 오토 대제와 베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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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88 분데스리가에서 우승을 차지한 베르더 브레멘 선수단의 사진. 베르더와의 작별을 앞둔 레전드 디터 부어덴스키에게 선수들은 끝내 마이스터샬레를 선물하는 데에 성공했다. (출처: DeichStube)

분데스리가 마이스터로서 피날레에 참가한 베르더는 그룹 스테이지에서 영 시원찮은 플레이를 펼쳤고 VfB 슈투트가르트를 위에 둔 채 겨우겨우 2등을 차지해 준결승에 진출했다. 오토 레하겔 감독의 단호한 금지에도 불구, 베르더의 선수들은 개의치 않고 몰래 도르트문트의 펍에 모여 작당 모의를 시작했다. 토마스 볼터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해결해야 할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상황이 이대로 흘러갈 순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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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베르더 브레멘과 슈투트가르트의 결승전 장면. 토마스 볼터(좌측)와 누워있는 미르코 보타바, 올리버 렉(우측)의 모습이 보인다. (출처: DeichStube)

토마스 볼터, 토마스 샤프, 미르코 보타바, 디터 아일츠, 올리버 렉과 만프레드 "마니" 부르크스뮐러 등이 맥주를 한 잔씩 손에 쥔 채 비판적인 논의를 시작했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 도르트문트 소속으로 활약했던 마니는 그날 저녁 자신이 그렇게 소개되기를 원치 않았기에, 팀원들에게 "정신을 가다듬어보자고, 친구들."이라 부탁했다고 볼터는 전했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정신을 한곳에 모아 상황을 뒤집는 데 성공했다. 선수들은 오토 레하겔 감독의 지휘하에 프랑크푸르트와의 준결승전에서 4대 1 승리, 슈투트가르트와의 결승전에서 6대 3 승리를 거둬 1989 DFB-할렌마스터스의 우승자가 되었다. 리가 우승에 이어 베스트팔렌할레에 모인 만 명의 관중 앞에서 또 한 번 마이스터가 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올리버 렉은 "우리는 이런 류의 토너먼트에서 항상 재미를 봤다."라며 그 시절을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베르더는 짭짤한 수익을, 그것도 비시즌에 창출해냈기에 당시의 단장이었던 빌리 렘케는 행복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선수들이 총 대여섯 번의 예선 토너먼트에 참여하도록 허락해 비시즌에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게끔 했는데, 베르더는 피날레 토너먼트 입성과 동시에 4만 마르크를 얻었고, 도르트문트에서의 우승과 함께 10만 마르크의 상금까지 획득해내는 데에 성공했다. 또한 베르더는 새해를 맞이해 취리히에서 열린 국제 토너먼트에도 참여했었는데, 여기서 우승을 해버리며 수년을 디펜딩 챔피언으로 반복해서 참가하는 고생을 하기도 했다.

 


 

4. 기회의 장, 화려한 골들, 새로운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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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부터 2001년까지 총 14년간 진행된 할렌포칼에서 우승을 차지한 역대 감독 명단. 호어스트 쾨펠의 2연속 우승, 유일한 다회 우승 등 도르트문트는 독보적인 활약을 펼쳤다. (출처: Spox, 작성자가 원본 사진을 한글화)

구단들은 이벤트성으로 여길 수도 있는 이 대회에 나름 적극적으로 진심을 다해 임했다. 장기간의 겨울 휴식기 동안 선수들의 경기력을 유지시킬 수 있을뿐더러 상당한 우승 상금이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1991년 글라트바흐의 감독 롤프 뤼스만은 클럽들에게 있어서 할렌포칼이 분데스리가와 DFB-포칼을 이은 "세 번째 기둥과도 같은 대회"라고도 표현할 정도였다. DFB-포칼과 마찬가지로 할렌포칼은 수많은 이변과 자이언트 킬링이 벌어진 공간이었다. 2부 리그의 팀들은 이따금씩 예선에서 의외의 활약을 통해 피날레에 진출하며 리그에는 없는 토너먼트만의 재미를 팬들에게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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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르크 도브리츠(좌측)와 디르크 그렘플러(우측)가 이끈 마그데부르크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극적으로 1991 DFB-할렌포칼의 피날레에 진출했고 BMG, 슈투트가르트, 바이언을 상대로 경기를 치렀다. (출처: AZ-Online)

분데스리가의 스타들은 어색한 환경에 하나같이 모여 팬들이 코앞에서 보이는 홀에서 활약했다. 분위기는 매우 좋았고 심지어는 가끔 경기가 과열되기도 했다. 방송사 DSF와 RTL이 8시간짜리 토너먼트를 통으로 중계하며 송출했기 때문에 팬들은 TV 앞에서 오후를 통째로 보내기 일쑤였다. 할렌포칼은 마치 독일의 한달짜리 박싱데이처럼 여겨졌다.

 

2000년 마스터스피날레 중계석의 모습. 뮌헨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그로이터 퓌르트가 묀헨글라트바흐를 2대 0으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출처: Getty Images)

확실히 작은 홀의 좁은 구장에서 펼쳐지는 할렌푸스발이었기에 여러 탈압박 기술들과 화려한 전개들이 자주 등장했다. 풋살과 달리 터치라인과 골라인이 바닥에 있지 않았고 광고판을 벽처럼 이용할 수 있었으며, 공이 떠 이 광고판 위를 넘어가면 터치라인에서는 필드플레이어가 손으로 공을 굴려 전달하고 골라인에서는 골키퍼가 경기를 재개했다. 이러한 경기 방식을 금방 숙달해낸 선수들은 주어진 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관중들의 눈을 즐겁게 할 여러 기술들을 첨가해 다득점 경기들을 만들었다.

 

 

 

 

 

2000년 뒤스부르크와 알레마니아 아헨의 경기. 아헨 소속의 티푸 디아네가 뜬 공을 발바닥을 활용해 감각적으로 그라운드에 튕겨낸 후 머리로 침착하게 원더골을 터뜨린 장면이다. (출처: 유튜브 채널 'acbobo')

 

무려 14년이나 진행된 대회인 만큼, 마치 청군으로 뛰었던 선수가 다음 해엔 백군으로 뛰듯 새로운 팀 소속으로 출전했던 선수들도 있었다. 그 중 마리오 바슬러는 헤르타 베를린, 베르더 브레멘, 바이에른 뮌헨, 카이저슬라우테른, 무려 네 팀 소속으로 출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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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 바슬러는 91/92~92/93 헤르타 소속, 93/94~95/96 베르더 소속, 96/97~99/00 바이언 소속, 99/00~00/01 라우턴 소속으로 DFB-할렌포칼에 출전하여 여러 유니폼을 입은 본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출처: Getty Images)

바슬러는 자서전을 통해 재밌는 일화를 밝힌 적이 있다. 바슬러는 헤르타 소속으로 할렌포칼에 출전했던 때 잠시 화장실에 갔다가, 뒤따라 들어온 오토 레하겔과 마주쳤다. 당시 베르더에서 장기 집권을 하며 좋은 성적을 거둬온 레하겔은 자신의 전화번호가 적힌 조그마한 쪽지를 그에게 건네며 작은 소리로 속삭인 후 다시 사라졌다. 이틀 후 바슬러는 베르더 브레멘으로 이적을 감행, 이후 훌륭한 시간을 보내고 할렌포칼에서는 잠시 골키퍼를 보며 날아다니기도 했다.

 


 

5. 노잼 연례 행사로의 전락


이렇게 순탄히 진행될줄만 알았던 할렌포칼은 다시금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인조 잔디에서 진행되는 경기이다보니 선수들의 부상 위험성이 더욱 증가해 주요 클럽들 사이에서 더 이상의 출전을 꺼려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관중수도 해를 거듭할수록 감소해갔다. 또한 구단들은 겨울 휴식기가 점점 짧아지며 데드라인과 마케팅적인 부분 중 무얼 택해야 할지 압박감을 느꼈는데, DFB는 여기서 결정적으로 최악의 수를 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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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라이프치히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차지한 베르더 브레멘. 빅토르 스크리프닉, 토어스텐 프링스, 프랑크 로스트 등 익숙한 얼굴들이 많이 보인다. (출처: Getty Images)

딜레마에 빠진 구단들이 다시 활발히 참여하도록 유도하고자 했던 DFB는 상금을 올리는 수를 취했다. 물론 구단들은 어느 정도 그들의 의도대로 다시 많이 참여하게 되었으나 이는 역효과를 일으켰다. 할렌푸스발이 붐을 일으켰던 이유는 뭐였을까? 바로 선수들이 가볍게 뛰며 많은 골을 터뜨리는 데에 있었다. 한때 상금의 상향을 통해 흥했기에 이게 다시 한 번 통할줄 알았으나 이번엔 오히려 좋지 않게 작용했는데, 대부분의 구단들이 기왕 참여하는 거 상금을 차지하기 위해 승리에 치중한 나머지 전술은 더욱 수비적으로 바뀌어 갔고 한창 흥하던 시기만큼 골이 많이 터지지 않아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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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베르더 브레멘과 운터하힝의 결승전 장면. 비욘 헤어틀(좌측)이 아일톤(우측)의 공을 뺏기 위해 경합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다. (출처: Getty Images)

결국 겨울 휴식기가 대폭 줄어드는 등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하에 DFB는 2001년 대회를 끝으로 할렌포칼을 역사 속에 접어두기로 결정했다. 마지막 마스터스피날레는 도르트문트에서 열렸는데, 이때 베르더가 좋은 활약을 펼치며 트로피 영구 소장의 기회를 눈앞까지 끌고 왔다. 그리고 결승전에서 만난 상대는 운터하힝. 베르더는 1대 1 접전을 끝으로 9미터 승부차기를 통해 마지막 우승자를 가르게 되었는데, 여기서 운터하힝이 승리하며 트로피를 건네주고 말았다.

 

 

 

 

 

2001년 베르더 브레멘과 운터하힝의 결승전 영상. (출처: 트위터 계정 'Maximilian')

 

베르더는 8년 뒤 마지막 유에파컵 트로피 영구 소장 기회도 샤흐타르에게 헌납하면서, 할렌포칼을 통해 두 개의 징크스를 얻었다. 대회 출범 후 2회에서의 우승과 트로피 영구 소장의 기회에서 미끄러지는 것 말이다.

 


 

6. 풋살과 인도어 풋볼의 차이점

 


풋살과 인도어 풋볼(할렌푸스발)의 가장 큰 차이점은 총 7가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다.

우선 첫 번째로 풋살은 야외와 실내에서 모두 플레이할 수 있지만 인도어 풋볼은 이름 그대로 인도어(실내) 환경 아래서 진행된다. 두 번째로는 풋살은 5 vs 5 경기로 진행되지만 인도어 풋볼은 5 vs 5와 6 vs 6 모두 가능하다.

세 번째 차이점은 벽의 유무이다. 4번 챕터에서 설명했듯 터치 라인과 골라인 선이 바닥에 그려 있는 풋살과 달리 인도어 풋볼은 광고판이 벽 역할을 한다. 그리고 벽에 공을 튕겨내 다시 받을 수가 있고 벽 위로 공이 떠 올라 나갈 경우에만 손으로 공을 굴리거나 키퍼가 볼을 전개해 경기를 재개할 수 있다.

네 번째로는 공의 규격 차이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 풋살은 축구공보다 훨씬 작은 전용 공인구가 따로 있다. 반면에 인도어 풋볼은 일반적인 축구공을 그대로 경기에 사용한다.

다섯 번째, 풋살 구장은 딱딱한 재질의 코트에서 진행되고 인도어 풋볼은 인조 잔디 구장에서 진행된다는 점이 다르다.

여섯 번째, 풋살 구장은 60.96m × 21.91m 정도의 규격을 만족시켜야 하나 인도어 풋볼 구장은 최소 24.99m × 14.93m, 최대 42.06m × 24.99m의 다소 넓은 범위의 규격만 충족시키면 이용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차이점은 풋살은 피파의 규정에 따라 진행되고, 인도어 풋볼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무료함에서 시작된 가볍고 즐거운 상상이 현실로 다가와 모두에게 재미를 선사했던 특별한 대회 DFB-할렌포칼.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아쉽게도 역사 속 한 페이지에 남은채 사라지고 말았지만, 누군가에겐 잊지 못할 추억과도 같은 존재일 것임이 분명하다. 언젠가 또 다시 축구 스타들의 인도어 풋볼 대회를 볼 수 있길 기원하며 글을 마친다.

 

참고 자료 출처) Sport-90, Wikipedia, Weser Kurier, Spox, DeichStube, Transfermarkt, Senda Athletics, Sport1, AZ-Online, 트위터 계정 'Maximilian'

 


 

페이스북 페이지 Die Grün-Weißen Korea / SV 베르더 브레멘 코리아 관리자
인스타그램 계정 Die Grün-Weißen Korea / SV 베르더 브레멘 코리아 부관리자
페이스북 Futball Creator United 편집자

공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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