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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역사 일본사 이야기 8 : 불교의 수용을 두고 일어난 싸움[발롱도르~]

고대 일본에는 전통적으로 신(神)을 모시는 신앙이 있었다.

이 신앙을 우리는 신토(神道; 신도)라고 부른다.

신토에서 일반적으로 모시는 신들은 대부분 조상신으로부터 비롯된 신들이다.

그리고 이 신들은 신사(神社)라고 부르는 제사 시설에서 모셔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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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신사

 

4~5세기 야마토에도 이미 이런 신토 신앙이 토착종교로서 자리잡고 있었다.

이때의 신토를 학계에서는 고신도(古神道)라고 부른다.

고신도의 신사를 관할하던 사람은 유력한 호족세력들이었는데, 그 중 모노노베씨(物部氏)와 나카토미씨(中臣氏)가 대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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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노노베씨 가문의 시신을 모시는 신사인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

 

이 무렵 한반도에는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전래되었다.

고구려에서는 중국 전진(前秦)에서 온 순도(順道)라는 사신이 불상과 불경을 가지고 고구려로 들어오면서 불교가 전파되었고, 이를 소수림왕이 국교로 공인하였다.

백제에서는 중국 동진(東晉)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백제로 오면서 불교가 전래되었고, 이를 침류왕이 공식적으로 수용하였다.

 

이러한 한반도의 배경 때문에 이 시기에 일본으로 넘어온 한반도계 도래인들은 개인적으로 불교를 숭배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소가씨(蘇我氏) 가문도 백제계 도래인들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그들을 휘하에 두고 있었던 글로벌 가문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불교를 믿게 되었다.

 

그러나 토착신들을 모시는 신토를 믿던 모노노베씨와 나카토미씨는 이것이 불편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들의 입장에서 불교의 신은 토착신이 아닌 오랑캐들의 신이기 때문이다.

 

6세기 중반, 센카 오오키미(宣化大王; 선화천황)가 즉위한 후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가 오오오미(大臣; 대신)으로 임명되었다. 

그로부터 몇년 뒤 백제의 성왕이 야마토 조정에 불교를 전해주면서 일본에도 공식적으로 불교가 전래되게 된다. - 불교의 전래 연도에 관하여 선화천황 대인 538년설과 흠명천황 대인 552년설이 존재함. 현재 학계에서는 538년설이 유력하다고 보고 있지만, 필자는 이보다 앞선 시기에 이미 도래인과 함께 사적 신앙으로 불교가 일본에 들어왔고 백제와 일본의 공적인 불교 교류가 여러 번에 걸쳐서 있었다는 점 때문에 불교 공전의 연도 확정에 의미를 두지 않고 있음. -

 

백제에서 불상과 경전이 들어오자, 오오키미는 호족들에게 불상과 경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물었다.

이에 오오오미인 소가노 이나메는 서쪽의 나라들이 모두 불을 숭상하는데 야마토만 그러지 않다면서 불교 수용을 주장하였고,

오오무라지(大連; 대련, 야마토의 최고 관직 중 하나)였던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와 그들과 함께 기존 신토 신앙을 중시하던 나카토미씨 등은 전통 신들이 노여워할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로써 불교를 둘러싼 호족들의 갈등이 시작되게 된 것이다.

 

이후 소가노 이나메가 킨메이 오오키미(欽明大王; 흠명천황)와 강력한 외척관계를 형성하게 되면서 소가씨는 불당을 짓는 것에 대한 허가를 받고 눈치 보지 않고 불교를 믿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갑자기 일본 전역에 역병이 크게 유행하게 되면서 반대파인 모노노베씨와 나카토미씨에게 빌미를 잡히게 된다.

 

모노노베씨와 나카토미씨는 역병이 불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국신(国臣)이 화난 것이라고 주장하여

킨메이의 허락을 받아 소가씨의 불당에 불을 질러버리고 불상을 싹 다 폐기처분 해버린다.

 

이 때문에 소가씨와 모노노베씨 간의 기싸움은 더 커지게 되었고...

 

불교를 둘러싼 소가노 이나메와 모노노베노 오코시의 대립은 그대로 그들의 자식인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와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에게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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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가노 우마코(좌)와 모노노베노 모리야(우)

 

소가노 이나메로부터 오오오미직을 물려받은 우마코는 비다츠 오오키미(敏達大王; 민달천황)으로부터 사적으로 불교를 수용하는 것에 대한 허락을 다시 받아낸다. - 하지만 비다츠 본인은 불교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함. -

이에 소가노 우마코는 백제로부터 직접 불상을 수입해와 적극적으로 교단을 조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비다츠 말기, 숭불에 관한 대립에 불을 지필 사건이 다시 한 번 발생하고 마는데....

바로 이전에 돌았던 역병이 또 다시 유행했던 것이다.

 

이에 모노노베노 모리야와 나카토미노 카츠미(中臣勝海)는 다시 소가씨의 불교 숭배 때문에 역병이 도는 거라면서 이전보다 더 심한 수준의 불교 탄압을 실시한다.

이번에는 단순히 불상을 폐기하고 절을 불태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여자 승려들의 옷을 벗기고 채찍질을 하는 등의 심각한 인권유린을 감행하였다.

- 하지만 불교를 탄압했음에도 역병이 사그라들지 않자, 일각에서는 불교를 탄압해서 역병이 생긴거 아니냐는 의혹이 나오기도 했다고.. 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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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노노베노 모리야의 불교 탄압

 

이렇게 모노노베씨와 나카토미씨에게 개 털리고 있던 소가씨에게 한줄기 희망이 찾아오게 됐는데...

비다츠 사후 즉위한 요메이 오오키미(用明天皇; 용명천황)가 불교에 귀의하고 공인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요메이는 킨메이 오오키미와 소가노 이나메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소가씨와 혈연이 있었다. - 즉, 소가노 우마코의 조카였던 것 -

그렇기 때문에 그가 소가씨의 영향으로 불교에 관심을 갖는 게 당연하게 보이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는 학설이 존재한다.

 

당시 일본의 신토에는 케가레(穢れ)라고 하는 부정(不淨) 또는 금기가 있었는데, 이 케가레에는 피나 병, 죽음 등이 속했다.

그리고 만약 이와 관련되게 되면 부정이 옮기 때문에 은둔이나 격리로써 이를 씻어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요메이는 즉위 당시 병마와 싸우고 있었는데, 신토의 입장에서는 병도 케가레이기 때문에 요메이도 격리 대상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요메이는 이를 피하기 위해 불교로 정식 귀의했다고 볼 수 있는 것.

 

어찌됐든 요메이는 불교를 공인하려고 했으나...

결국 병이 발목을 잡아 즉위한 지 2년만에 병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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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메이 천황

 

요메이 오오키미가 죽자, 불교를 둘러싼 소가씨와 모노노베씨의 싸움은 이제 후대 대왕 추대 문제를 둘러싼 정치 싸움으로까지 번지게 된다.

불교 탄압에 계속 부들부들 하며 모노노베씨를 벼르고 있었던 소가노 우마코는 자신의 지지자를 대왕에 옹립하기 위해 결국 무력을 통해서 모노노베노 모리야를 공격하게 되는데, 이를 정미의 난(丁未の乱)이라고 한다.

 

 

정미의 난

 

요메이 오오키미 사후, 소가노 우마코와 모노노베노 모리야는 각각 요메이 천황의 배다른 형제들인 하츠세베(泊瀨部) 황자와 아나호베(穴穗部) 황자를 지지하였다.

그 중 소가씨가 밀던 하츠세베는 요메이 오오키미처럼 엄마가 소가노 이나메의 딸이었기 때문에 소가씨의 피가 흐르고 있는 황자였다.

 

따라서 소가노 우마코는 하츠세베를 대왕으로 올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였고, 모노노베노 모리야를 무력으로 칠 계획을 세우게 된다.

 

587년 6월 소가노 우마코는 먼저 아나호베 황자를 죽이기로 한다.

그는 먼저 비다츠 오오키미의 황후이자 요메이 오오키미의 여동생이었던 야키야히메(炊屋姫)를 찾아가 명을 내려달라 했고, 야키야히메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아나호베가 있는 궁을 포위하고 아나호베를 제거했다. - 요메이 오오키미의 여동생이기 때문에 소가씨의 피가 흐르고 있었음. 요메이의 이복형제인 비다츠의 황후가 된 것은... 근친..... ㅎㄷㄷ.... 당시 일본은 이런 경우가 많았음... -

 

 사진11.jpg ◀ 야키야히메, 훗날 스이코 천황이 된다.

 

587년 7월, 소가노 우마코는 야키야히메와 논의하여 모노노베노 모리야를 처분하라는 명을 받아낸다.

야키야히메는 우마야도 황자(厩戸皇子; 훗날 쇼토쿠 태자)를 비롯한 황족과 소가씨를 지지하던 호족세력들을 연합한 '모노노베노 모리야 토벌군'을 구성해 소가노 우마코를 지원해줬다.

 

소가노 우마코의 군대가 모리야의 본거지였던 가와치쿠니(河内国; 현재의 오사카 동부)에 다다랐을때 모노노베씨의 군대와 강변에서 교전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모노노베씨는 당시 조정에서 군사와 관련된 역할을 맡고 있었기에 소가노 우마코의 군대보다 병력이 강했고,

더군다나 수비하는 입장이었기에 유리한 위치를 가져갈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이들의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 공격은 소가씨의 군대에게 엄청난 공포심을 제공하였다.

모노노베노 모리야 또한 직접 나무 위에 올라가 화살을 쏘면서 싸움에 가담하였다.

이에 오합지졸이 되고만 소가씨의 군대는 잠시 물러서기로 결정하고 퇴각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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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가노 우마코 군과 모노노베노 모리야 군의 교전

 

소가노 우마코의 군대는 퇴각 후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병사들이 화살 세례에 불안해 하자, 우마야도 황자는 직접 나무를 깎아 사천왕 불상을 만들어 공을 들이면서 승전을 기원했다고 한다.

이에 병사들도 다시 힘입어 싸울 의지를 갖게 되었고, 소가노 우마코는 다시 군대를 진군시킨다.

 

이번에도 모노노베 군은 동일한 양상으로 수비 전술을 펼쳤고, 모리야도 앞선 교전과 똑같이 나무 위에 올라가 화살 세례에 가담했다.

 

그러나

 

소가노 우마코 군의 토미노 이치이(迹見赤檮)가 나무에 있던 모노노베노 모리야에게 제대로 화살을 겨눠 명중시킴으로써 모리야를 죽이는데 성공한다.

수장이 죽어버리자 모노노베 군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소가씨 군대는 이 여세를 몰아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결국 소가씨의 군대는 모노노베씨 일족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이로써 모노노베씨는 완전히 멸망해버리게 된다.

 

이로써 우마코의 계획에 따라 하츠세베 황자가 대왕직을 맡게 되었고, 그가 스슌 오오키미(崇峻大王; 숭준천황)이 된다.

 

32e1a12e-s.jpg ◀ 스슌 오오키미

 

방해꾼이 없어진 소가노 우마코는 최고의 권력을 누리며 마음껏 불교를 장려하고 다녔다.

이제 소가씨의 세상이 된 것.

 

그러나 커져가는 소가노 우마코의 권력에 위협을 느낀 스슌 오오키미는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금방 탄로나 버렸고...

결국 소가노 우마코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 당하고 만다...

 

이후 소가노 우마코는 본인을 도와줬던 야키야히메를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추고천황) - 논란은 있지만 이때부터 '천황'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기 때문에, 추고천황 대부터 오오키미라는 표현 대신 천황으로 표기하겠음. - 으로 옹립하였고, 불교를 적극적으로 신봉하던 우마야도 황자를 황태자로 세워 조정의 지원을 받으며 적극적인 불교 문화를 꽃피울 수 있게 되었다.

 

 

번외) 소가씨에서도 신토를 믿었고, 모노노베씨에서도 불교를 믿었다?

 

위에서 다뤘던 내용이 통설이지만, 모노노베씨의 본고지였던 가와치쿠니의 주거 유적에서 씨사(氏寺)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견되었음.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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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노노베씨의 씨사로 추정되는 시부카와 폐사 유적(渋川廃寺跡)

 

따라서 신토를 공식으로 한 모노노베 씨조차 사적으로 불교를 신앙했을 가능성이 제기됨.

 

한편 소가씨도 신토를 경시한 것은 아님.

백제 왕자 혜(恵)가 성왕의 사망을 알리기 위해 야마토를 방문했을때, 소가노 이나메가 '불교만 믿고 국신을 경시한 것이 왕의 죽음을 자초했다'라고 전했다고 함..

따라서 소가씨도 불교와 함께 신토 신앙을 했을 가능성이 제기됨.

 

이를 바탕으로 숭불논쟁은 불교 자체의 수용 · 거부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불교를 국가 종교로 할 것인지'에 대한 견해 차이였다는 설과

불교에 대한 논쟁은 단순히 표면적 이유일 뿐이고 본질은 두 가문의 조정 내 세력 싸움이었다는 설이 제기되어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음.

 

 

 

 

1. 일본인의 선조는 어디서 왔을까?

https://www.flayus.com/26236850

 

2. 죠몬시대의 흐름과 죠몬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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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layus.com/26414494

 

4. 야요이인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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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야마타이코쿠는 어디에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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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야마토 정권의 성립과 고분시대의 시작

https://www.flayus.com/26923778

 

7. 소가씨의 등장과 외척으로의 성장

https://www.flayus.com/27276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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