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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역사 일본사 이야기 5 : 야마타이코쿠는 어디에 있었을까?[발롱도르~]

지난 회차에서 <위지> 왜인전에 적힌 야마타이코쿠(邪馬台國; 야마타이국)에 관한 내용을 살펴본 바 있다.

이 야마타이코쿠의 위치에 관해서, <위지> 왜인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依山島爲國邑

왜인은 대방의 동남쪽 대양 가운데에 있는데, 산과 섬을 의지해 국읍을 이룬다.

從郡至倭,循海岸水行歷韓國乍南乍東到其北岸狗邪韓國七千餘里

대방군에서 왜에 이르기까지는, 해안을 돌아 물 길로 가서 한국(마한)을 거치고 남쪽으로 가다 동쪽으로 가면 그 북쪽 해안인 구야한국(변한, 가야)에 도착하는데 7천여 리이다. 

始度一海,千餘里至對馬國 (중략) 又南渡一海千餘里名曰瀚海至一大國 (중략) 又渡一海千餘里至末盧國

비로소 바다를 건너 천여 리를 가면 대마국(대마도)에 도착한다. (중략) 또 남쪽으로 큰 바다를 건너 천여 리를 가면 일대국에 도착한다. (중략) 또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천여 리를 가면 말로국에 도착한다.

東南陸行五百里到伊都國 (중략) 東南至奴國百里 (중략) 東行至不彌國百里

동남쪽 육로로 500리 가면 이토국에 도착한다. (중략) 남동쪽으로 백리를 가면 노국에 도착한다. (중략) 동쪽으로 백리를 가면 불미국에 이른다. 

南至投馬國, 水行二十日 (중략) 南至邪馬壹國女王之所都水行十日陸行一月 (중략) 自郡至女王國萬二千餘里 

남쪽에는 투마국이 있는데, 물길로 20일 거리이다. (중략) 남쪽 물길로 10일정도 간 뒤, 육지로 올라 한 달 정도 가면 여왕이 다스리는 지역인 야마타이코쿠에 도착한다. 대방군으로부터 여왕국까지는 만 2천여리에 이른다.

- 야마타이코쿠를 당시 중국식 한자로 쓰면 邪馬臺國(사마대국)가 되어야 맞지만, 상기 인용자료의 첫 문장을 보면 邪馬壹國(사마일국)이라고 돼있다. 한 일본 자료에 따르면 (대 )자를 (한 )자로 오기한 것으로 사료된다고 한다. 해석은 필자가 해석과정에서 임의로 야마타이코쿠(사마대국)로 표기하였음. -

 

이 기록들을 토대로 학자들은 대방군(帶方郡)에서 야마타이코쿠까지의 거리를 유추하기 시작했다.

 

대방군은 원래 고조선 멸망 후 그 지역에 B.C.108년에 설치된 한사군 중 하나인 진번군의 한 현이었는데,

진번군이 낙랑군에 편입되면서 함께 낙랑군에 편입되었다가 후에 따로 독립하면서 군이 된 지역이다. 

 

사실 한사군의 위치가 학계에서 논쟁이 일고 있기 때문에, 대방군의 위치 또한 이에 따라서 논쟁이 일고 있다.

하지만 현재 주류 사학계에서는 현재 황해도 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필자도 이에 따라 서술할 것임을 알린다.

- 실제 근대에 진행된 연구도 이를 전제로 진행된 것으로 알고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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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대방군의 위치

 

처음에 인용한 <위지> 왜인전에 나온 여정의 경로를 그림으로 나타내보면 아래와 같다.

 

위지 왜인전 내용 지도 표시.png

위지 왜인전 내용 지도 표시 2.png

 

그러나 투마국과 야마타이코쿠로 가는 경로는 '남쪽 물길로 20일 거리', '남쪽으로 물길을 따라 10일, 육지로 올라 한 달'이라고 서술되어있기 때문에, 그 위치를 파악하기 굉장이 애매하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도 야마타이코쿠의 위치에 대한 결론을 정확히 내리지 못하고 두 가지 설 간의 장기간 논쟁이 일고 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정사인 <일본서기>는 히미코 여왕을 진구황후(神功皇后; 신공황후)로 상정했는데, 진구황후는 고대 일본에서 임시천황과 같은 역할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알려진 전설적 인물이다. - 진구황후는 현재 실존 인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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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미코가 진구황후라는 전제하에서, 진구황후는 <일본서기>의 기록상 향후 다룰 야마토 조정으로 이어지는 천황가의 계보를 잇고 있기 때문에 야마타이코쿠는 야마토 조정이 있던 야마토 지역(현재의 나라현)에 있었던 것이 아무 의심없이 정설로 받아들어져 왔었다. (야마토설)

 

적어도 에도시대 전까지는...

 

야마토.png

▲ 야마토 지역의 위치

 

그러나 에도시대에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와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의 연구에 의해 처음으로 '북부큐수설'이 제기되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히미코를 큐슈에 있던 쿠마소(熊襲; 웅습)족의 여왕으로 규정했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원래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라 야마토설을 주장했으나, <위지>왜인전을 읽고 연구한 결과 큐수설로 전향한 것으로 보인다. 

 

키타큐슈.png

▲ 북부큐수 지역의 위치

 

어찌됐든, 이렇게 에도시대에 시작된 야마토설과 북부큐슈설의 논쟁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1. 야마토설 (기내설, 긴키중심설)

야마타이코쿠 논쟁에 제대로 불을 붙인 건 다이쇼시대의 교토제국대학(이하 교토제대) 사학과의 나이토 토라지로(内藤虎次郎) 교수이다. -따라서 보통 교토제대나 교토제대의 후신인 교토대학 쪽의 학자들이 주로 야마토설을 주장한다. -

 

360px-NAITO_KONANN19340409.JPG ◀ 나이토 토라지로 교수

 

그는 연구를 통해 <위지>왜인전에 기술된 대방군에서 야마타이코쿠까지의 거리인 만 2천리의 거리와, 그 여정이 야마토 지역에 딱 들어맞음을 계산해냈다. - 참고로 위나라에서는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인 '리'가 두 장리와 단리 두 종류가 있었다. 장리는 1리에 400~500m 정도로 오늘날의 리와 비슷한 수치이고, 단리는 1리에 75~90m 정도 되는 짧은 수치이다. <위지> 왜인전의 기록은 단리로 적힌 것이고, 나이토 교수의 연구도 이를 바탕으로 진행되었다. -

 

나이토 교수의 이 연구 이후부터 야마토설의 가장 기본이 되는 근거 중 하나가 바로 이 '거리'이다.

 

야마토설의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를 간단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대방군에서 야마타이코쿠 까지의 거리가 대방군에서 야마토 지역 까지의 거리와 일치한다.
  • ② '야마토'와 '야마타이'가 언어학적으로 같은 계열의 음운이다.
  • ③ 히미코 여왕이 위나라에게서 받아온 '삼각연신수경'이 야마토 지역이 속한 긴키지방 위주로 대량 발굴이 된다.
  • ④ 일본 고대 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된 히미코의 통치 형태가 야마토 조정의 통치 형태와 합치한다.
  • ⑤ <위지> 왜인전에 기록된 관직명이 야마토 조정의 관직명과 부합되는 것이 많다. - 본고 최상단의 인용문엔 기재하지 않았지만 원문에선 인용한 문장 직후에 나오는 내용이다. -
  • ⑥ <위지> 왜인전에 기록된 인구는 약 7만여호인데, 당시에 이 정도의 인구는 대국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인구가 많았고, 통합을 통해 야마토 조정이 발달할 수 있었던 야마토 지역에 있었을 것이다. - 최상단 인용문엔 기재하지 않았지만 원문에선 ⑤번 내용 직후에 나오는 내용이다. -

 

그러나 이 야마토설의 최대 약점은 바로 '방향'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위지> 왜인전에 기록된대로 투마국에서 남쪽 물길을 따라 이동하면 야마토 지역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 야마토 지역은 완전한 동쪽 방향 -

 

야마토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약점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이 시기의 중국 사서가 방향을 표기함에 있어서 동쪽과 남쪽을 혼동하는 경우가 잦았던 점을 근거로 들면서, <위지> 왜인전도 마찬가지로 東을 南으로 잘못 기술했다고 말한다.

 

 

2. 북부큐슈설(큐슈설)

한편 도쿄제국대학(이하 도쿄제대) 사학과의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 교수는 교토제대의 나이토 교수에 맞서서 북부큐수설을 제시했다. -따라서 보통 도쿄제대나 도쿄제대의 후신인 도쿄대학 쪽의 학자들이 주로 북부큐슈설을 주장한다. -

 

Kurakichi_Shiratori,_acting_chancellor_of_Gakushuin.jpg◀ 시라토리 쿠라키치 교수

 

그는 <위지> 왜인전에 기록된 대방군에서 야마타이코쿠까지의 '방향'에 주목하여 논거를 펼쳤다.

그리고 이 '방향'은 북부큐슈설의 가장 기초적 근거가 된다.

 

이를 바탕으로 한 북부큐슈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 <위지> 왜인전에 대방군에서 야마타이코쿠로 가는 방향이 쭉 남쪽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이를 따라가면 큐슈 지역에 도달한다.
  • ② 북부큐슈에 '야마토'라는 이름의 행정구역이 존재한다.
  • ③ 큐슈를 가로지르는 강인 지쿠고강(筑後川; 축후천)의 평야가 큐슈제일의 평야이기 때문에, 세력이 강했던 야마타이국의 비정지로 적합하다. 또한 이 부근에 고분이 존재하는 등 고고학상으로 야마타이코쿠의 유적이 많다.

25397009180.jpg

▲ 지쿠고강 평야 (사진 출처 : https://amanaimages.com/info/infoRM.aspx?SearchKey=25397009180)

 

그러나 이 북부큐슈설의 최대 약점은 바로 '거리'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위지>왜인전에 기술된 대방군로부터의 만 2천리의 거리는 북부큐슈와의 거리에 비하면 너무 멀다..

 

이에 도쿄대학의 에노키 카즈오(榎一雄) 명예교수는 <위지>왜인전을 기록한 사절단이 북부큐수 위에 있던 왜의 소국인 '이토국(伊都国)'까지만 갔고, 그 이남에 대한 정보는 이토국 사람에게 듣고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근거로 제시된 것은 <위지> 왜인전에 있는 왜 소국들의 호에 대한 기록인데,

다른 소국들은 라는 '확실한 존재'를 나타내는 한자를 사용하여 그 수를 명확히 기록한 반면

투마국과 야마타이코쿠는 라는 '대략'을 나타내는 한자를 사용하여 기록되어 있다.

 

에노키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이토국 이후의 기술된 나라들의 거리는 

그 이전에 기술된 나라처럼 대방군으로부터의 거리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토국으로부터의 거리로 해석해야 한다는 새로운 해독법을 제시하였다.

 

이 관점에서 해석하여 계산하면 대방국에서 야마타이코쿠 까지의 거리가 큐슈에 절묘하게 맞는다.

 

71cf3bc79f3df8dc6fbdbef2cd11728b461028d4 (1).jpg ◀ 에노키 카즈오 명예교수

 

그러나 북부큐슈설은 한가지의 약점이 더 있는데 바로 인구이다.

 

북부큐슈설의 중심지로 거론되는 지역은

  • ① 치쿠고국의 야마토군(筑後国の山門郡; 현재의 후쿠오카현 야마토군)
  • ② 히고국의 키쿠치군 야마토코(肥後国の菊池郡 山門鄕; 현재의 구마모토현 야마토군)
  • ③ 오오스미국의 소가군(大隅国の囎唹郡; 현재의 가고시마현 소가군)

이 대표적인데, 이 세가지 지역 모두 그 규모가 <위지>왜인전에 기록된 7만호에 미치지 못한다.

 

 

야마타이코쿠 위치에 따라 일본 역사가 바뀐다?

야마타이코쿠 위치는 그때 당시에 큰 연합왕국이 존재했냐 안했냐를 알려주는 지표가 될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에 다룰 야마토 조정의 영향력이 야마토 지역의 긴키지방부터 북부 큐슈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따라서 야마타이코쿠가 야마토에 있었다면 야마토 조정이 생기기 이전인 3세기에 이미 긴키지방에서 큐슈까지 이르는 광역연합왕국이 존재했다는 말이 되고, 일본은 고대부터 여왕이 주변국을 통합하면서 중앙집권국가로 가는 과도기의 연맹왕국이 존재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변방인 큐슈에 있었다면 야마타이코쿠는 수많은 일본 소국 중 하나인 작은 변방국 중 하나가 되는 것이며, 고대 일본은 중앙집권국가로 가려는 움직임이 없이 그냥 작은 소국들만이 난무했던 시대인 것이다.

그리고 이후 야마토 정권은 이와 별도로 동쪽인 긴키지방에 큐슈의 야마타이코쿠를 통합했다는 소리가 된다.

 

즉.. 야마타이코쿠는 일본 고대사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버릴 수 있는 넘이다...

이 때문에 논쟁이 더 길어지는 것도 있을듯.

 

 

 

 

1. 일본인의 선조는 어디서 왔을까?

https://www.flayus.com/26236850

 

2. 죠몬시대의 흐름과 죠몬토기

https://www.flayus.com/26300797

 

3. 죠몬시대의 생활

https://www.flayus.com/26414494

 

4. 야요이인의 생활

https://www.flayus.com/26519620

댓글 6

best 슈퍼루키나상호 작성자 2018.06.23. 19:59

맞습니다! 사실 두 설 다 위지 왜인전의 해석에 끼워맞추기 식으로 나온 설이다보니 근거가 미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학계에선 결론이 안나고 있습니다.. 일본 현지에선 아직도 관서쪽 학자들과 관동쪽 학자들이 이게 맞다 아니다 이게 맞다 하면서 싸우고 있는 추세죠.. 둘다 논리에 허점이 있고 그걸 증명하지 못하니 일어나는 일 같네요.

 
고고학적 근거는 실제 위나라에서 하사받은 동경이 집중 출토되는 야마토설이 더 탄탄하긴 합니다.. 그렇지만 북큐슈 쪽에서 그게 또 출토가 아예 안되는 것도 아니고.. 비슷한 시기의 다른 유물을 큐슈설에서 주장하는 경우도 있구요 ㅋㅋ 어쨌든 현재까지도 결론이 안나고 있습니다
 
또 일본은 히미코가 있던 직후인 3세기 부터 대형 고분들을 조성하기 시작해서 전국적으로 고분군이 대량 형성됩니다. 심지어 약3세기에서 7세기정도 까지 대형 고분들을 만들다보니 일본사학계는 아예 이 시기를 '고분시대'라고 칭해서 따로 분류를 할 정도죠. 그렇기 때문에 사실 같은 유물일지라도 출토된 고분의 연대가 다른 경우가 꽤 있습니다. 세대에 걸쳐서 물려받다가 나중에 묻히는 경우도 있고 하니까 그런 것 같네요. 
 
일본서기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는게 사실입니다 ㅋㅋ 신화적요소가 많이 가미되어 있기도 하구요
개축난민 2018.06.23. 04:00
사전 정보가 없는 채로 글을 접하고 의견을 좀 달아보자면

두 설 모두 근거가 많이 미약하네

먼저 야마토설은
음운론은 근거가 많이 미약하고
고사기나 일본사기는 히미코 신화를 역사로 편입하려고 시도한 사서니까
야마토 조정의 것들과 유사할 수 밖에 없지

큐슈설은 그나마 대방군에서(위지 동이전은 중국의 서서니까, 낙랑이나 대방군을 통해서 들어온 자료로 기술된 자료가 많이 보임. 대방군을 기준으로 거리를 잰 것이 맞을듯) 거리가 맞고 고분군이 있다는 근거가 있긴 한데

이 정도 시간이 지났으면 고고학적 근거와 교차검증이 많이 됐을 것 같은데
최근의 결론은 어떰?
어차피 당시의 일본에 통합 대국은 없었을 것이고
난립한 소국을 퉁쳐서 마한이라 칭한 것처럼
7만호라는 규모도 비슷한 개념인 것 같은데
댓글
개축난민 2018.06.23. 04:14
 개축난민
전편까지 읽어보니 여러 고분에서 나오는 청동거울이 꽤 강력한 근거로 보이는구나

다만, 히미코가 거울을 나눠줬고 여러 고분에서 발굴되므로 역사적 사실이라고 한다면

발굴된 고분들의 축조연대가 매우 비슷해야 하고

아무리 차이가 나도 한 세기를 넘을 순 없겠지

일본서기를 잠깐 읽었을 때 느낀건데

히미코를 비롯한 일본의 사서에서 담고 있는 고대의 여성 인물들은

고대 종교 전쟁의 상징처럼 보이더라.

큐슈에서 혼슈 서부에 이르는 하나의 종교 개념이 퍼졌거나, 강한 세력을 점하고 있었고

그 상징이 히미코라고 하면

제례품으로써 청동거울의 출토가 이해 되는듯?



댓글
best 슈퍼루키나상호 작성자 2018.06.23. 19:59
 개축난민

맞습니다! 사실 두 설 다 위지 왜인전의 해석에 끼워맞추기 식으로 나온 설이다보니 근거가 미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학계에선 결론이 안나고 있습니다.. 일본 현지에선 아직도 관서쪽 학자들과 관동쪽 학자들이 이게 맞다 아니다 이게 맞다 하면서 싸우고 있는 추세죠.. 둘다 논리에 허점이 있고 그걸 증명하지 못하니 일어나는 일 같네요.

 
고고학적 근거는 실제 위나라에서 하사받은 동경이 집중 출토되는 야마토설이 더 탄탄하긴 합니다.. 그렇지만 북큐슈 쪽에서 그게 또 출토가 아예 안되는 것도 아니고.. 비슷한 시기의 다른 유물을 큐슈설에서 주장하는 경우도 있구요 ㅋㅋ 어쨌든 현재까지도 결론이 안나고 있습니다
 
또 일본은 히미코가 있던 직후인 3세기 부터 대형 고분들을 조성하기 시작해서 전국적으로 고분군이 대량 형성됩니다. 심지어 약3세기에서 7세기정도 까지 대형 고분들을 만들다보니 일본사학계는 아예 이 시기를 '고분시대'라고 칭해서 따로 분류를 할 정도죠. 그렇기 때문에 사실 같은 유물일지라도 출토된 고분의 연대가 다른 경우가 꽤 있습니다. 세대에 걸쳐서 물려받다가 나중에 묻히는 경우도 있고 하니까 그런 것 같네요. 
 
일본서기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는게 사실입니다 ㅋㅋ 신화적요소가 많이 가미되어 있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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