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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칼럼 [잉글랜드 인물열전] The Wizard: 마술사 스탠리 매튜스 (上)[발롱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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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최고령 선수(42세 103일)가 된 스탠리 매튜스. (원본 사진 FIFA, 컬러 복원 & 그래픽 편집 필자)]

 

흔히, 축구계에 오랫동안 헌신한 사람을 ‘축구에 인생을 바친 사람’이라 일컫는다. 혹자는 엘리자베스 1세의 명언을 오마주하여, 나는 축구와 결혼하였노라 선언한다. 한낮 공놀이에 불과한 오락거리에, 그들은 인생을 바쳤노라 이야기한다. 영웅을 만들고, 그들을 숭배한다. 한낮 오락에 전쟁이 멈추고, 외교 국제 관계를 해소한다. 1888년 풋볼 리그가 창립된 이래, 프로 축구는 지구촌 주민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수많은 영웅이 축구계에 몸담았고, 그들을 ‘축구에 인생을 바친 사람’이라 일컫는다. 그 단어의 객체는 펠레가 될 수 있고, 마라도나가 될 수 있으며, 메시가 될 수 있다. 어쩌면, 그는 어느 유스 팀에서 열심히 훈련하고 있는 한 젊은이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들이 뛸 당대의 축구를 지배했으며, 당대 축구계의 영웅으로 여겨졌다. 많은 이들은 항상 그들과 그들 전 시대의 영웅을 비교했고, 그 논쟁은 다음 세대까지 계속된다. 그들은 공놀이 좀 잘한다고, 세대에 걸쳐 수많은 토론을 낳는다. 유복하지 못했던 환경에서 성장하여, 일과 축구를 병행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손에 넣는다. 어쩌면, 그들의 삶은 단순한 영웅 스토리가 아니라 일종의 자기계발서로 세상에 남을지도 모른다. 길어야 20년, 지도자를 한다면 30년까지. 그들이 축구계에 존속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사후에도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들을 ‘영웅’이라 부르고, 그들의 가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그들이 선사했던 기쁨을 잊지 못함이 아니었을까. 축구 황제를 보며 즐거움을 느꼈던 할아버지, 황금의 소년을 동경했던 아버지, 소년 레오의 성공담을 보며 축구 선수의 꿈을 꾸는 아들까지. 비록 그들이 본 것은 다른 선수지만, 분명 그들은 같은 정서를 공유하고 있으리라.

 

스탠리 매튜스도 잉글랜드인들의 가슴속에 남은 영웅 중 한 명이었다. ‘드리블의 귀재’, ‘마술사’ 등의 호칭은 아직도 스탠리만의 것이며, 잉글랜드에서 아직도 그보다 더 많은 나이로 현역 생활을 유지한 선수는 찾아볼 수 없다. 잉글랜드의 공격수를 논할 때, 지미 그리브스, 스티브 블루머, 앨런 시어러 등 많은 선수가 언급되지만, 꾸준함은 이 선수를 이길 수 없었다. 흔히, 축구계에 오랫동안 헌신한 사람을 ‘축구에 인생을 바친 사람’이라고 일컫는다면, 스탠리 매튜스가 바로 이 별명에 적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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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매튜스 생가. 잉글랜드 스탠퍼드셔 주 스토크온트렌트 시 헨리 구 시모어 스트리트 소재]

 

스탠리 매튜스는 1915년 2월 1일, 잭 매튜스의 4남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잭 매튜스는 ‘헨리의 왕 주먹 이발사’라고 불리던 권투 선수였고, 실제로 매튜스가 그의 가업을 이어가길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매튜스는 어린 시절부터 축구 선수를 꿈꾸며 자랐고, 특히 스토크 시티의 라이벌 팀인 포트 베일을 응원하며 자랐다.

 

스탠리 매튜스는 이미 6세부터 절식과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음식을 찾으며 철저한 식이요법을 지켰는데, 매주 목요일이면 온종일 당근 주스만을 섭취하곤 했다. 그는 복식 호흡 등의 호흡 훈련, 집안 가구(의자 등)를 이용한 드리블 연습 등을 통해 기본기를 쌓는 것도 게을러 하지 않았다. 아들의 이러한 모습에 감명 깊었는지, 아버지 잭 매튜스는 스탠리가 잉글랜드 스쿨보이즈(학생 국가대표팀)에 선발될 경우 축구 선수의 길로 나아가도 좋다는 허가를 내렸다.

 

1929년 마침내 잉글랜드 스쿨보이즈에 뽑히게 된 스탠리 매튜스는 원래 자신의 포지션인 센터 하프(센터백)이 아닌 아웃사이드 라이트(2-3-5 포메이션에서 오른쪽 측면에 위치하는 선수로, 오늘날 라이트 윙어가 되었다.)로 뛰게 되었다. 이는 그가 재학하던 학교의 축구 감독이 바꾸게 한 것이나, 이 탁월한 선택은 곧이어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다.

 

1930년, 스탠리 매튜스는 포트 베일의 라이벌 팀인 스토크 시티에 14세의 나이로 입단했다. 울버햄튼 원더러스, 아스톤 빌라, 버밍엄 시티, WBA 모두 그를 노렸지만, 스토크 시티의 감독 톰 매더가 직접 아버지 잭 매튜스를 설득하며 스탠리 매튜스를 영입하는 것에 성공했다. 스탠리 매튜스는 1930년 스토크 시티 리저브 팀에서 22경기를 뛰며 활약했고, 14세의 나이로 매우 유망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 그의 첫 경기에서 아버지 잭 매튜스가 한 말은 영원히 그가 겸손한 모습을 유지하게 하는 장치가 되었다.

 

“나는 너의 뛰어난 모습을 보았지만, 한편으로는 네 부족한 부분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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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1월, 프래디 스틸과 함께]

 

1931-32 시즌이 되어, 스탠리 매튜스는 스토크 시티 리저브 팀에서 두 번째 시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드리블 능력을 향상하기 위하여 새로운 도전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노력 중 하나로, 필자는 맨체스터 시티전을 들 수 있겠다. 스탠리 매튜스는 맨체스터 시티전에 레프트 풀백(2-3-5 포메이션에서 좌측 수비수. 오늘날의 레프트 센터백에 해당.)으로 출전하여, 수비수의 관점으로 공격수의 드리블을 관찰하고자 했고, 이를 통해 수비수의 약점을 간파하여 드리블 능력을 향상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아웃사이드 포워드(오늘날의 윙)는 그들을 마크하는 수비수들이 달려들기를 기다렸다가 수비수를 제칠 것을 권했지만, 스탠리는 상대의 수비를 속도로 먼저 재친 후 안쪽으로 파고드는 움직임을 보였다. 현대의 윙어들이 일반적으로 시도하는 것이나, 당대에는 가히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그렇게 그는 1931-32 시즌 리저브 팀에서 22경기를 뛰었고, 스토크 시티와의 유스 계약이 만료되었다. 스토크 시티가 그를 유스로 영입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스탠리와 프로 계약을 맺기 위해 많은 구단이 경쟁에 뛰어들었다. 잠재력이 뛰어났던 점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여러 구단들은 그의 자기 관리 능력을 눈여겨보았다.

 

스탠리는 술, 담배를 하지 않았고, 식사를 거의 거르지 않았으며 건강한 식단을 유지했는데, 이는 당시 축구 선수 중에서는 매우 드문 사례였다. 오늘날. 자기관리는 축구선수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소양 중 하나지만, 당시 내로라하는 축구 선수들은 담배를 피웠고, 칼로리가 높고 건강에 좋지 못한 기호식품들을 섭취했다. 그렇지 않았던 스탠리였기에, 여러 구단의 관심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토크 시티를 버리지 않았다. 16세의 나이로 스토크 시티와 프로 계약을 맺었으며, 불과 16세의 나이로 주급 5파운드에 달하는 혜택을 받았다. 당시 5파운드는 스토크 시티의 웬만한 고참 선수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는데, 이는 당시 스탠리에 거는 스토크 시티의 기대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요소였다.

 

1932-33 시즌이 시작되고, 톰 매더 감독의 스토크 시티는 디비전 2(2부리그)에서 순항을 거듭한다. 스탠리도 15경기에서 선발 출장하며 스토크 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고, 특히 그의 데뷔골이 그가 어린 시절 응원했던 팀이자 스토크 시티의 라이벌 팀인 포트 베일을 상대로 터졌기에 더욱더 의미가 남달랐다. 스토크 시티는 2위 토트넘 핫스퍼를 승점 2점 차로 따돌리며, 디비전 2에서 우승을 거두어 승격에 성공했다.

 

디비전 1에 승격한 1933-34 시즌, 29경기에서 선발 출장하며 스토크의 잔류를 도왔고, 이어진 1934-35 시즌에는 처음으로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며 포터스뿐만 아닌 전(全) 잉글랜드의 미래임을 증명했다. 1935-36 시즌에는 새로운 기술인 “더블 바디 스워빙(페인팅)”을 개발하며 더욱 위협적인 공격수로 발돋움했다. 그의 자서전인 “그때는 그랬지(The Way It Was)”에 따르면, 양방향으로 페인트를 준 후 수비를 제치는 이 기술을 허더즈필드 타운전 처음 선보였을 때 스토크 시티 팬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스토크 시티의 전성기를 이끌 선수로 주목받았고,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신성으로 떠올랐다. 그와 스토크 시티의 관계는 영원할 것만 같았다.

 

보드진과의 마찰이 없었다면.

 

2편에서 이어집니다.

댓글 8

best 서윤경 2020.07.04. 13:49
포트베일빠가 스토크가서 포트베일상대로 데뷔골 ㅁㅊㅋㅋㅋ
김수윤 2020.07.04. 13:44
스탠리 매튜스라니이이 펨미 고!!!
댓글
best 서윤경 2020.07.04. 13:49
포트베일빠가 스토크가서 포트베일상대로 데뷔골 ㅁㅊㅋㅋㅋ
댓글
스스사사 2020.07.04. 14:21
위닝인가 피파에 이 분 이름 딴 개인기 있지 않나여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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