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설정

축구칼럼 [잉글랜드 인물열전] 9: 딕시 딘[발롱도르~]

딕시 딘 제목.png

9번 하면 당신은 어떤 선수가 떠오르는가.

 

 호나우두,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페르난도 토레스 등 내로라하는 공격수들이 차지했던 그 등번호를 보면 자연스레 골잡이들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어느 팀이든 9번이라는 등번호는 분명 그 팀을 상징하는 사람들이 향유했던 등번호였을 뿐만 아니라, 팀의 승리를 결정짓는 골잡이들만이 달 수 있었던 영광스러운 번호였다.

 

 1930년대의 에버튼 FC를 대표하는 이 선수도 다르지 않았다. 지역 라이벌 팀 리버풀 FC의 침체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에버튼 팬들은 이 선수와 함께 황금기를 보내며 긴 시간 동안 머지사이드 축구를 지배하게 되었다.

 

 에버튼 FC의 9번 중 그를 능가한 선수는 아직까지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에버튼 FC에 국한된 것이 아닌, 잉글랜드 풋볼 리그 역사상 그와 견주는 9번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에버튼에서 처음으로 등번호 9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은 선수이자, 에버튼 FC의 9번의 대명사가 된 선수. 머지사이드의 심장부에서 세상을 떠난 선수.

 

 오늘 잉글랜드 인물열전에서는 딕시 딘에 대해 알아본다.

birkenhead.jpg
[비컨헤드 타운 홀, 머지사이드 주 버컨헤드]
 

 윌리엄 랄프 딘, 통칭 '딕시 딘'은 1907년 1월 22일 체셔 주 버컨헤드에서 태어났다. 많은 이들이 딕시 딘에게 '머지사이드에서 태어나 머지사이드에서 죽은 남자'라는 수식어를 달지만, 사실 그는 머지사이드 주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딘이 태어난 곳인 버컨헤드는 출생 당시 체셔 주에 속해있었고, 버컨헤드가 머지사이드 주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된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난 1974년이었다. 버컨헤드는 머지 강을 끼고 머지사이드 주 리버풀과 마주 보고 있는데, 그렇기에 당시에는 머지사이드 주 자체로 분류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지 5세의 왕실 기차 운전사였던 랄프 브렛과 아버지 윌리엄 스르 덕에 그는 에버튼 FC를 응원하며 컸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에버튼이 우승을 거둔 1914-15 시즌 그를 데리고 다녔고, 딘은 이에 열광했다. 한편 그의 청소년기는 1차 대전과 겹치기도 했는데, 7~11살의 나이었던 그는 어린이로서 전쟁에 승리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각 가정에 우유배달을 했다고 한다. 그는 레어드 스트리트 학교를 다니다 11살에 알버트 기념 공업학교로 전학갔다. 그가 그곳으로 전학간 이유는 '축구팀에서 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14살에 학교를 떠나 아버지의 직장인 위럴 철도에 견습공으로 취업한다. 그는 다른 이들이 기피하던 야간 견습공을 선뜻 지원했고 야간 견습공으로 일했는데, 이는 역시 '축구를 계속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견습공들은 밤에 석유회사에서 나오는 쥐들을 무서워하여 야간 견습공 자리를 기피했는데, 딕시 딘은 오히려 밤에 쥐들을 벽을 향해 차곤 했다고 한다.

 

 그러던 그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위럴 철도의 지배인의 아들을은 뉴 브라이튼 A.F.C.(2012년 해체)의 보드진들이었는데, 그들은 딘을 눈여겨보았고 실제로 스카우트 제의를 하였다. 이후 트랜미어 로버스의 제의를 받기 전까지, 그는 펜스비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한다.

 

딕시 딘 트랜미어 로버스.jpg
[트랜미어 로버스에서]

 

 펜스비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하던 와중에, 고향 버컨헨드의 로컬 클럽 트랜미어 로버스가 그에게 스카우팅 제의를 한다. 그의 나이 16세의 일이었다. 하지만 입단한지 1년이 지났을 무렵, 그에게는 엄청난 시련이 다가오게 된다. 선수 커리어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한 명의 남성으로서 그는 잃어서는 안 될 것의 반쪽을 잃게 된다.

 

 때는 그의 나이 17세. 알트링엄과의 연습 경기에서 그는 알트링엄의 센터백에게 태클을 당하게 되는데, 하필이면 당한 위치가 영 좋지 못한 곳이었다. 위키피디아 문서에서 [출처가 필요한 내용]이라고 언급되어 있는 이야기일 만큼 풍문에 가까운 이야기이지만, 딕시 딘은 부상 당시 동료 선수가 환부를 문지르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문지르지 말고, 몇 개 남아있는지 세어보라고!"

 

 아무튼 고환 한 쪽을 잃어버린 딕시 딘은 트랜미어에서 2시즌 간 30경기에 출장하여 27골을 기록했고, 한 쪽을 잃은 대신(?) 일약 스타로 떠오르게 되었다. 아스날과 뉴캐슬, 그리고 에버튼이 노렸고 결국 로컬 클럽 에버튼이 그를 영입하게 된다.

 

 딕시 딘은 이적료의 10%를 제공받기로 했지만, 버트 쿠크 감독은 리그 규정에 따른 것이라며 겨우 1%를 딕시 딘에게 넘긴다. 딕시 딘은 해당 이적룔 모두 부모님에게 드렸고, 그의 부모님은 버컨헨드 종합 병원에 이를 기부했다. 실로 그 부모에 그 아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딕시 지방.png

[미국의 남부지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남북 전쟁 이후 '딕시'라고 불린다.]

 

 여기서 잠깐. 딕시 딘의 '딕시'는 도대체 어디서 온 단어일까? 많은 이들은 미국 남부 사람과 같이 그가 검은 눈과 검은색 머리의 생김새를 했기에 어린 시절 '딕시'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남북 전쟁 당시 불러졌던 딕시라는 노래에서 기원한 이 별칭은 이후에도 미국 남부 지방을 부르는 명칭으로 굳어졌다. 1980년 딕시 딘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제퍼리 그린은 타임즈에 부고를 냈는데, 그는 딕시 딘이 어릴 적에 유행하던 'Dixie'라는 노래에서 기인한 별명이라고 언급하며 이 주장에 신뢰성을 더했다.

 

  한편 트랜미어 로버스의 역사 전문가 길버트 업튼에 따르면, 그의 별명인 'Dixie'는 어렸을 적 그의 행동에서 기인했다고 말한다. 딕시 딘은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할 때, 여자아이들을 잡을 때 주먹으로 그녀들의 등을 가볍게 툭툭 치곤(Dig) 했다. 따라서 그는 'Digsy'라고 불렸고, 이후 이것이 변화하여 'Dixie'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어찌 되었든 윌리엄 랄프 딘은 '딕시' 딘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후자로 더 많이 불린다. 사족이지만, 야사에 따르면 그의 가족들은 이 별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Billy'나 'Bill'을 더 좋아했다고.

딕시 딘 에버튼.jpg
[1928년, 에버튼에서]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1925년 딕시 딘은 마침내 그의 드림 클럽인 에버튼 FC로부터 제안을 받게 된다. 토마스 H. 맥킨토시가 그에게 제의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버컨헤드에서 4km에 달하는 거리를 단숨에 달려가 에버튼 FC와 계약을 체결한다. 앞서 언급했듯 트랜미어 로버스는 3천 파운드의 이적료를 통해 클럽 이적 레코드에 해당되는 이적료를 받았고, 약속한 300파운드의 10% 밖에 되지 않는 30파운드를 딕시 딘에게 넘긴다.

 

 딕시 딘은 첫 시즌부터 32골을 몰아치며 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듬해 여름 웨일즈의 홀리웰 지방에서 끔찍한 오토바이 사고를 당했으나 다시 뛸 수 없을 것만 같다는 의사의 예상과 달리 다음 경기에 멀쩡히 나와 헤더 골을 기록하며 팬들에게 또 다른 충격을 주었다. 당시 에버튼 팬들에게는 '의사들이 딘의 머리에 철판을 남겨두었나 보구나'라는 농담이 유행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1927년 그는 활약을 인정받아 20세라는 젊은 나이로 국가대표팀에 데뷔하게 되며, 1927년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 출전하여 2경기에서 4골을 기록한다. 스코틀랜드가 결국 우승을 거두었지만, 그들은 대회 최다 득점자인 딕시 딘에게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딕시 딘 fa컵 우승.jpg
[1933년 맨체스터 시티와의 FA컵 결승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트로피를 받는 딕시 딘]

 

 1927-28 시즌은 딕시 딘과 에버튼에 있어서 기록적인 시즌이었다. 이전까지 미들즈브러의 조지 컴셀이 기록하고 있던 한 시즌 최다골인 59골을 깨며 60골로 풋볼 리그 단일 시즌 최다 득점자에 올라섰으며, 팀은 리그 우승을 거두었다. 특히 리그 2경기를 남겨두고 53골을 기록하고 있던 그에게 있어서 기록을 깬 것은 마법과도 같은 일이었다.

 

 당시 딕시 딘은 3월부터 4월까지 4경기에서 한 골도 넣지 못하며 득점 가뭄에 시달리고 있었고, 리그 2경기를 남겨둔 상황에서 그는 7골 이상을 기록해야만 조지 컴셀을 넘을 수 있었다. 번리와의 맞대결에서 4골을 넣고 5-3으로 승리를 거둠과 동시에 리그 우승을 확정 지은 딕시 딘이었지만, 경기에서 부상을 당하며 마지막 경기 출전이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팀 닥터 해리 쿡은 그를 출전 가능하게 케어했고, 마지막 경기인 아스날전에서 시즌 7번째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기적적으로 역대 풋볼 리그 단일 시즌 최다 득점자 자리에 오른다. 

 

 모든 아스날 선수들은 그와 악수하며 그의 기록을 축하해 주었고, 이후 아스날이 동점골을 넣으며 경기는 비겼지만 에버튼 팬들 중에 경기 결과를 신경 쓰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나이 22세의 일이었다. 한편 1929년 그는 다시 한번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 출전했고, 아일랜드를 상대로 한 골을 기록했다.

 

 에버튼이 강등된 이후에도 그는 팀에 남아 1930-31시즌 디비전 2 우승을 이끌었고 승격 후 1931-32 시즌 리그 우승과 1933년 FA컵 우승을 이끌었다. FA 컵 결승 당시 그는 9번과 주장 완장을 차고 있었는데, 그는 에버튼의 9번과 주장 완장을 달고 처음으로 결승전에서 득점한 선수가 되었다. 이후 그가 에버튼을 떠날 때 그는 5개의 트로피와 2번 득점왕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고, 통산 349경기에서 399골을 득점한 선수로 기록되었다.

 

 딘은 에버튼에서의 전성기와 함께 국가대표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16경기에서 해트트릭 2번을 포함하여 총 18골을 넣었다. 딕시 딘이 국가대표에서 현역일 당시 국제 대회로는 1928, 1936 올림픽과 1930 제 1회 FIFA 월드컵이 있었지만, 잉글랜드나 영국 단일팀은 해당 대회에 모두 참가하지 않았다.

 

 한편 1938년 에버튼은 그의 대체자로 토미 로튼을 클럽 레코드로 영입했는데, 딕시 딘은 그에게 "나는 당신이 나의 대체자로 온 것을 알고 있소. 혹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한 도와주겠소."라고 말했다. 1년 후 토미 로튼은 버스에서 한 버스 안내원에게 "당신이 토미 로튼이오?"라는 질문을 받았고, 기쁜 마음에 로튼은 "네!"라고 외쳤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버스 안내원은 "당신은 절대로 딕시 딘만큼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없을 것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한 잡지의 말을 빌리자면, 버스 안내원의 말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어떤 선수도 딕시 딘에 버금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1938 노츠 카운티에서.jpg
(1938년, 노츠 카운티에서)

 

 선수 생활 말년에 접어든 그는 노츠 카운티로 이적했으나, 부상으로 인해 단 9경기만을 출전하고 아일랜드의 슬라이고 로버스 FC로 이적한다. 그가 슬라이고에 도착할 때, 슬라이고 철도역은 그를 보기 위한 팬들로 붐볐다고 한다. 그는 7경기에서 10골을 기록했고, 한 경기에 5득점을 기록한 것은 아직도 슬라이고 로버스의 한 경기 최다 득점으로 남아있다.

 

 그는 컵 대회도 출장하여 컵 대회 결승전에 득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1-1로 비긴 이후 재경기에서 1-0으로 패하며 준우승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의 준우승 메달은 이후 도난당했는데, 39년이 지나 그가 1978년 슬라이고 로버스가 컵 결승전에 진출한 것을 보기 위해 아일랜드로 왔을 때 준우승 메달이 그의 호텔 방에 배달되었다고 한다.

 

 이후 머지사이드의 허스트 FC(현 애쉬튼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는데, 당시 4-0으로 패배했음에도 관중들이 몰려 £140라는 기적적인 관중 수입을 기록했다. 당시 잉글랜드 이적 레코드가 £14,500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매우 높은 수치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3일 후 그는 4-1로 승리를 거둔 경기에서 헤더로 득점을 기록하며 팬들에게 기쁨을 주었으나, 해당 경기에서 부상을 당했다. 재활도 잠시, 2차대전이 발발하며 그의 선수 커리어는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

딕시 딘 동상.jpg
[딕시 딘 동상, 구디슨 파크]

 

 은퇴 후 그는 체스터에서 조용히 펍을 운영했으며, 시간이 흐르고 배팅 회사 리틀 우즈의 위럴 지부 사무실의 수위로 일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그는 그곳에서 차분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기억되었다고 한다.

 

 에버튼 구단에 의해 종종 초청받아 경기를 봤지만, 1972년 건강 악화 이후 그는 거의 경기를 보러 가지 못했다. 그는 1980년 3월 1일 오랜만에 구디슨 파크에서 머지사이드 더비를 관전하였으나, 종료 휘슬이 경기장에 울려 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향년 73세였다.

 

 빌 샹클리가 그를 "베토벤, 렘브란트, 셰익스피어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사람"이라고 말했듯 그는 위대한 선수였지만, 매우 신사적인 선수이기도 했다. 많은 도발과 비도덕적인 행위를 당했던 그였지만, 그는 한 번도 퇴장당하지 않았을뿐더러 카드를 받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은퇴 후에도 팬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았고, 2001년 구디슨 파크 앞에 동상이 세워지기에 이르렀다.

 

 에버튼의 9번이자 1930년대 잉글랜드를 대표했던 9번. 그가 기록한 '단일 시즌 60골'이 깨지는 날이 올까? 이 질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한다.

 

 "사람들은 나에게 단일 시즌 60골 기록이 깨질 것 같냐고 물어본다. 나는 깨질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이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저기 저 물 위를 걷는 친구 말이다. 나는 그가 이 기록을 깰 유일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

추천은 힘이 됩니다.

 

잉글랜드 인물열전 시리즈

 

1편 - 브라이언 클러프 - https://www.flayus.com/47743757

사람들은 흔히 "로마는 하루아침에 지어지지 않았다."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런 특별한 일을 맡지 않았다. -...
에펨네이션 / 2020-01-19

 

2편 - 스티브 블루머 - https://www.flayus.com/47837786

Steve Bloomer´s watchin´, 스티브 블루머께서 보고 계셔 Helping the fight, 전투를 도우시며, Guiding the...
에펨네이션 / 2020-01-21

 

 

3편 - 알프 커먼 - https://www.flayus.com/48197253

1888년 풋볼 리그 출범 이후 2020년까지 잉글랜드는 한 세기 하고도 반 세기에 달하는 역사를 자랑해왔다. ...
에펨네이션 / 2020-01-25

 

 

댓글 5

이주빈 2020.03.06. 01:05
다 읽었습니다만 기억에 남는 건 고환밖에...
댓글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23/24 시즌 결산 이벤트 정산] 리무루 484 4
공지 [2024년 신년인사 겸 첫 공지] 9 리무루 772 4
공지 국내기사 전문 혹은 대부분을 긁어오는 행위를 엄격히 금하는 이유 1 김수윤 4530 14
공지 축구정보/칼럼 갤러리에서 글 쓰실 때 제발 공지사항을 꼭 읽어주세요 김수윤 3919 17
공지 FMNATION 축구정보/칼럼 갤러리 공지사항(2020. 9. 13~) Giallorossi 3965 51
공지 축구정보/칼럼 갤러리 연재 시리즈(2019. 10. 16~) 6 Giallorossi 5361 17
국내기사
이미지
머레보 125 -1
번역기사
이미지
Noel갤러거 129 4
번역기사
이미지
Noel갤러거 53 1
국내기사
이미지
머레보 220 6
오피셜
이미지
Aritz 148 12
번역기사
이미지
Noel갤러거 385 11
오피셜
이미지
강미나 159 8
번역기사
이미지
Noel갤러거 367 7
번역기사
이미지
Noel갤러거 400 16
번역기사
이미지
Noel갤러거 390 15
번역기사
이미지
rowletter 933 28
번역기사
이미지
rowletter 472 20
축구칼럼
이미지
varclub 352 9
번역기사
이미지
Noel갤러거 348 8
번역기사
이미지
Noel갤러거 237 5
번역기사
이미지
Noel갤러거 290 7
번역기사
이미지
Noel갤러거 387 9
번역기사
이미지
Noel갤러거 331 10
오피셜
이미지
시너 316 11
번역기사
이미지
Noel갤러거 330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