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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칼럼 [잉글랜드 인물열전] The First K: 알프 커먼[발롱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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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풋볼 리그 출범 이후 2020년까지 잉글랜드는 한 세기 하고도 반 세기에 달하는 역사를 자랑해왔다. 이 과정에서 더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혹은 더 스타성 있는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 잉글랜드 클럽들은 그들의 지갑을 열어왔다.

 

클럽 레코드, 혹은 월드 레코드 영입은 클럽에 있어 만족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크나큰 실망을 가져오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말 그대로 '레코드'(기록)을 갱신하는 이적료는 그 자체로 기록(레코드)에 남는다.

 

최근 잉글랜드 풋볼 리그에 기록된 리그-레코드 이적료에 해당되는 기록은 필리페 코치뉴가 바르셀로나로 이적할 때 발생한 이적료인 £105m이다. £105m. 풋볼리그의 창립자들은 이런 천문학적인 이적료가 발생하리라는 것을 예상이나 했을까?

 

코치뉴의 이적 10년 전 호비뉴가 맨체스터 시티에 입단할 때 기록한 리그-레코드 이적료는 £32.5m이었고, 그보다도 12년 전 앨런 시어러가 뉴캐슬이 입단할 때 기록한 리그-레코드 이적료는 £15m이었다. 이보다도 9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마크 휴즈는 바르셀로나로 £2.3m의 리그-레코드 이적료를 기록하며 잉글랜드 땅을 떠난다.

 

10년을 주기로 잉글랜드 이적료 리그-레코드 그래프를 만들어보면 매우 가파른 곡선을 이룬다. 아니, 5년을 기준으로 만들어도 결과는 다르지 않으리라.

 

115년 전 이맘때, 잉글랜드 땅은 £1k라는 천문학적인 이적료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우리가 필리페 코치뉴의 이적료를 봤을 때처럼.

 

스코틀랜드 국적의 선수가 잉글랜드 풋볼 리그-레코드에 달하는 이적료를 갱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당시, 마침내 잉글랜드 국적의 선수는 리그-레코드에 달하는 이적료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1k"의 벽을 허물게 된다.

 

오늘은 115년 전 이맘때 전 잉글랜드를 혼란에 빠뜨린 이 남자, 알프 커먼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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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필드 전경)

 

알프 커먼은 1880년 5월 25일, 선덜랜드 시 교외의 밀필드에서 태어났다.

 

사실 그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지만, 우리는 기록을 통해 그가 선덜랜드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르기 전까지 사우스 힐튼과 재로우 FC에서 뛰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00년 선덜랜드에 입단하여 프로 데뷔에 성공했고, 인사이드 포워드 혹은 중앙 공격수로 뛰었다.

 

1900-01 시즌, 그는 18경기에서 6골을 기록했다. 174cm의 크지 않은 신장을 가진 그였지만, 날렵한 몸과 강력한 슈팅으로 그는 팬들의 눈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다. 공격수로서 많은 골은 아니지만, 그는 뛰어난 유망주로 평가받았던 것이다.

 

1901년, 선덜랜드는 디비전 1에서 2위로 시즌을 마무리했고 알프 커먼은 유망함을 인정받아 £325에 셰필드 유나이티드에 합류한다.

 

1904년 잉글랜드-리그 레코드가 £700라는 점을 미루어보아,  검증되지 않은 신인에 £325를 투자했다는 것을 통해 그만큼 알프 커먼이 매우 유망한 선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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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셰필드 유나이티드에서)

 

'오버페이 논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알프 커먼이 어느새 새 직장 셰필드 유나이티드에 완전히 적응했던 것이다.

 

그는 FA컵에서 특히 활약하며 팀을 결승에 올렸고, 결승전에서 팀의 첫 골을 기록하며(비록 무승부가 되어 재경기를 했지만) 셰필드 유나이티드의 우승을 이끌었다.

 

선덜랜드가 손해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공교롭게도 선덜랜드는 01-02 시즌 리그에서 우승컵을 들었다. 이른바 win-win이라는 거다.

 

FA컵 우승 이후 그는 셰필드 유나이티드의 확고한 주전 맴버로 자리잡았고, 1904년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 소집되기 전까지 계속 좋은 폼을 유지했다.

 

1904년 2월 29일 웨일스와의 경기에서 데뷔골을 기록했으며, 이어지는 아일랜드 전에서도 득점했다.

 

1904년 그는 이적요청 후 다시 선덜랜드로 £520의 이적료로 돌아가는데, 이적 요청 사유가 매우 독특했다.

 

당시 FA는 임금 제한 상한선을 두고 있었고, 이는 그리 높지 않았기에 대부분의 축구 선수들은 합법적으로 인정된 부업을 가지고 있었다. 그 부업에는 클럽과 함께 사업을 진행하여 사업은 사업대로 돈을 벌고 구단에 투자한 것만큼 배당금을 받는 방식도 있었는데, 이 경우 배당금이 구단에서 선수에게 임금을 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임금이 또 초과되는 경우가 발생했고, 이럴 경우 선수는 사업적으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알프 커먼은 "사업적인 이익을 위해서"라고 이적 사유를 밝혔고 자세한 것은 밝히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이적 사유를 위와 같이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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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들즈브러에서)

 

선덜랜드로 이적한 지 채 6개월이 지나지 않아 그는 이적하기로 마음먹는다. 단 21경기 만에 그는 미들즈브러로 이적했다.

 

그리고 이것은, 잉글랜드 이적 역사를 뒤집는 이적이 된다.

 

£1000.

£10³

£1k.

 

윌리 그로브스가 WBA에서 아스톤 빌라로 이적하며 £100이라는 레코드 이적료를 기록했던 것이 불과 12년전인 1893년. 잉글랜드 사람들은 불과 12년만에 10배를 뛰어넘는 천문학적인 수치와 마주했던 것이다.

 

잉글랜드는 경악에 빠졌다.

기자들은 선수들이 마치 경주마와 같이 사고 팔리고, 선수들의 충성심은 결국 사라져 "용병"들로 팀을 꾸리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담긴 기사들을 쏟아냈다.

 

FA는 미들즈브러의 재정 문제에 의문점을 던졌고, 커먼의 이적에는 문제점을 찾을 수 없었으나 선수들에게 불법 상여금을 지급한 것을 찾아내어 미들즈브러 보드진 13명 중 12명을 물갈이한다.

 

이러한 이적을 막기 위한 FA의 움직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FA는 알프 커먼과 같은 이적을 막기 위해 1908년 1월 "£350 이상 이적료 금지법"을 발의하여 시행했던 것이다.

 

하지만 알프 커먼은 이미 이적시장계의 새로운 문을 열었다. 그 법은 클럽들 사이에서 철저하게 무시당하며 3개월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모든 사람들이 커먼의 이적에 부정적으로 반응한 것은 아니었다. 노스 이스턴 데일리 가제타는 커먼이 강등권인 미들즈브러가 강등권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미들즈브러가 강등권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10경기 중 최소 5경기에서 승리를 거두어야 했기에, 이는 제아무리 £1000의 이적료로 입단한 커먼이라도 힘든 과제였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가? 1k의 사나이였다. 2월 25일 셰필드 유나이티드 원정에서 그들은 커먼의 골로 앞서나가기 시작하더니, 결국 가제타가 언급한 5승을 달성한 후 강등을 막아내는 것에 성공한다.

 

다음 시즌 알프 커먼은 24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올랐고, 1906년 더비 카운티에서 이적해온 스티브 블루머와 호흡을 맞추며 무시무시한 공격진을 이룬다. 활약에 힘입어 잉글랜드 대표팀에 다시 소집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1909년에 등장한 유망주 조지 엘리엇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고, 울위치 아스날(現 아스날 FC)로 팀을 옮기게 된다.

 

1910년까지 미들즈브러에서 그는 168경기를 뛰었고 65골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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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위치 아스날에서)

 

1910년 여름 울위치 아스날로 이적한 그는 9월 1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전에 데뷔전을 가졌다.

 

첫 시즌에는 겨우 6골을 기록했지만, 이듬해에는 17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올랐다. 하지만 활약도 잠시. 그는 그 다음 시즌 한 골도 기록하지 못했다.

 

그의 마지막 행선지는 지는 해였던 프레스턴 노스 엔드였다. £250에 이적한 그는 7골을 넣었고, 프레스턴 노스 엔드가 풋볼 리그 디비전 2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것에 큰 공헌을 했다.

 

이후 현역 생활 마지막 시즌, 그는 단 13경기에 출전하여 2골을 기록했고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에는 달링턴에서 1943년까지 펍을 운영했고, 1946년 숨을 거두었다. 1998년, 그는 풋볼 리그를 빛낸 레전드 100인 중 한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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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많은 이들에게 '패닉 바이'라고 평가받았던 그는 영혼의 단짝 스티브 브루머와 함께 '풋볼 리그를 빛낸 레전드 100인'에 들었다.

 

기자들이 우려했던 바와 다르게 그는 '1k'의 선을 뚫으며 잉글랜드 이적시장 시스템의 발전을 가져왔다.

 

판데이크부터 해리 매과이어까지.

최근 잉글랜드에 부는 이적료 상승 바람은 후대에 이르러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

 

115년이 지나 오늘날을 돌아본다면, 코치뉴의 £105m도 껌값이 되어있을까.

 

그리고 그 이적료의 주인공들은 어떻게 평가될까.

 

'패닉 바이', '생태계 혼란의 주범'이 될지, '최고의 영입'이 될지는 두고 볼만한 일이다.

 

[잉글랜드 인물열전]

 

1편 브라이언 클러프 - https://www.flayus.com/47743757

 

2편 스티브 블루머 - https://www.flayus.com/47837786

댓글 4

Terrtaa 2020.01.25. 19:52
이거보니까 pl에서 2천억 영입은 누가찍을지 궁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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