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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칼럼 [잉글랜드 인물열전] 로마라도 하루 아침에 지을 수 있었던 건축가: 브라이언 클러프[발롱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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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로마는 하루아침에 지어지지 않았다."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런 특별한 일을 맡지 않았다. 

 

- 브라이언 클러프 - 

 

로마는 하루 아침에 지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축구팀을 재건시키는 일은 하루 아침에도 가능하다. 

 

어쩌면 오만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말이다. 

 

그의 성격 또한 그러했다. 혹자는 그를 조세 모리뉴 감독과 비교하기도 할 정도로, 클러프는 오만하면서도 그만한 성과를 내는 감독이었다. 

 

라이벌리를 가지고 있는 두 팀에게 칭송 받는 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오만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그로서는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노팅엄 포레스트-더비 카운티 어느 팀을 응원하든 이스트 미들랜즈 주민들에 있어서 그는 명백히 전설적인 인물이며 칭송받는 인물이다. 

 

독불장군이었던 그가 어떻게 이스트 미들랜즈의 우상이 되었으며, 로마라도 하루 아침에 재건할 수 있는 인물이 되었는가? 

 

왜 양팀 팬들은 40년이 넘도록 "제 2의 브라이언 클러프"를 기다리는가. 

 

누구보다도 보드진과 싸워왔지만, 누구보다도 팬에게 지지를 받았던 사람. 

 

오늘은 최고의 건축가이자 최고의 우상파괴자(Ultimate Iconoclast)였던 그의 발자취를 추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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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미들즈브러 vs 레이튼 오리엔트 경기에서) 

 

1935년 3월 미들즈브러에서 태어나, 빌링엄 신소니아 FC의 유스팀을 거쳐 미들즈브러에 입단하여 공격수로 뛰었다. 그의 엄청난 감독 경력에 가려져 선수 시절은 그다지 비추어지지 않지만, 실제로 그는 선수 시절에도 매우 뛰어난 선수였다. 현역 시절 그의 동료였던 앨런 피콕에 따르면, 그는 마무리 능력이 매우 뛰어났던 공격수였다고 한다. 

 

9년간 미들즈브러와 선덜랜드에서 뛰며 274경기에서 251골을 넣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풋볼리그 최다 득점자 50위 안에 드는 기록으로 남아있다. 또, 그의 득점 확률인 91.6%는 역대 잉글랜드 풋볼리그에서 뛴 선수 중 가장 높은 수치에 해당되며, 스코틀랜드 리그까지 합쳐도 2위에 해당되는 수치이다. 

 

1962년 12월 26일 로커 파크에서 열린 베리 FC와의 경기에서 클러프는 악몽과 같은 부상을 당하게 된다. 경기장에는 집중 호우와 추운 날씨에 빙판이 형성되었는데, 클러프는 결국 득점 도중 베리의 키퍼 크리스 하커와 충돌한다. 클러프의 십자 인대는 찢어졌고, 그는 2년 뒤에 복귀했으나 3경기만을 뛰고 은퇴했다. 당시 십자 인대 부상은 곧 은퇴를 의미했다. 

 

29살에 십자인대 부상을 당하며 은퇴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위대한 감독이 아니라 위대한 선수로 더욱 더 부각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는 미들즈브러의 레전드로 인정받으며 선수시절에도 여러 기록에 남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러나 선덜랜드에서 클러프는 심각한 부상을 당한 것 말고도 앨런 브라운의 엄격한 규율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되고, 추후 감독이 되었을 때 그의 지도 철학을 그대로 물려받게 된다. 

 

 

TELEMMGLPICT000220154009_trans++96UHJ2MDA6f6gb9Wif_l5DsxkMnZlRMdasaZQeq5tJY.jpeg.jpg(하틀풀스 유나이티드에서 선수단 수송 버스를 운전하는 클러프) 

 

선덜랜드에서 유소년 감독직을 수행하고 있던 30세의 젊은 지도자를 부른 것은 하틀풀스 유나이티드였다. (現 하틀풀 유나이티드, 네셔널 리그 팀) 만약 제의를 받아들인다면, 당시 풋볼 리그에서 가장 어린 감독이 탄생하는 것이었다. 

 

그는 바로 하틀풀스의 제의를 받아들였고 수석코치로 당시 프로 리그가 아닌 논리그에 있었던 버튼 앨비언 (現 리그 1 소속팀)의 감독이자 과거 미들즈브러 시절 동료였던6 피터 테일러을 데려온다. 이후 피터 테일러는 항상 브라이언 클러프와 함께하며 신화를 써내려 간다. 

 

당시 하틀풀스 유나이티드는 풋볼 리그 디비전 4에서 6시즌간 4번이나 최하위의 2팀으로 시즌을 마무리 했고, 이는 클럽의 재정에 큰 타격을 주었기에 브라이언 클러프는 좋은 성적을 내어야만 했다. 

 

매우 좋지 않은 클럽 재정을 그나마 안정시키기 위해 클러프는 지역의 펍을 돌아다니며 돈을 모았고, 심지어는 원정 경기 선수단을 수송하기 위해 버스 운전사 자격증을 취득해야만 했다. 사진에서 우리는 선수단 수송 버스를 운전하는 클러프를 볼 수 있다. 

 

1966년 11월 15일, 그가 선임했던 감독들과 항상 심리전을 했다고 알려진 구단주 에른스트 오드는 더이상 지불할 돈이 없다며 수석 코치 피터 테일러를 경질했다. 클러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에 에른스트 오드는 화를 내며 클러프 또한 경질했다! 

 

이 이야기는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여 에른스트 오드의 독단에 화난 하틀풀스의 이사회는 에른스트 오드를 경질했고, 클러프와 테일러는 복직하게 된다. 

 

1966-67년 하틀풀스 유나이티드는 8위라는 성적을 내며 훌륭한 반등을 하게 된다. 성적에 힘입어 클러프는 추후에 다른 팀에서 함께 뛸 훌륭한 선수인 레스 그린과 존 맥거번을 영입하게 된다. 

 

1967년 5월 2부리그의 더비 카운티는 팀의 변화를 위하여 브라이언 클러프와 피터 테일러를 영입한다. 한편 하틀풀스는 브라이언 클러프가 남긴 유산을 통해 다음 시즌 사상 최초로 승격의 꿈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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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5월, 베이스볼 그라운드에서) 

 

브라이언 클러프가 부임할 당시 더비 카운티는 10년간 2부리그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심지어 근 5년간은 상위권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들에게 우승은 1946년 FA컵 우승이 전부였다. 

 

브라이언 클러프의 첫 시즌도 상위권과 매우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지난 시즌보다 한 순위 낮은 18위를 기록했고, 많은 팬들의 원성을 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비는 로이 맥펄랜드, 존 오헤어, 존 맥거번, 앨런 힌튼, 레스 그린 등 미래에 더비에서 활약할 선수들을 영입한다. 이러한 폭풍 영입은 여러 선수들의 이적에서도 기인했는데, 당시 더비는 66-67 시즌의 베스트 11에서 케빈 헥터, 앨런 더번, 론 웹스터, 콜린 볼튼 등 4명만 남았다. 

 

클러프는 팀을 개혁하기 위해 스카우터들과 보좌관들을 해고했으며, 데이브 맥케이와 윌리 칼린 등을 새로 영입하며 68-69 시즌의 포문을 열었다. 더비는 22경기 무패 행진을 달리며 그 시즌 2부리그에서 우승을 거둔다. 

 

브라이언 클러프는 위에서 말했듯, 앨런 브라운의 축구 철학을 계승했다. 선수들에게 매우 공정한 플레이를 할 것을 요구했고, 선수단에 매우 엄격한 규율을 요구했으며 언론의 도발에 응하지 않을 것을 당부했다. "Mr. 클러프"라는 그의 별칭은 이것에서 기인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더비는 승격 첫 시즌에 4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더비 보드진은 재정적으로 부정을 저질렀고, 구단은 한 시즌 유럽 대항전 출전 금지를 당했으며, £10k의 벌금을 물었다. 이에 많은 전문가들은 더비의 강등을 예상했으나, 더비는 9위로 시즌을 마무리하며 다음 시즌 도약을 노린다. 

 

1971년 2월 브라이언 클러프는 보강의 필요성을 느꼈고, 콜린 토드를 클럽 레코드와 동시에 영국 역사상 최고 이적료인 £17.5k에 영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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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마지막 경기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브라이언 클러프와 피터 테일러) 

 

1971-72 시즌은 마지막까지 우승 트로피의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시즌이었다. 리버풀, 리즈 유나이티드, 맨체스터 시티와 함께 우승 경쟁을 했던 더비 카운티. 

 

리버풀과 리즈는 마지막 경기에서 승리를 거둘 경우 우승 트로피를 들 수 있었으나, 각각 아스날에 비기고 울버햄튼에 패하며 우승 기회를 놓쳤다. 맨체스터 시티는 마지막 경기에서 1위로 도약했으나, 잠시 후 열린 경기에서 더비가 다시 승점을 챙기며 결국 더비가 승점 1점차로 우승을 거두게 된다. 

 

1971-72 시즌 풋볼 리그 디비전 1에서 우승을 거둔 건 풋볼 리그 출범 이후 88년만의 우승이었으며, 브라이언 클러프와 피터 테일러는 엄청난 영광을 손에 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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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구단주 샘 롱슨과 함께) 

 

1972-73 시즌 시작과 함께 구단주 샘 롱슨과의 불화가 시작된다. 브라이언 클러프는 앞서 언급했듯 조세 모리뉴처럼 거센 고집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항상 보드진과 마찰을 일으켰다. 

 

1972년 프리시즌, 브라이언 클러프는 가족과 동행하지 않을 경우 네덜란드와 서독으로의 프리시즌 투어를 떠나지 않을 것을 선언한다. 이에 샘 롱슨은 프리시즌 투어는 가족 여행이 아닌 감독의 업무라는 것을 분명히 하라고 했고, 브라이언 클러프는 결국 프리시즌 투어에 불참하며 수석코치 피터 테일러를 대신 보낸다. 

 

결국 더비는, 1972년 FA 채리티 실드 (現 FA 커뮤니티 실드)에 불참한다. 당시 FA컵 우승팀인 리즈도 불참을 선언했고, 결국 1972 채리티 쉴드는 1부리그 4위 맨체스터 시티와 3부리그 1위 아스톤 빌라의 경기로 빌라 파크에서 펼쳐진다. 맨체스터 시티는 덕분에 통산 3번째 채리티 쉴드를 들어올린다. 

 

불화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브라이언 클러프는 보드진의 동의를 받지 않고 당시 월드레코드 이적료인 £22.5k에 레스터의 데이비드 니쉬를 영입한다. 더비의 디렉터인 잭 커클랜드는 다시는 이런 비싼 돈을 들여 선수를 영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1972년 9월 3일, 더비 카운티가 그들의 홈구장 베이스볼 그라운드에서 2-1로 승리를 거두자, "팬들은 우리가 경기 막바지 앞서고 있을 때에만 응원가를 불렀다. 지고 있을 때도 응원가를 듣고 싶다."라고 발언했을 뿐만 아니라, 보드진의 정책을 문제 삼았다. 다음날 구단주 샘 롱슨은 몸소 팬들 앞에 나서서 고개를 숙였다. 

 

1972-73 시즌 더비는 리그 우승을 거두지 못했고 7위에 그쳤지만, 유로피안 컵 4강까지 진출하며 선전했다. 하지만 유벤투스를 상대로한 유로피안 컵 4강에서 유벤투스에 패하자, 이탈리아 기자들을 도발했고 2차대전 당시의 이탈리아를 운운하며 FA와 더비 카운티의 보드진들에게 더욱 더 미움을 샀다. 

 

사실 1972년 4월 더비가 우승을 거두기 몇개월 전 브라이언 클러프는 코번트리 시티의 감독직을 맡기 위해 일시적으로 사임했다가 그것을 번복한적이 있는데, 샘 롱슨과 사이가 틀어진 것은 그때부터 였으리라. 

 

1973년 10월 샘 롱슨은 보드진에 클러프의 경질을 요구했으나, 이 의견은 지지 받지 못했다. 이에 샘 롱슨은 알코올 중독이었던 클러프와 테일러에게 술을 끊을 것을 요구했고 TV에 출연하여 공격적인 발언을 하는 것을 그만둘 것을 요구했다. 

 

브라이언 클러프와 피터 테일러는 과거 그들이 에른스트 오드를 보드진에서 물러나게 했던 것과 같이 샘 롱슨을 내쫓고자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10월 15일 저녁 자진 사임한다. 

 

말년이 이렇게 좋지 못했다면, 팬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놀랍게도, 팬들은 클러프와 테일러의 복직을 원했다. 

 

브라이언 클러프는 보드진과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팬들과는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심지어 사임 후 다음 홈 경기에서는 팬들이 클러프와 테일러를 복직 시킬 것을 요구하는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브라이언 클러프가 더비 카운티를 떠난 이후 감독직을 맡은 데이브 맥케이는 1974-75 시즌 더비 카운티에게 다시금 우승 트로피를 안겨 주었다. 하지만 브라이언 클러프의 유산이 전부 사라진 1980년 더비는 강등을 당했고, 1984년에는 해체를 겨우 면하며 3부로 강등된다. 1987년 더비는 다시 1부리그로 승격했으나, 아직까지 당신의 명성을 찾지 못했다. 

 

브라이언 클러프 또한 노팅엄 포레스트에 감독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명성을 찾지 못했고, 그의 1차 전성기도 막을 내린다. 

 

더비 카운티와 브라이언 클러프의 이별은, 양측이 모두 내리막길을 걷게 될 것임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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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논리그 팀인 월튼 & 렉섬에 FA컵에서 4-0으로 패배한 경기에서 테일러와 함께) 

 

본론으로 돌아가보자. 클러프의 백룸 스태프들은 그에 대한 대단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피터 테일러는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1973-74 시즌 그는 풋볼 리그 디비전 3의 브라이튼 & 호브 알비온의 감독으로 임명되었으나, 32경기에서 단 12경기이서 승리를 거두며 큰 실패를 거둔다. 여기까지면 다행이지. 브라이튼은 논리그 팀인 월튼 & 렉섬에 FA컵에서 4-0으로 패하며 자존심을 구긴다. 

 

1973년 12월 1일, 브라이튼은 브리스톨 로버스에 8-2로 패했고 브라이언 클러프는 시즌 도중 경질당했다. 

 

결국 브라이튼 & 호브 알비온은 1973-74 시즌을 19위로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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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FA 채리티 쉴드, 컬러 복원 사진.) 

 

명장이라도 한 번 무너질 수 있다고? 

 

브라이언 클러프의 진정한 흑역사는 리즈 유나이티드 시절이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으로 보드진에 맞서는 그를 볼 수 있다. 

 

돈 레비 감독이 잉글랜드 국가대표 팀으로 떠난 당시 리즈 유나이티드는 후임으로 재야에 머물던 명장을 찾고자 했다. 리즈 보드진이 보기에 그 적임자는 브라이언 클러프였으며, 리즈 팬들과 보드진은 그와 함께하는 밝은 미래를 꿈꿨다. 

 

사실 당시 클러프의 리즈행은 굉장히 의외였는데, 과거 클러프는 돈 레비의 스타일이 매우 더럽다고 비판하며 (앞에서 언급했듯 클러프는 공정한 플레이를 선수들에게 요구했다.) 리즈 유나이티드를 "더티 리즈"로 표현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첼시 감독 재임 시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 재임 시절 토트넘에 대해 말을 아끼지 않은 모리뉴의 이적과도 굉장히 흡사하다. (물론 경기 스타일은 전혀 다르지만.) 

 

브라이언 클러프는 6경기에서 단 한 경기만을 이겼다. 획득 가능한 승점 12점 중에서 단 4점만을 얻어냈다. 10년 넘게 리즈에서 일한 돈 레비 감독보다도 더 많은 돈을 쓴 클러프로서는 비판을 면하기 힘들었다. 

 

또한, 돈 레비의 "더티 리즈"식 팀색을 없애고자 했던 그를 보드진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심지어 클러프의 급여는 £98k로, 당시에는 매우 높은 금액이었다. (그런데 못했으니!) 

 

결국 클러프는 부임 44일만에 경질되었고, 리즈 팬들과 보드진의 야유를 들으며 요크셔를 떠난다. 로마라도 하루만에 재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는 이제 없었다. 

 

그렇다. 그는 "지는 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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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1월 6일, 시티 그라운드에서) 

 

1975년 1월 6일,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경질 당한 그 시즌. 

전 소속팀 더비 카운티가 다시 우승을 거둔 그 시즌에 브라이언 클러프는 풋볼 리그 디비전 2의 노팅엄 포레스트의 감독으로 취임한다. 

 

당시 노팅엄 팬들은 매우 극심한 라이벌 관계였던 더비 카운티 출신을 감독으로 선임한 것과, 이제 퇴물이 된 명장을 선임한 것에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클러프는 자신의 커리어의 개선과 동시에 노팅엄을 어떻게 고쳐야할지 알고 있었다. 

 

그와 항상 함께했던 선수인 존 맥거번과 존 오헤어를 다시 영입했고, 존 로버트슨과 마틴 오닐과 같은 선수를 핵심으로 만든다. 

 

브라이언 클러프는 그 시즌을 16위로 마무리 했고, 75-76 시즌에도 승격에는 실패했으나 다음 시즌 준비는 완벽해 보였다. 그 이유는 클러프가 팀을 성공적으로 리빌딩 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6년 7월, 클러프의 영혼의 단짝 피터 테일러가 수석 코치로 합류하며 팀은 더욱 강해진다. 

 

잠깐, 그동안 테일러는 어디에 있었냐고? 

 

1973년 12월 클러프가 브라이튼 & 호브 알비온에서 경질당한 이후 테일러는 브라이튼에 남았고 1975-76 시즌까지 브라이튼의 감독으로 일했다. 

 

영혼의 단짝을 얻은 클러프는 피터 화이트 등을 데려오며 보강에 성공했고, 실제로 1976-77 시즌 앵글로 스코티시 컵에서 레이튼 오리엔트를 꺾고 첫 번째 우승컵을 든다. 

 

시즌이 마무리 되어가며 노팅엄은 아슬아슬하게 3위권에서 줄다리기를 하다가 역대 최소 승점으로 3위로 승격에 성공한다. 비록 승점은 높지 않았으나 클러프는 두 번째 풀타임 시즌에 승격에 성공했고, 노팅엄 팬들이 가지고 있던 불신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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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78 시즌 리그 우승컵을 들며, 컬러 복원 사진.) 

 

1977년. 노팅엄의 동화와 클러프의 제 2의 전성기를 알리는 해였다. 

 

개막전부터 노팅엄은 전통 강호 에버튼을 상대로 3-1 승리를 거두었고, 아스날에 3-0으로 패했으나 울버햄튼을 3-2로 누른다. 그들은 시즌 첫 16경기에서 단 3경기에만 패했고, 승격팀이었음에도, 심지어 최소 승점으로 승격한 그들을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클러프는 클럽 레코드인 £32.5k에 키퍼 피터 쉴튼을 영입했고, 한편 더비 카운티의 레전드 아치 겜밀을 단돈 £2.5k에 영입한다. 

 

결국 그들은 2위 리버풀을 승점 7점차로 따돌리며 우승에 성공한다. 

 

노팅엄 포레스트는 승격 시즌에 우승을 거둔 얼마 안되는 팀이 되었고, 2015-16 시즌의 레스터 시티와 같이 당시로서는 예상도 못할 일을 이루어 낸다. 

 

그들은 심지어 리그 42경기에서 단 24골만을 실점했다! 

 

77-78 시즌은 리그의 동화 같은 우승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리그 컵마저 리버풀을 꺾고 우승하며 더블을 만든다. 심지어 그 경기에서는 핵심 선수 쉴튼, 겜밀, 데이비드 니덤이 뛰지 않았던 경기였다. 

 

브라이런 클러프는 노팅엄 포레스트 팬들에게 있어서 예수와 같은 존재였고, 로마라도 하루아침에 재건할 수 있을 존재였다. 

 

그러나 동화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부터 이야기할 포레스트의 역사에 비하면 77-78 시즌의 과업은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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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79 시즌 빅이어와 함께, 컬러 복원 사진.) 

 

1978-79 시즌 노팅엄 포레스트는 FA 채리티 쉴드에서 입스위치 타운을 상대로 5-0 승리를 거두며 기분 좋게 시즌을 시작한다. 

 

유로피언 컵 초장부터 그들은 리버풀을 만나는데, 의외로 손쉽게 총합 스코어 2-0으로 격파한다. 

 

한편 1978년 12월 리버풀은 복수라는듯 노팅엄 포레스트의 42경기 무패 기록을 부쉈다. 이 기록은 1920-21 시즌 번리 FC의 35경기 무패 기록을 부순 기록이었는데, 참고로 노팅엄의 무패 기록은 아스날에 의해(49경기 무패) 깨진다. 

 

1979년 2월 피터 테일러는 잉글랜드 이적시장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데, 바로 "이적료의 밀리언화"였다. 그는 버밍엄 시티로부터 트레버 프랜시스를 영입하는데, 그의 이적료 £1m은 잉글랜드 역사상 처음으로 백만 파운드가 넘는 기록이었다. 

 

1979년 4월 유로피언 컵 4강에서 노팅엄은 큰 위기를 맞이한다. 

 

1차전 시티 그라운드에서 열린 쾰른과의 경기에서 종료 20분 남짓 남겨두고 3-0으로 리드를 하고 있었으나, 3-3 동점으로 경기를 마무리한 것이었다. 

 

쾰른이 원정 다득점을 가져갔기에 그들에 매우 유리해 보였으나, 노팅엄은 또다른 기적을 만든다. 그들은 쾰른 원정에서 이안 보이어의 골에 힘입어 1-0 승리를 만들었고, 마침내 유로피언 컵 결승에 진출한 것이었다. 

 

모두들 잘 알듯 노팅엄은 결승전에서 승리했다. 상대는 말뫼 FF였다. 득점자는 의외로 트레버 프랜시스였는데, 로버트슨의 크로스를 머리로 받아 넣은 그 골은 그의 유러피안 컵 데뷔골이자 우승을 결정짓는 골이었다. 

 

거기에 그들은 리그 컵 결승에서 사우스햄튼을 3-2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으며, 리그에서는 8점차로 리버풀에 밀려 아쉽게 준우승을 거둔다. 

 

1977-78 시즌의 성적이 우연이 아님을 클러프가 증명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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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80 시즌 우승 후 빅이어를 드는 노팅엄 포레스트 선수단, 컬러 복원 사진.) 

 

노팅엄은 1979 인터컨티넨탈 컵에 불참하는 반면 바르셀로나와의 2차전에 걸친 슈퍼컵에서 승리를 거두며 또 하나의 트로피를 든다. 

 

1979-80 시즌 리그에서 4위를 차지하며 역시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였고, 가장 중요한 것은 다시금 유로피언 컵 트로피를 들었다는 것이다. 

 

다시 유로피언 컵 8강으로 돌아가보자. 

 

8강에서 디나모 베를린을 만난 노팅엄은 초반부터 고전했다. 홈에서 1-0으로 패배한 것이다. 하지만 3-1로 노팅엄은 승부를 뒤집었고 아약스와 함부르크 등 당시 유럽을 호령했던 팀들을 차례로 꺾고 다시 빅이어를 든다. 

 

당시 칼츠, 야콥스, 마가트, 키건, 흐루베시와 같은 현대에서도 분데스리가 레전드로 꼽히는 선수들을 가지고 있었던 함부르크였지만, 전반 20분에 터진 로버트슨의 골 이후 노팅엄이 성공적으로 걸어잠구며 유러피언 컵 우승은 1980년대로 미루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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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리그컵 결승, 올덤 애슬래틱 vs 노팅엄 포레스트) 

 

1979-80년의 유로피언 컵 우승, 1982년 피터 테일러의 더비 카운티 감독행 이후에도 노팅엄 포레스트는 항상 준수한 성적을 보였다. 

 

1983-84 시즌 유러피언 컵 4강 진출, 1987-88 시즌 FA컵 4강 진출-리그 3위 등 노팅엄 포레스트는 이제 완전히 풋볼 리그 디비전 1을 대표하는 강팀으로 자리잡았다. 

 

1988-89 시즌은 노팅엄에 있어서 긴 무관 시기를 끊을 수 있었던 좋은 시즌이었는데, 클러프는 리그 컵 결승에서 루튼 타운을 3-1로 꺾으며 다시금 노팅엄 팬들에게 트로피를 안겨주었다. 

 

특히 이 경기에서는 브라이언 클러프의 아들 나이젤 클러프가 멀티골을 넣으며 팬들에게 더욱 뜻깊은 날을 선사했다. 

 

1989년 클러프는 풀 맴버스 컵에서 우승하며 또 하나의 트로피를 팬들에게 안겼고, 1989-90 시즌 리그 컵 2연패와 92년 풀 맴버스 컵 우승으로 노팅엄 팬들의 주머니는 트로피로 가득차게 되었다. 

 

그렇게 브라이언 클러프와 노팅엄 포레스트는 잉글랜드의 해가 되었으며, 그 해는 영원히 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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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노팅엄에서 마지막 경기를 보내며) 

 

1991-92 시즌 노팅엄은 밀월에서 클럽 레코드인 £2.1m에 테디 셰링엄을 영입했고 이후 1991-92 시즌 풀 멤버스 컵에서 다시금 우승컵을 들어올린다. 

 

하지만 1992년 리그 컵 결승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패하며 맨유에게 통산 첫 리그 컵 우승컵을 안겨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대 여느 때처럼 잉글랜드 국가대표 링크가 뜨기도 했을 정도로 그의 명성은 아직도 높았다. 

 

하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당한 패배는 다음 시즌 노팅엄의 추락을 알리는 신호였다. 클럽 레코드에 영입한 테디 셰링엄은 토트넘으로 떠났고, 워커는 삼프도리아로 떠나는 등 팀내 자원 유출은 극심했고, 노팅엄은 결국 22위로 시즌을 마치며 강등당했다. 

 

클러프는 성적에 책임을 지고 18년동안 함께한 노팅엄 포레스트를 떠나게 될 뿐만 아니라, 28년의 감독 커리어를 마무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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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클러프 동상, 노팅엄셔 주 노팅엄) 

 

브라이언 클러프는 은퇴 후 대부분의 시간을 알코올 중독과 싸우며 살았다. 그는 더비 카운티 감독을 맡고 있던 1970년대에도 이미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은퇴한 이후 사망하기 전까지 알코올로 많은 고생을 했다. 

 

사실 1995년 울버햄튼 원더러스는 그레이엄 테일러를 경질하고 브라이언 클러프를 선임하고자 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1994년 힐스버러 참사에서 희생당한 리버풀 팬들이 리버풀 팬들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당시 흔했던 언론의 선동에 넘아가 자서전읓 통해 이에 동조하여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인 2001년, 자서전을 통해 당시 그 참사에 대해 완전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1993년 노팅엄 시 명예 시민증을 받았고, 2002년에는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2003년에는 더비 시 명예 시민증을 수여받았다. 

 

알코올 중독에 맞서 싸우며 잡지 포포투에 칼럼을 투고 했으며, 2004년 더비 시 병원에서 위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더비의 홈구장 프라이드 파크 스타디움에서 열렸는데, 노팅엄 포레스트와 더비 카운티 팬들은 엄청난 라이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4,000명에 달하는 양팀 팬들이 참석했다고 한다. 

 

사족이지만 그가 생전에 죽음에 관하여 했던 말이 그의 성격을 짐작하게 한다. 

 

"내가 죽고 나서 꽃을 바치지 마라.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살아있을 때 꽃을 건내줘라." 

 

- 브라이언 클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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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피를 드는 브라이언 클러프와 피터 테일러 동상, 더비셔 주 더비 프라이드 파크 스타디움) 

 

28년 동안 감독으로 일하며 그는 그의 영혼의 단짝 피터 테일러와 함께 마치 로마도 하루만에 재건할 수 있다는 듯 수많은 기적과 동화를 써왔다. 

 

불과 몇 년전만 해도 2부리그의 지박령으로 뿌리내렸던 팀이 리그 우승 컵을 들고, 유럽 대항전에서 수많은 강호들을 뿌리치는 걸 상상해보라. 

 

UEFA가 헌정한 최고의 우상파괴자(Ultimate Iconoclast)라는 수식어가 가히 어울리지 않는가. 

 

10년 넘게 우승컵은 커녕 프리미어 리그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노팅엄 포레스트와 더비 카운티. 그들이 "제 2의 브라이언 클러프"를 찾는 것은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노팅엄과 더비에서는 오늘도 브라이언 클러프의 동상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고, 라이벌 매치에서 승리한 팀이 "브라이언 클러프 트로피"를 가져간다. 

 

그가 세상을 떠난 2004년 9월 20일에는 라이벌리와 상관 없이 이스트 미들랜즈가 큰 슬픔에 잠긴다. 

 

사람들은 흔히 "로마는 하루아침에 지어지지 않았다."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런 특별한 일을 맡지 않았다. 

 

- 브라이언 클러프 - 

 

브라이언 클러프라면, 로마라도 하루 아침에 지을 수 있지 않았을까. 

 

댓글 3

4ever 2020.01.20. 15:39
댐드 유나이티드의 주인공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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