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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역사 일본사 이야기 19 : 네 명의 딸을 네 명의 천황에게

17회차에 섭관정치(摂関政治)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서 알아본 바 있다.

 

17. 섭관정치의 시작

https://www.flayus.com/mystery/31163622

 

 

후지와라노 모토츠네(藤原基経)는 세이와 천황(清和天皇; 청화천황)을 시작으로 요제이 천황(陽成天皇; 양성천황), 코코 천황(光孝天皇; 광효천황), 우다 천황(宇多天皇) 때까지 섭관직을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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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지오라노 모토츠네

 

그러나 모토츠네 때부터 섭정과 관백이 쭉 이어진 것은 아니다.

모토츠네 사후에 우다 천황은 새로운 관백을 두지 않았고, 대신에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를 우대신으로 임명하여 정치를 쇄신하는 데에 힘썼다.(간표의 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우다 천황의 신임을 바탕으로, 그의 아들 다이고 천황(醍醐天皇; 제호천황) 때까지 우대신으로써 정치적 쇄신을 위해 힘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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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그러나 몇년 뒤 문제가 발생하고 마는데..

 

우다 천황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뿐만 아니라 후지와라노 모토츠네의 장남인 후지와라노 토키히라(藤原時平)도 신임하고 있었기에, 다이고 천황에게 토키히라를 정무를 총괄하는 좌대신에 임명하도록 하였다. - 당시 일본의 중앙 관품과 역할에 대한 내용은 본 컨텐츠 17회차 번외편 참조 -

그렇게 두 사람은 황실로 부터 여러가지 특권을 받으면서 치세를 펼쳐나갔는데, 정치도 나름 잘해서 이 시기는 후대에서도 칭송받았으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와 후지와라노 토키히라가 재정 정책과 관련하여 트러블이 생기고 만다.

미치자네는 중앙 재정을 강화하는 중앙집권적 재정을 주장한 반면에, 토키히라는 당시 후지와라씨가 장원을 바탕으로 지방에서 대농장을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 - 장원 관련 내용은 본 컨텐츠 18회차 참조 -

그리고 후지와라씨 뿐만 아니라 다른 귀족들도 미치자네의 중앙집권적 정책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결국 후지와라노 토키히라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다이고 천황을 끌어내리고 천황의 이복동생인 토키요 친왕(斉世親王)을 황위에 앉히려는 역모를 꾸몄다면서 무고로 찔러버린다.

 

Fujiwara_no_Tokihira01.jpg ◀ 후지와라노 토키히라

 

그렇게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좌천되고 후지와라노 토키히라가 정권을 완전히 차지했으나..

후지와라노 토키히라는 얼마 안가 요절해버린다.. ㄷㄷ

그래서 이후엔 그의 동생인 후지와라노 타다히라(藤原忠平)가 정권을 잡게되었고, 다이고 천황 사후 8살의 나이로 즉위한 스자쿠 천황(朱雀天皇; 주작천황)의 섭정이 되었다.

이로써 모토츠네 이후 반세기 만에 섭정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근데 타다히라는 7년 뒤에 섭정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히고 사표를 제출한다.

천황이 15살이 되어서 관례(冠禮; 유교 의례 관혼상제 중 하나, 성인식)를 했기 때문에 섭정을 이어갈 이유가 없었고, 관백도 반세기 동안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없는 직책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동쪽에서는 타이라노 마사카도(平将門)가, 서쪽에서는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純友)가 동시에 난을 일으키고 만다.. ㄷㄷ (조헤이·텐쿄의 난)

- 게다가 타이라노 마사카도는 후지와라노 타다히라의 밑에 있던 무사였다.. 자세한 내용은 본 컨텐츠 18회차 참조 -

천황은 자기가 이 난을 진압할 능력이 안돼서 무서웠는지 후지와라노 타다히라를 붙잡고 제발 섭정직에 있어 달라고 달랬고.. ㅋ

결국 타다히라는 그 청을 받아들여 난의 진압에 몰두하였다.

 

성공리에 난이 진압되고 타다히라는 관백으로 임명되면서, 관백직도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Fujiwara_no_Tadahira.jpg

▲ 후지와라노 타다히라

 

타다히라는 이후 무라카미 천황(村上天皇; 촌상천황) 때까지 섭관직에 있다가 사망한다.

 

무라카미 천황은 타다히라 사후 다른 섭관을 두지 않았고 천황이 친정을 하였지만, 무라카미 천황 사후 레이제이 천황(冷泉天皇; 냉천천황)이 즉위하면서 후지와라노 타다히라의 아들인 후지와라노 사네요리(藤原実頼)가 다시 관백이 되었다.

 

레이제이 천황은 정신병이 있었고, 그 때문에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가 없었다.. - 그래서 관백인 사네요리의 임무가 막중했다.. -

몇가지 사례를 보자면, 다리 다친 채로 축구를 하던가...

아버지(무라카미 천황)가 보냈던 편지에 곧휴.. 그림...을 답장으로 보내거나.. ㄷㄷ

갑자기 지붕 위에 올라가서 앉아 있거나...

궁중 의례가 진행되는 도중에 관이 무겁다고 벗어 던지고 궁녀를 강제로 끌고 와서 그자리에서 떡을... ㅗㅜㅑ...

걍 ㄹㅇ 미친넘이었다...

 

img_3_m.jpg

▲ 레이제이 천황 - 생긴건 잘생겼는데.. 쩝.. -

 

그렇기에 레이제이 천황은 황태자도 제대로 확정짓지 못했는데..

그래도 조정 내에서 레이제이 천황의 동생인 타메히라 친왕(爲平親王)이 황태자로 확실시 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후지와라씨는 천황의 또 다른 동생인 모리히라 친왕(守平親王)을 황태자로 밀고 있었다.

타메히라 친왕의 부인이 좌대신 미나모토노 타카아키(源高明)의 딸이었기 때문에 타메히라가 왕이 된다면 미나모토씨의 권력이 커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타메히라 파와 모리히라 파의 알력 다툼이 시작된다.

 

모리히라 파인 미나모토노 미츠나카와(源満仲) 후지와라노 요시토키(藤原善時)가 먼저 선빵을 쳤는데..

이들은 타메히라 파에서 모리히라를 제거하고 타메히라를 황태자로 올리려고 한다고 우대신에게 밀고 하였고, 우대신은 곧바로 이를 관백 사네요리에게 전했다.

 

후지와라노 사네요리는 이를 듣고 곧바로 이에 언급된 타치바나노 시게노부(橘繁延) 등을 체포하여 조사하였고, 결국 시게노부가 그 계획이 진짜라고 자백해버린다.

그리고 조사 과정에서 좌대신 미나모토노 타카아키도 이에 연루되어 있다고 간주해버리고, 그를 포함한 타메히라 파를 죄다 좌천시켜 버린다.

 

이를 안화의 변(安和の変)이라고 하는데,

안화의 변 이후 레이제이 천황은 바로 모리히라 친왕에게 왕위를 넘겨주었고 이후 후지와라씨의 권력 독점이 강화되었다.

그런데 이때 모리히라 친왕은 9살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또 사네요리가 섭정을 하게 되었고, 사네요리 사후에도 후지와라 북가에서 섭정과 관백직을 독점적으로 이어나가면서 섭관가(摂関家)를 형성하게 된다.

 

즉 이 섭관가는 후지와라 북가, 그중에서도 후지와라노 타다히라의 자손들을 의미하는 것.

이로써 섭관정치가 헤이안 시대의 중요한 통치 체제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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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지와라 북가의 문장

 

이때부터 천황의 유년기에는 섭관가에서 섭정을 두고, 관례 후에 성인이 되면 관백을 두는 것이 관례로 정착하게 되었고,

또한 섭정과 관백이 되려면 천황의 외척이 되어야 한다는 취임 조건도 생기게 되었다.

이는 고대 일본이 모계 사회였기 때문에 형성된 것으로, 즉 천황의 외조부나 외숙부가 되어 그 관계로써 천황을 보조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 여기서 '장인'이 아니라 '외조부'나 '외숙부'임에 주의하자. 자신의 사위(혹은 매부)가 되는 천황 때 바로 섭관이 되는게 아니라 사위(혹은 매부)인 천황과 딸(혹은 여동생) 사이에서 난 황자가 천황이 되었을 때 섭관이 되는 것. 만약 결혼 시켰는데 황자가 안 나오면... 섭관은 못하는 것...  운도 있어야 했음. -

 

이렇다보니 섭관가 내에서도 섭관직을 두고 집안 내 권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서로 권력을 차지하려고 싸워대고, 어떻게 해서든 딸을 천황에게 시집보내려고 했으며, 이를 위해 딸에게 뛰어난 선생들을 불러다가 교양 과외를 시키는 등 갖은 노력을 했다.

 

  • 섭관가의 가장 대표적인 싸움
  •  
  • 1. 카네미치(兼通) vs 카네이에(兼家) : 카네이에 승 - 형제간 싸움 -
  • 2. 미치나가(道長) vs 코레치카(伊周) : 미치나가 승 - 숙질간 싸움 -

 

미치나가와 코레치카의 싸움에서 미치나가가 승리하면서 섭관가의 내분은 최종적으로 미치나가의 승리로 마무리 된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는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초반까지 실질적인 일본의 지배자라고 할 수 있다.

 

450px-Fujiwara_Michinaga.jpg

▲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그는 네 명의 황후의 아버지이자 동시에 두 명의 천황의 외삼촌이자 세 명의 천황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인물이다. - 졸라 복잡.. -

그냥 딸 낳는 족족 황실에 갖다 바친 것이다...

일본 역사상 외척으로서 이러한 권력을 누린 사람은 이 양반 외에는 없다...

 

미치나가는 운도 좋았던게, 앞서 섭관가의 싸움에서 언급했던 후지와라노 카네이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원래는 형들한테 밀려서 섭관직은 쳐다보지도 못하는 짬이었다.

그런데 형들이 갑자기 차례로 전염병으로 나가 떨어져버렸고, 형들이 시집 보낸 천황에겐 황자가 없었다.

 

미치나가는 이를 틈타 권력을 계속 키워가면서 각을 재다가 힘으로 첫째 딸 쇼시(彰子)를 이치조 천황( 一条天皇; 일조천황)에게 시집 보내어 황후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치조 천황에게는 황후가 이미 있었는데, 새롭게 쇼시를 황후로 들이면서 황후가 두명이 되어버렸다.

이때부터 황후가 두명인 경우가 자주 생겼고, 이를 구분하기 위해 둘 중 더 세력이 큰 황후를 '중궁'이라고 칭하게 된다.

 

쇼시와 이치조 천황 사이에서는 아츠히라 친왕(敦成親王)과 아츠나가 친왕(敦良親王)이 태어나면서 황자를 둘이나 얻게 됐다!

그런데 이치조 천황의 황태자는 레이제이 천황의 아들이었던 오키사다 친왕(居貞親王)으로 이미 정해져 있었기에 그가 산조 천황(三条天皇; 삼조천황)으로 즉위한다.

그래서 미치나가가 바로 섭관이 될 수는 없었다.

 

미치나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산조 천황에게도 둘째 딸 겐시(妍子)를 시집보내어 중궁으로 만든다.

그러나 겐시와 산조 사이에는 딸만 태어나서 여기선 농사를 망쳤다..

 

산조 천황은 이후 외가의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미치나가와 대립하게 되고, 미치나가는 산조에게 황위에서 꺼지라고 압박하게 된다.

산조 천황은 결국 겐시가 중궁이 되기 이전 기존 황후에게서 나온 아츠아키라 친왕(敦明親王)을 이후 황태자로 세워준다는 조건에 합의보고, 아츠히라 친왕에게 양위하여 아츠히라가 8살에 고이치조 천황(後一条天皇; 후일조천황)으로 즉위한다.

드디어 미치나가의 아이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미치나가는 섭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정신나간 양반은... 그의 셋째 딸 이시(威子)를 다시 고이치조 천황에게 시집보낸다..

즉... 이모를......

 

그리고 산조 천황과의 약속대로 아츠아키라를 황태자로 세워주긴 했는데..

다시 얼마 안가 꺼지라고 압박을 해서 아츠아키라는 스스로 황태자 자리에서 물러나고, 새로운 황태자로 천황의 동생인 아츠나가 친왕이 선정된다.

 

근데 미치나가는 또 이 황태자한테도 자기 넷째 딸 기시(嬉子)를... 시집... 보내는데....

황태자는 천황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여기도... 이모...

 

이렇게 천황가에 미친듯이 시집 보내고... 근친을 오지게 해서...

약 30년 간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이 미친넘은 권력에 취해서 셋째 딸 이시의 황후 책봉 축하연에서 시까지 읊는다.

 

"この世をばわが世とぞ思ふ, 望月の欠けたることもなしと思へば"

"이 세상을 내 것이라고 여기면, 보름달처럼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미치나가에게 이 시를 전해받은 후지와라노 사네스케(藤原実資)는 또 정중하게 답가를 거절하고, 대신 모두 함께 이 '명곡'을 읊자고 제안했다고...

 

그런데 결국 딸들이 차례로 병들어 뒤지고...

자기도 병에 걸려서 섭관직을 아들 후지와라노 요리미치(藤原頼通)에게 물려주고 출가했다가..

결국.. 죽어버린다.

 

이후 섭관정치는 점점 약화되다가 시라카와 천황(白河天皇; 백하천황)이 8살 짜리 타루히토 친왕(善仁親王)에게 양위할 때, 자신이 상황으로써 섭정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면서(원정 정치) 섭관 정치는 막을 내리게 된다. - 그렇다고 섭정과 관백이라는 직책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섭정과 관백은 그대로 있고 섭관가가 이어갔는데, 권력을 잃은 것. -

 

 

 

이전 회차 모아 보기

http://www.flayus.com/mystery

 

17. 섭관정치의 시작

https://www.flayus.com/31163622

 

18. 무사의 등장과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난

https://www.flayus.com/31572479

 

댓글 2

A.C.Milan 2018.11.04. 23:04
저때부터 근친으로 지금까지 존못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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