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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역사 고구려 멸망에 큰 공을 세운 신라 장수 구율

image.png 고구려 멸망에 큰 공을 세운 신라 장수 구율
 

이번 글에서는 고구려의 멸망과 관련하여

 

image.png 고구려 멸망에 큰 공을 세운 신라 장수 구율
 

큰 공을 세운 신라 장수 구율에 대해 소개해 보려고 해

 

image.png 고구려 멸망에 큰 공을 세운 신라 장수 구율

'고구려 멸망전'에서 신라는 무려 20만 대군을 동원하였다고 하는데...

 

그 병력의 숫자가 과장 되었을 가능성은 물론 유념해야 할 것이지만...

 

신라가 그 원정에 국력을 총동원한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징병을 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할 수 있을 것이야...

 

* 한편으로 신라가 막타를 노린 부분도 있는데, 제3차 려당전쟁과 관련하여 신라는 초기 1년 간은 참전을 하지 않았어...

image.png 고구려 멸망에 큰 공을 세운 신라 장수 구율

어쨌거나 주사위는 던져졌고

 

신라는 연정토가 고구려 남부의 12성 763호의 주민 3543명을 들어 바치는 등 

 

평양 근교까지 쉽게 진군할 수 있었지만...

 

image.png 고구려 멸망에 큰 공을 세운 신라 장수 구율

마참내 사천에서 고구려군의 저항을 받게 되는데...

 

사천은 오늘날의 합장강으로 비정되는 곳으로

 

image.png 고구려 멸망에 큰 공을 세운 신라 장수 구율

제 2차 려당전쟁에서 연개소문이 친히 출정하여 당나라 군대를 궤멸시켰던 

 

그곳과 동일한 곳이었어

 

image.png 고구려 멸망에 큰 공을 세운 신라 장수 구율

하지만 신라군은 마침내 그곳에서 고구려군을 무너뜨렸고

 

이는 고구려에게 거의 사형선고와 같은 결과가 되었는데...

 

image.png 고구려 멸망에 큰 공을 세운 신라 장수 구율

<삼국사기>는 그 승리의 일등 공신으로 

 

사찬 구율을 꼽아...

 

구율은 아술현(충청남도 아산) 출신으로

 

다리 아래로 나아가 

 

물을 건너 나가 적과 싸워 크게 이겼다고 해

 

짧은 서술로만 봐도 정말로 대담한 작전(아마도 고구려군이 장악하고 있던 중요한 요충지였던 다리를 헤엄쳐서 가서 점령해버린...)을 성공시켰다 할 수 있는데...

 

image.png 고구려 멸망에 큰 공을 세운 신라 장수 구율

그렇다면 이 희대의 전쟁 영웅 구율은 어떤 포상을 받았을까?

 

 

 

 

 

 

 

 

 

 

 

 

 

 

 

 

 

 

 

 

 

 

 

 

 

 

 

 

 

 

 

 

 

 

 

 

 

 

 

 

 

 

image.png 고구려 멸망에 큰 공을 세운 신라 장수 구율

아무런 포상을 받지 못하였어...

 

image.png 고구려 멸망에 큰 공을 세운 신라 장수 구율

ㅅㅂ...

 

image.png 고구려 멸망에 큰 공을 세운 신라 장수 구율

응 군령이 없었어~

 

* 구율 입장에서는 참으로 억울했겠지만...

 

* 신라 조정에서는 그 공이 단연 으뜸이었다고 인정하면서도... 군령 없이 스스로 위험한 길로 들어간 점 때문에 포상할 수 없다 하였지...

 

image.png 고구려 멸망에 큰 공을 세운 신라 장수 구율

응 자살하면 그만이야~

 

* 이련 경우 속이 쓰려도 "저는 본래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고 싶었을 뿐, 다른 뜻은 없었다." 식으로 당사자가 받아들였다고(내막이야 어떻든...) 하는 경우가 역사책에서 종종 나오지만...

 

* <삼국사기>에 기록된 구율의 반응은 억울한 나머지 자살을 시도할 정도였다고...

 

* 그나마 곁에 있던 사람이 구하여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고 해

 

* 한산주 소감 김상경 같은 이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전사한 인물이 사후에라도 문무왕에게 크게 후대를 받았을 망정... 끝내 구율은 이후에 따로 포상받았다는 기록이 없어...

 

* 자살 시도 자체가 왕명에 대한 반항으로 찍혔을 수도 있겠고... 어쩌면 이후 바로 평화의 시대가 되었다고 한다면... 구율에게 시간을 두고 따로 포상을 해줄 수도 있었겠지만... '당나라와의 전쟁' 등 계속 전란을 치러야 하는 신라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군대에 확고한 명령체계와 조직력이 중요하였기에 아무리 공이 컸어도 유사한 사례의 방지를 위해서라도 구율을 포상하기 어려운 점도 있었다고 봐...


* <삼국사기>는 신라의 고구려 정복 유공자들에 대한 포상을 상당히 자세히 전하는데... 한편으로 이는 중국 사서에서 쉽게 얻은 것처럼 묘사되는 평양성의 함락과 관련하여 고구려인들이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항전했다는 근거 자료가 되기도 해(신라군은 평양성 곳곳에서 전투를 치러야 했는데... 신라에 비해 더 핵심적인 전력이었던 당군은 더 많은 저항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지)

 

* 물론 문무왕이 설인귀에게 보낸 편지에 신라군 기병이 먼저 평양성으로 들어갔음을 강조하는 부분 또한 있는데.... 그것을 보면 당나라에서 위험한 임무를 신라 쪽에 떠넘긴 부분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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