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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연합국은 왜 베를린을 따지 않았을까?

 

1945년 3월 중순, 서방 연합군은 라인 강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당시 그들 중 베를린에 가장 가까웠던 건 최북단의 몽고메리였다. 그는 베를린에서 약 400km 떨어져 있었다. 베를린은 너무 멀게만 보였다. 같은 시기 소련군은 독일의 수도에서 고작 54km 떨어진 오데르-나이세 선에서, 마지막 공세를 위한 병력과 장비를 집결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변했다. 4월 4~11일, 영연방군이 북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동안 미군은 동쪽으로 쾌진격을 이어갔다. B집단군이 통째로 루르에 포위당한 독일 서방군은 연합군을 상대로 더 이상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전투보다는 지형과 교통체증이 더 큰 방해가 될 정도였다. 미군은 하루 50km씩 쭉쭉 수월하게 나아갔다. 

 

지형조건이 양호했던 9군의 진격이 가장 빨랐고, 그들은 4월 11일 엘베 강에 도달한다. 러시아인들의 공세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이제 미군도 베를린까지 단 80km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9군을 지휘하던 윌리엄 H. 심슨은 여기서 더 나아가 소련군보다 먼저 베를린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9군에게는 아직 그럴만한 여력이 남아 있었다. 그는 그렇게 판단했고, 아이젠하워에게 허가를 구했다.

image.png 연합국은 왜 베를린을 따지 않았을까?

하지만 4월 14일, 아이젠하워는 더 이상 진군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는 뤼베크에서 다뉴브 계곡까지 연합군의 측면을 정리하기로 결정한다. 다음날 12 집단군 사령관 브래들리가 심슨에게 직접 이 소식을 전했다. 심슨은 하루 만에 모든 걸 끝낼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미 명령이 내려진 뒤였다. 

 

그렇게 베를린은 사실상 소련군의 차지가 되었다. 영국은 물론 패튼까지 여러 사람들이 거세게 반발했고, 심지어 후대에도 두고두고 논란을 불러온 결정이었다. 심지어 베를린에 대한 공수작전 (탈리스만 작전)을 실행해야 했다는 주장까지 존재한다.

 

하지만 사실 베를린은 처음부터 서방 연합군의 즉각적인 전략 목표물이 아니었다. 오버로드 작전이나 노르망디 돌파 계획 당시 베를린은 심지어 언급조차 되지 않았으며, 서방 연합군 사이에서 베를린 점령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건 그들이 라인 강 인근에 도달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아이젠하워의 정지 결정에는 더 많은 군사적,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측면의 위협, 알프스의 독일군 ‘국가 요새’에 대한 우려, 얻는 전리품에 비해 잃는 게 더 많다는 계산, 소련과의 관계는 물론 유럽 이후로도 좀 더 계속될 일본과의 전쟁까지. 하지만 이러한 이유와 변수들에 대해선 나중에 다른 글에서 좀 더 자세히 다뤄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선 아이젠하워가 베를린이라는 눈앞의 영광에 그리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정도로 넘어가면 될 것이다. 그는 남아있는 독일군 병력을 마저 소탕함으로써 유럽전역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 태평양을 대비하고자 했다. 

image.png 연합국은 왜 베를린을 따지 않았을까?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만약 영국과 패튼이 이겼다면? 심슨이 명령을 무시했다면? 연합군이 엘베에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그 너머를 향해 진군했다면, 과연 그들은 베를린의 정복자가 될 수 있었을까?

 

아이젠하워는 14일 마셜에게 자신의 결정에 대해 설명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가 엘베 강에 작은 교두보를 마련한 건 사실이지만, 아직 그들은 선봉대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력은 여전히 한참 먼 곳에 있습니다.”

 

심슨의 선봉대가 베를린에서 채 80km도 떨어지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의 교두보는 베를린에서 54km로, 여전히 연합군보다 더 가까웠다. 소련군은 두 달 동안 휴식하며 병력을 정비하고 있었으나, 아이젠하워의 병사들은 2주간 400km라는 거리를 주파해온 상태였다. 확실히 미군의 주력은 아직 엘베 강에 닿지 못했다.

 

어떤 군대도 그 정도 규모의 공세를 엘베 강까지 넘어가며 까지 지속할 수는 없었다. 현대군은 더 이상 시골에서 자립할 수 없다. 수송수단의 에너지원을 주변에서 쉽게 수집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갔다. 2차 대전의 군대는 연료, 가솔린에 모든 것을 의존하고 있었다. 전쟁사에 있어 전에 없던 현상이었다. 

 

이 시대엔 보통 320~400km를 전진하면 공세종말점이 찾아왔다. 1941년 소련에 진입한 독일군이 그랬고, 1944년 소련군의 공세도 마찬가지였으며, 1944년 9월 연합군의 공세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1945년 4월, 아이젠하워의 군대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됐다. 이제 전투기부대의 항속거리가 지상부대의 진군속도를 제대로 따라잡지 못해, 보조연료탱크를 다시 달아야 할 지경이었다. 그만큼 실을 수 있는 폭탄은 줄어들었다.

image.png 연합국은 왜 베를린을 따지 않았을까?

4월 11일 당시 엘베 강 인근의 상황을 보면, 미군에겐 교두보가 1개 있었고 그들과 베를린 사이를 여러 강과 늪, 그리고 독일 1개 군이 가로막고 있었다. 인근의 미군 병력은 50,000명 규모였고 약간의 포병전력이 있었다. 그들을 지원해줄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들이 정말 엘베를 넘어 진격할 경우 당시 연합군의 거의 모든 항공 수송력이 투입되어야 제대로 된 보급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반면 소련군은 연합군에 비해 베를린까지 25km 더 가까웠고, 2개의 교두보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1,250,000명에 달하는 병력과 22,000문의 포병전력이 이미 집결해 있었다. 그들은 독일 2개 군을 마주하고 있었고 그들과 베를린 사이로는 평평하고 잘 마른 단단한 땅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우연하게도, 미국에서 가장 관찰력이 뛰어나고 전문적인 군역사가 S.L.A. 마셜 장군이 심슨의 선봉대로써 엘베 강에 도달해 있었다. 그는 4월 15일, 29군단 사령관 레이몬드 매클레인과 함께 현재 상황을 분석했다. 

 

9군의 선봉대였던 29군단은 이제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었고, 최전선은 후방에서 약 240km 떨어져 있었으며, 독일군이 정면과 양 측면에서 공격을 가해오고 있었다. 매클레인은 모든 상황을 종합해볼 때, 베를린 교외로 몇몇 정찰대를 내보내는 정도가 최대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베를린을 점령한지 오래인 소련군과 만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마셜 또한 여기에 동의했다.

 

몽고메리라면 가능했다는 주장 또한 존재한다. 만약 4월 중 더 일찍 적절한 지원이 주어졌다면 그가 베를린을 점령할 수 있었다는 의견이다. 그러나 4월 중순쯤 되면 연합군의 보급상황은 너무 악화되어 있었다. 

브래들리의 부대는 400km에 달하는 전선 여기저기 퍼져 있어서 제때 제대로 병력을 집결시킬 수 없었다. 하르츠 산맥 북쪽, 베를린으로 직행하는 도로 인근에 배치된 미군 병력은 단 8개 사단 뿐이었다. 결국 서방 연합군은 베를린으로 진격하기엔 전력도, 보급능력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결국 어떤 선택을 하든, 베를린을 정복하는 건 소련군이었다. 

image.png 연합국은 왜 베를린을 따지 않았을까?
 

다른 변수 또한 존재한다. 만약 연합군이 베를린을 향해 움직였다면, 소련군 또한 당연히 대응했을 것이다. 소련군 공세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실제 역사 그대로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너무 순진한 시각이다.

 

심슨이 엘베 강을 처음 넘은 건 4월 12일의 일이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베를린 공세는 4월 16일 시작되었다. 그들이 도시에 도달한 건 4월 22일의 일이었고 5월 2일 점령이 완료되었다. 일부 주장에 의하면, 9군에겐 80km를 전진해 베를린을 먼저 손에 넣을 3일의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모순이 있다. 그들은 스탈린이 연합군과의 정치적 전쟁을 치르고 있고, 베를린 점령에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가정하면서도, 동시에 연합군이 베를린을 향해 움직이는 동안 소련군이 아무것도 안하고 수수방관만 하고 있었으리라 가정한다. 

 

물론 소련은 베를린을 원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베를린은 신성한 권리였다. 비록 문서 증거까지는 존재하지 않으나, 만약 연합군이 베를린으로 향할 경우 소련군이 그들에게 경고 포격을 가했을 것이라는 포로 증언 기록이 존재한다.

 

따라서 만약 심슨의 병력이 움직였다면, 그 즉시 스탈린의 병력 또한 움직였을 것이다. 그리고 심슨이 최대 50,000명의 기진맥진한 병력을 동원해 나아가는 동안, 스탈린은 충분히 휴식을 취한 1,250,000명을 전선으로 일제히 밀어 넣었을 것이다. 두 달간 모아둔 풍부한 보급품과 함께.

 

그러나 결국 연합군은 엘베 강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러시아군은 마지막 공세를 개시했다. 브래들리는 연합군이 베를린 공세에 나설 경우 100,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라 두려워했다. 그리고 베를린 전투에서 발생한 소련군 사상자는 361,367명에 달한다. 

 

2달 후, 그들은 그토록 많은 피를 흘려가며 쟁취해낸 도시의 서쪽 절반을 연합군 병력에게 양도했다. 결과적으로 미국과 영국은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은 채 베를린에 입성할 수 있었다.

 

출처:연합군의 잃어버린 승리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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