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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프리뷰/리뷰 벼랑 끝의 메리 크리스마스: 37라운드 슈퍼매치 후기[발롱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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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류이치의 곡 <Merry Christmas Mr. Lawrence>를 좋아한다.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에 실렸던 원곡도, 그 이후 여러 차례 발매된 연주곡도 좋아한다. 악기로 눈 내리는 겨울날의 아름다움을 전해주며 차가운 공기 속에서 약간의 따스한 마음을 심어주는 곡이라서 좋아한다.

 

사실 성산동에 있지만 상암으로 불리는 서울월드컵경기장으로 향하기 전에 들렀던 스타벅스에서 흐르던 그 곡을 듣는 동안, 숨길 수 없이 터져나오는 긴장감 속에서도 잠시 약간의 평정심을 찾을 수 있었다.

 

몇 시간 뒤 검게 어둑해진 상암 하늘에 청백적의 꽃가루가 흩날리는 동안, 나는 잠시 경기장에서 눈을 떨어뜨렸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곳에서 함께 약 90분의 드라마를 위해 외치고 노래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리고 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사람들을 위하여 최후까지 한 몸 불사르며 뛰는 사람들이 있기에.

 

1. 총평

 

마냥 믿고 있을 수는 없지만 이런 경기에서 꽤 높은 빈도로 유효한 말이 있다. 전력과 전술의 격차를 의지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것.

 

전력은 서울의 우위였다. 기성용은 변함없이 위협적인 지휘자였다. 왜 서울 팬들이 기성용을 잃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는지, 왜 울산의 홍명보가 기성용을 원한다는 소문이 도는지, 그 모든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모습이었다. 나상호와 윌리안이라는 서울의 양쪽 날개는 수원을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반면 수원은 2주 전 수원더비에서 다이렉트 퇴장 때문에 카즈키를 잃은 상태였다. 여름에 합류하고도 공격 관련 지표에서 팀 상위에 오를 정도로 카즈키는 중요했기에 카즈키 없는 수원의 전력이 서울보다 우세하다는 생각은 K리그 좀 본다는 사람이라면 거의 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전방의 화력도 '소년가장' 김주찬에 많은 부분 기대야 하는, 야심차게 영입한 브라질리언 듀오에 대한 한숨이 자주 나오는, 그런 수원의 전력이 서울보다 우세하다는 생각은 K리그 좀 본다는 사람이라면 거의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감독대행의 전술 격차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몇 경기 지나는 동안, 염기훈은 자신이 지도자로서 학습과 반응에서 잠재력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실전은 PC/모바일 게임과 달라서 매번 다른 전술을 들고 나오기는 어렵다. 수원은 큰 틀을 바꾸지 않고 역습 중심의 4-4-2를 선택했다. 한편 김진규가 이끄는 서울은 3백을 쓰며 변수를 만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오랜 슈퍼매치 경험을 갖고 있는 고요한을 비롯하여 여러 베테랑이 중용된 것이 특징이었다. 순수하게 전술적 이유보다는 선수 개인의 경험과 의지를 중시한 용병술이었을 것이다.

 

슈퍼매치의 특성상 의지는 양쪽 다 높았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한 경기로 더 이상의 희망 없이 2부행이 확정될지도 모르는 벼랑에 몰린 수원의 의지는 흠잡을 수 없었다. 그것이 전술에 아무런 영향이 없을 수는 없다. 이런 경기는 누가 더 집중하는지에 승패가 갈리기 일쑤인데, 그 집중력은 의지에서 나올 때가 많기 떄문이다.

 

2. 동장군의 잔디밭

 

내가 본 이날 경기의 최대 변수는 오스마르 퇴장도, 뒤에 쓸 죽빵 사건도 아니었다. 잼버리 콘서트로 한 차례 크게 훼손된 잔디, 한강의 찬 바람을 맞아 살얼음이 얼기에 딱 좋은 날씨, 그것이 만난 상암 잔디는 그곳을 홈으로 쓰는 서울 선수조차 흔들리게 했다. 잔디가 미끄럽다는 것은 방송 중계진에 의해서도 지적된 사항이다. 양쪽 모두 평소 같으면 저지르지 않을 볼 터치와 바디 밸런스에서의 실수가 많았다.

 

이것은 경기에 굉장한 영향을 미쳤다. 겨울 상암 잔디는 윙의 빠른 돌파에 의한 공격을 제한했다. 이날 경기에서 양쪽 윙의 움직임은 무뎠고, 주로 중앙에 집중한 공격으로 승부를 보려는 성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수원의 양쪽 측면 수비를 맡은 김태환, 손호준, 박대원이 모두 제 역할을 잘한 것에 더하여 서울의 주포라 할 수 있는 나상호, 윌리안이 서울 팬들은 기대했고 수원 팬들은 우려했을 그런 모습을 많이 보여주지 못했다. 측면에서 그나마 나상호가 몇 차례 기회를 만든 것 이외에 서울 측면의 파괴력은 경기 내내 그리 높지 않았다. 게다가 중앙에서 집중력이 강화된 수원 수비진을 상대로 측면을 확실히 장악하거나 뒤흔들지 않는 공격으로는 한계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꼭 동장군 때문만은 아닐 것으로 생각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경기가 빠른 속도감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흔히 말하는 '치달'을 하지 않는 선수도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승부는 바로 그런 선수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3. 브라질리언 듀오

 

올해 슈퍼매치에서 서울 골키퍼의 집중력은 다른 경기보다 향상되는 경향이 있다. 이날도 그랬다. 29라운드의 '최철원 쇼'에 이어 37라운드에서 '백종범 쇼'가 펼쳐졌다. 수원의 날카로운 공격이 여러 차례 있었는데도 서울의 골문은 쉽게 열릴 것 같지 않았다.

 

승부를 결정한 것은 바사니의 골이었다. 그동안 숱한 비난과 욕설을 면할 수 없었던 바사니의 드리블이 진행되는 순간, 유효슈팅 정도 나오면 다행이겠구나 생각하던 차에 골문이 열렸다. ('축신'을 알아보지 못한 나를 혼내주고 싶은 순간이었다.)

 

복기해보니 서울 수비진이 바사니의 슈팅 각도를 열어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아마 뮬리치 등 주변 선수에게 패스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그래서 바사니의 드리블은 방치되었고 슈팅 각도는 개방되었다.

 

사실 이날 바사니는 전반전부터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과감하게 슈팅을 시도하는 것도 좋은 모습이었다. 골로 결정되지 않았을 뿐, 적어도 시도는 합리적이라고 평할 만한 슈팅이 많이 있었다. 수비 가담도 좋아진 것이 보였다.

 

그런데 바사니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아마 웨릭 포포 아니었을까. 골은 넣지 못했고, 슈팅은 답답했지만, 나머지에서 포포는 전보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그의 볼 키핑과 드리블은 서울 수비 한두 명을 계속 묶어두었다. 1인분을 확실히 한 셈이다. 이제 득점만 하면 되는데...?

 

4. 딸깍을 위하여

 

점유율 35:65, 슈팅 14:10, 유효슈팅 5:3. 수원이 서울을 상대로 기록한 지표는 이러하다. 이런 지표, 어디서 많이 본 듯하지 않은가? 그렇다. 대구식 '딸깍축구'가 보여주는 특징이다. [참고: 딸깍 딸깍 딸깍: 대구의 딸깍축구를 araboza] 30%대의 낮은 점유율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많은 슈팅과 유효슈팅을 해내는 것, 그것으로 승리 혹은 승점을 챙기는 것이 대구식 딸깍축구의 특징이다.

 

딸깍축구가 성공하려면 1) 높은 수비 집중력 2) 자주 오지 않는 볼 소유 상황에서 슈팅까지 연결하는 능력이 갖추어져야 한다. 말은 쉽다. 딸깍축구를 제대로 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나는 수원이 과연 이것을 잘할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달리 말하면 '쎄오타임' 극복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놀랍게도 염기훈 체제하의 수원은 이것을 어떻게든 해내고 있다. 단기간에 잘할 수 있고 잘해야 하는 것을 다진 점에서 일단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주로 언급되는 것은 과감한 공격인데,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수비 집중력이다. 최근 수원의 4백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 한계치에 가깝거나 그 이상의 무엇을 해내고 있는 중이다. 돌아와서 최고의 조율 능력과 헌신적 수비를 보여주고 있는 김주원, 든든한 중앙 수비 한호강, 좌우 가리지 않고 최고의 대인수비를 보여주고 있는 김태환, 우려했던 풀백 위치에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고 있는 박대원, 얼타지 않으며 우측면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는 손호준. 뎁스가 걱정스러운 와중에도 그들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정말 다행인 일이다.

 

그러나 수비진만 수비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날 경기장 어디에나 이종성과 고승범이 있었다. 나는 카드 트러블이 일어나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이번 슈퍼매치를 잡아야 한다는 의견을 팀 팬 커뮤니티에 올린 바 있다. 게다가 슈퍼매치의 이종성이라면 카드를 피하기 어렵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이종성과 고승범은 교체 없는 2미들로 분투한 끝에 중원과 수비진을 지켜내며 귀중한 승점 3점을 지켜냈다. 그런데 이날 경기에서 그들에게 가장 힘겨운 분투의 순간은 (카드 트러블과 남은 경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5. 죽빵 사건

 

현재까지 방송 화면으로 확인된 문제의 사건 순서를 정리하면 이러하다.

 

1) 전진우가 파울로 기성용의 볼 전개를 저지

2) 프리킥이 선언된 상황에서 기성용이 전진우를 밀쳐 바닥에 쓰러뜨림

3) 박병진 주심은 기성용에게 경고 판정

4) 양팀 선수들이 기성용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 (그 와중에 전진우는 잊혔다)

5) 팔로세비치가 이상민의 목을 가격

6) 본격 벤치클리어링 시작

7) 서울 피지컬 코치가 고승범의 얼굴에 '죽빵' (인터뷰 기사에 등장한 고승범의 표현이다)

8) 고요한/한승규로 설이 엇갈리는데 서울 선수가 고승범의 머리를 잡아당기는 장면 등장

9) 간신히 사태 정리 후 박병진 주심이 VAR과 소통한 끝에 서울 피지컬 코치 퇴장 판정 (웃으며 퇴장한 건 무슨 생각일까)

 

발생할 필요도 없고 발생해서도 안 되는 사건이었다. 어느 팀에서 저지른 일이어도 마찬가지로 진술할 것이다. 어느 더비에서 벌어진 일이어도 마찬가지로 진술할 것이다.

 

나의 의견 딱 두 가지를 첨언하자면 이러하다.

 

1) 기성용의 행위가 매우 언짢았지만 그 정도 일은 경기에서 흔히 벌어지고 경고 판정으로 일단 넘어갈 만했다.

2) 선수 간 폭행도 물론 문제지만 코치가 상대팀 선수를 폭행한다면 당연히 더 심각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6. 상암 초행자가 본 경기장

 

상암을 처음 가보았다. 느꼈던 좋은 점과 개선이 필요한 점을 적어보려 한다.

 

좋은 점

 

1) 지하철역과의 접근성 (에스컬레이터가 운행 중지여서 조금 힘들기는 했다)

2) 규모에서 오는 편안함

3) 먹지 않았지만 아주 유혹적이던 게이트 내 매점 음식 (편의점 인프라의 힘인가)

4) 겨울 축구를 위한 일회용 담요, 핫팩, 보조배터리를 판매하는 게이트 내 매점

5) 홈플러스, 푸드트럭 등 경기 전후로 누릴 만한 여러 식도락

6) 경기장 내부의 전시시설, 경기장 외부의 공원 등 누릴 만한 여러 엔터테인먼트

 

개선이 필요한 점

 

1) 좌석 연번을 초행자가 이해하기 어려움 (한 세트로 묶여있는 곳에서 40번 다음 1번이 이어지니 헷갈리는 분들 여럿 봤다)

2) S석 화장실 대변칸 부족, 여자화장실도 1실당 2개인 것은 정말 심각하게 개선 필요 (N, W, E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7. 내년을 기약하며 메리 크리스마스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내년에 또 보자"고 작별을 고하며 상암을 떠났다. S석의 프렌테 트리콜로 약 8천 명은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나의 성대와 인후는 주중에 과연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운 상태가 되었다.

 

부쩍 차가워진 초겨울 바람이 휘감은 상암의 공기는 뜨거웠다. 벼랑 끝에 몰린 S석의 상공을 수놓던 청백적 눈꽃을 기억하며 또 다른 경기로 어디라도 꿈속이라도 따라갈 준비가 된 사람들은 잠깐의 재정비를 거쳐 또 길을 나설 것이다.

 

서로를 자극하는 뜨거운 인사를 나눌 그 다음 기회를 기다리며, 양쪽 서포터석에서 각자 만든 눈꽃을 떠올리며, 메리 크리스마스.

댓글 2

고독한아길이 작성자 2023.11.28. 23:25
 보영만두
38라운드 프리뷰를 쓰면서도 여전히 뭐라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음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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