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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프리뷰/리뷰 관을 박차면 모두 나를 봄: 36라운드 수원더비 후기

0. 경기 전 생각

 

35라운드 대전전 후기를 차마 못 썼다. 너무 비참했기 때문이다. 그 경기는 "환상의 전반, 환장의 후반"이라고 정리하면 될 것 같다. 집으로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에서 보인 팀 버스를 보면서 괜히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왜 이 중요한 고비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가 싶었다.

 

경기 전날, 구단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 선수단의 자필 편지들이 올라왔다. 그것 가지고도 설왕설래하는 팬덤은 지금 이 팀의 분위기가 어떤 상황인지 잘 보여주었다. 나는 그 편지들을 보면서 "제발 그 편지를 쓰는 순간만큼이라도 진심이었기를" 하고 바랐다.

 

경기 시작 전, 아내와 함께 나의 얼굴에 난 수염을 몇 가닥 뽑았다. 수염 뽑히는 개수 혹은 그에 근접하는 숫자만큼 수원이 골을 넣는다는 우리만의 미신 때문이었다. 네 가닥을 뽑았다. 다음부터는 핀셋으로 작정하고 뽑든지 해야겠다.

 

1. 리버스 딸깍

 

올 시즌 내내 수원은 '딸깍'을 정말 잘 당했다. 특히 쎄오타임은 이제 슬슬 쎄오에게 미안해질 지경인 호칭이다. 더 굴욕적인 것은 상대가 퇴장을 당해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가브리엘의 막판 경고 누적 퇴장이 있었던 24라운드 강원전을 제외하면 이긴 적이 없다.

 

카즈키가 퇴장당한 순간, 머리 속을 스친 것은 "조졌다" 세 글자였다. 얼마 후 첫 실점이 나왔을 때, 너무나 익숙한 수원FC 특유의 세트피스시 헤더 공격을 당했을 때, 정말 이대로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비기기만 해도 다행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아코스티의 동점골이 반가웠다.

 

후반전 시작 후 처음 몰아치던 수원FC의 공세 국면을 제외하면, 수원이 그저 내려서기만 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명이 적다는 사실을 잠깐 잊어버리기도 했다. 결국 수원은 그토록 당하던 '딸깍'을 역으로 선보이며 귀중한 승리를 챙겼다.

 

꽤 오랜 시간 한 명 적은 팀을 상대로 경기하면서 승리하지 못하는 팀은 기본기나 전술의 수준이 문제시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나는 이 문제가 가장 심각한 것은 22라운드 포항전 무승부, 30라운드 대구전 패배를 기록한 수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수원FC도 결코 이런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아보인 경기였다.

 

2. 살아난 공격

 

나는 염기훈 체제의 수원이 지닌 특징을 '단순함'이라고 쓴 바 있다. 공격수들의 컨디션이 올라온 것과 이 '단순함'이 맞물리면서 최근 두 경기에서 수원은 득점력만큼은 한창 좋았던 7월의 모습을 되찾았다.

 

고무적인 것은 아코스티와 안병준이다. 도대체 왜 이러나 싶은 순간, 몇 경기 수비에서만 좋아서 수비수로 환생했나 싶은 순간이 있었던 아코스티는 요즘 공수 양면에서 쏠쏠한 활약을 하고 있다. 안병준은 모처럼 기동력, 활동량, 결정력 3박자를 모두 갖춘 모습을 보여주었다. 최전방이 위력을 발휘하면 아무래도 상대 수비가 주춤할 수밖에 없으니, 이럴 때 공격이 최선의 수비라는 말이 나올 법하다.

 

득점 후 원정 서포터석으로 달려올 때 소싯적에 학교를 월담하며 다녔나 싶을 정도의 놀라운 점프력을 보인 김주찬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나는 우리 팀에 크랙이 없다고 한탄하고 있었는데 여기 있다고 자신을 증명하고 있다.

 

뮬리치와 전진우는 짧게 나왔지만 인상적이었다. 김주찬의 결승골은 뮬리치의 예술적인 터치 덕에 나올 수 있었다. 뮬리치가 헤더 경합에서 점점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덤이다. 볼을 지키며 과감하게 전진하고, 양치기 소년처럼 있지 않고 볼을 찾아다니는 전진우는 제 역할을 잘했다.

 

그런데 브라질리언 듀오까지 터지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일까?

 

3. 집중하는 수비

 

염기훈은 인터뷰에서 카즈키 퇴장 이후 상황에 대해 "측면을 내주는 것은 어쩔 수 없고 중앙에 집중하자"고 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순간은 정말 많았다. 수원 수비가 여러 모로 취약한 부분이 많은데 그중 가장 허망한 것은 '우당탕탕'이다. 그 '우당탕탕'이 연달아 나오는 상황에서 다행히 잘 버텨냈다.

 

2실점은 헤더 경합의 실패 때문에 나왔다. 우고 고메즈의 득점은 김주원이 김현을 마크하는 사이에 박대원이 우고 고메즈를 제대로 막지 못해서 나온 것이었다. 김현의 득점은 이영재의 택배 크로스를 김현이 적절하게 파고 들어서 만든 것이었다.

 

그래도 수원 수비진은 열세를 잘 극복했다고 생각한다. 수원FC는 24회의 슈팅, 9회의 유효슈팅을 기록했다. 슈팅으로 이어질 뻔한 상황은 무수히 많았다. 그러나 다행히 정신줄 단단히 붙들고 있던 수원 수비진은 수원FC의 파상공세를 어떻게든 틀어막고 '딸깍'의 기틀을 마련했다.

 

나는 이날 경기의 중요한 차이 중 하나는 골키퍼였다고 본다. 지표상 골키퍼 선방은 양형모 6회, 박배종 4회였다. 막지 못한 것을 뭐라 책망하기 어려운 순간이 많았지만 짚고 넘어갈 것은 짚고 가자. 아코스티의 득점은 박배종의 터치미스가 아니었다면 나올 수 없었다. 주심의 경기 종료 휘슬이 불리는 순간, 방송 카메라는 자칫 까다로울 수 있었던 마지막 슈팅을 막고 볼을 끌어안은 양형모의 "오늘도 몇 년 감수했다" 하는 듯한 표정을 잡고 있었다.

 

비록 2실점을 했지만 집중하고 몸을 사리지 않는 수비가 아니었다면 승리는 불가능했다.

 

4. 카즈키 리스크

 

카즈키는 영입 이후 수원에서 부동의 핵심이다. 그러나 K리그 선수들의 '긁기'에 이상하게 약한 모습을 몇 차례 보였다. 특히 수원FC를 만나면 유독 그런 느낌인데, '언더스탠딩 풋볼'의 가호가 없는 이상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반칙으로 퇴장당하며 수원 코치진과 서포터의 얼굴을 사색으로 만들었다.

 

경기 시작 후 15분 만에 벌어진 상황이니 당연히 교체 자원을 즉시 투입할 수 없는 노릇인데, 문제는 하필 수원이 들고 온 진형이 4-4-2라 카즈키의 퇴장으로 중원이 이종성 1미들로 버텨야 하는 괴악한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상황은 전반전 막판 포포를 고승범으로 교체하면서 겨우 진정되었다.

 

이변이 없는 이상, 이제 카즈키를 올 시즌에 다시 보려면 수원이 자력으로 승강 플레이오프에 가야만 한다. 가장 중요한 상황에 가장 중요한 선수 중 하나가 빠지는 것이다. 어차피 계약기간은 남아있고 카즈키는 수원이 안고 가야 할 선수다. 카즈키도 긁히는 것에 어떻게든 적응하며 본인 페이스를 찾아야 한다.

 

5.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풍문에 따르면 이날 일반석에 수원 팬도 수원FC 팬도 아닌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축구가 좋아서 온 사람도 있겠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수원의 다이렉트 강등이 사실상 확정되는 모습을 보러 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피하기는 어렵다.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그렇게 장례식을 보리라 기대했던 사람들은 놀랐을 것이다. 수원의 관짝에 못이 박히고 있다고 믿으려던 찰나에 갑자기 관짝 문이 열리고 아직 안 죽었다 소리치고 이를 바득바득 갈며 나타난 괴물 같은 모습 때문에 말이다.

 

강등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서사의 결말은 어느 누구도 모른다. 그저 남은 경기 하나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최선을 다할 뿐이다. 팬들도 그 점에서 별반 다르지 않은 열두 번째 선수다.

 

* 같은 경기에 대해 참고가 되는 칼럼을 공유한다.

 

 

 

댓글 6

럭키금성황소 2023.11.13. 09:47
대충
수원 중심 리뷰: 이 글
수프 중심 리뷰: 내 글
이라 생각하면 편할듯

* 어제 경기장에 간 건 누군가의 강등 이런 문제는 아니고, 수원FC 팬 지인들과 경기를 보고 맛있는 걸 나눠먹으려고 간 건데(수프 여축 유니폼 챙겨입고 감) 경기 끝나고 하도 충격적이라 회식 취소....
댓글
고독한아길이 작성자 2023.11.13. 09:48
 럭키금성황소
어떤 이유로 보러 왔어도 상관은 없었고 뭐라 할 생각도 없는데, 그와 별개로 지인들 충격이 좀 컸나 보네...
댓글
럭키금성황소 2023.11.13. 09:51
 고독한아길이
올해만큼 치욕적인 해가 없고 직관 접는다고 하시더라
심지어 안간단 말은 같이 본 사람 전부 다....
댓글
고독한아길이 작성자 2023.11.13. 12:51
 럭키금성황소
그래놓고 다시 축구장 찾아오고 자신을 탓하는 게 축구 팬의 습성이라 그 말은 안 믿는 편 ㅋㅋ
댓글
62-1번 2023.11.13. 12:49
 고독한아길이
네번 중에 세번 따셨으면서... 치욕적인 해로 따지면 개랑이 더 최악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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