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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프리뷰/리뷰 달콤한 너의 러시안 룰렛: 33라운드 수원-포항전 직관 후기와 팀 상황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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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기 전의 생각들

 

수원이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지만 이 경기만큼은 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 기준에서 "축구다운 축구"를 하는 팀에게 수원이 의외로 나쁘지 않은 결과를 들고 올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토록 숱하게 믿음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면서도) 이날만큼은 수원 선수들의 각오가 남다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 경기 총평

 

수원의 러시안 룰렛이 여기서 터졌다.

 

물론 몇 가지 외재적 요소, 달리 말하면 '운'에 가까운 것들이 수원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사실을 짚어야 한다. 

 

1) 포항 선수단의 컨디션: K리그와 ACL 두 일정을 병행하고 있고 추후 FA컵까지 신경써야 하는 가운데, 베스트 일레븐 의존도가 높은 편인 포항 선수단은 이미 어느 정도 부하가 걸린 상태였다. 이전 울산전에서 입은 부상으로 완델손이 이미 이탈한 상태였고, 경기 도중 오베르단의 부상 이탈은 더욱 치명적이었다. 

 

2) 포항의 골 결정력: 어떤 팀이 경기력에서 앞서고도 기대되는 결과를 들고 오지 못할 때 가장 심각한 문제, 이번에는 포항에서 터졌다. 

 

3) 빅버드 골대: 프렌테 트리콜로가 수원의 열두 번째이니 빅버드 골대를 수원의 열세 번째라고 불러야 할까? 막판 골대 강타는 수원 팬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렇다고 수원의 승리가 자격 없는 것이었다거나 순전 '운빨'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다음 이유들로 보면 합당한 평가는 아닌 듯하다. 

 

1) 코치진의 선택: 뒤에 자세히 쓰겠지만 이번 경기에서 염기훈 감독대행을 위시한 코치진은 나름대로 중요한 변화를 선택했고, 그것이 적중한 부분은 크든 작든 분명히 있었다. 

 

2) 전술과 개인능력의 부족을 메우는 투지: 최근 무기력증에 빠진 것 같은 경기를 보며 수원 팬들이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안 되면 열심히 뛰기라도 해달라는 말이었다. 포항 같은 팀을 상대로 열심히 뛰지 않으면 막을 수 있는 것도 막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위기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대체로 공격 기회를 잡은 포항 선수에게 잘 붙거나 그 시야를 막으면서 버틴 편이라고 생각한다.

 

3. 더 단순하게

 

염기훈 체제가 이제 겨우 두 경기를 치른 만큼 섣불리 판단하기는 이르지만 김병수 체제와 나름 다른 색채를 드러내는 부분은 있다. 내 생각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김병수 체제의 특징은 "체계가 있는 복잡함(complexity)"이라면 염기훈 체제의 특징은 "단순함(simplicity)"이라는 것이다. 이전과 달라졌다고 본 부분을 몇 가지 짚어본다. 

 

1) 수비진에 대한 단순한 명령어: 3백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김주원+α의 두 센터백에서 후방 빌드업이 출발했던 김병수 체제에서는 최후방의 선수도 신경써야 할 부분이 많았다. 우측 스토퍼 한호강/고명석을 중원까지 올려쓰는 빌드업을 통한 중원 수싸움 혹은 전진패스는 한동안 성공을 맛보았다. 그러나 특히 공격 과정에서 믿을 만한 우측 윙백의 공백 장기화, 후방 빌드업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해야 하는 전방 압박에 대한 대응 능력의 약화로 김병수 체제 말기의 후방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염기훈 체제에서 수비진의 CPU는 더 간결한 연산만 수행해도 되는 것으로 보인다. 후방 빌드업에 대한 기대가 상대적으로 낮은 전술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비에 집중하는 박대원과 김태환의 모습은 훌륭했다. 두 선수의 대인 수비에 대해서는 애초에 큰 걱정을 하지 않은 편이었는데, 다만 박대원의 좌측 풀백 기용에는 불안감이 있었다. 의외로 박대원은 큰 문제 없이 임무를 수행했고, 심지어 후반전의 슈팅에서도 보이듯 더 날카로운 공격 가담을 보여주기도 했다.

 

2) 중앙 미드필더의 역할 조정: 선발 출장한 선수들 중에서만 논하자면 카즈키는 앞으로, 김보경은 약간 뒤로, 이종성은 사냥개로. 이날 선발 명단은 4-3-3으로 제출되었으나 실제 경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뮬리치-카즈키가 최전방에 서는 형태의 4-4-2 혹은 4-4-1-1, 김보경이 이종성과 비슷한 선까지 내려온 4-2-3-1에 가까운 모습도 보였다. 김보경이 얼마나 경기에 최적화된 상태인지, 어떤 전술에 가장 적절한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계속 후반전 이른 시간대에 교체되는 것으로 보아 체력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만 할 뿐이다. 하지만 포항의 압박을 못 버텨서 억지로 뒤로 물러난 것이 아니라 계산적 대응을 위해 뒤로 물러난 것이라면, 이 경기 전반전에서 김보경은 임무를 잘 완수했다. 한편 이종성은 비록 경기 막판에 경고 누적으로 퇴장을 당했지만 이날 수비의 1차 저지선에서 좋은 역할을 했다. 공수 양면을 오가며 여러 책임을 떠맡는 복잡한 역할은 전반전에 김보경에게 주어진 것 같은데, 그 역할을 가장 잘할 수 있고 잘해온 고승범 수준은 아닐지라도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역할이 단순해진 카즈키와 이종성은 더 장점을 발휘할 기회가 있었던 것 같다.

 

3) 진격의 거인 뮬리치: 마침내 뮬리치가 선발 출장했다. 그가 포항 수비수와 경합하다 넘어질 때마다 내 마음도 휘청대는 (그런데도 이상하게 빠른) 뮬리치의 뜀박질 모양처럼 휘청댔다. 그래도 뮬리치의 발 밑으로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니 위력을 발휘한 것은 분명하다. 아쉽게도 골은 나오지 않았지만 2미터 넘는 키의 거인이 이따금 윙처럼 뛰기까지 하는 장면들은 포항 수비진에게 위협이 되기에는 충분했던 것 같다. 다만 뮬리치의 활약상은 뒤에서 다룰 약간의 고민을 안겨주기도 했다. 물론 그의 활약 자체가 문제라는 뜻은 전혀 아니다.

 

4. 아직 남은 미제

 

애초에 말도 안 되게 감독을 맡은 염기훈에게 과도한 기대를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점은 잘 알고 있다. 심지어 현재 선수단의 상황을 보았을 때 단기간에 지금 이상의 변화를 계속 기대하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경기를 보면서 명백하게 보인 것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대체로 특정 감독의 문제로 보기 어려운 것들임을 밝혀둔다.

 

1) 불안한 옆구리: "바사니...!" 빅버드 N석에서 수원 우측면을 보면서 절규하는 팬들의 소리였다. 어쩌다 김주찬의 득점에 관여했으니 망정이지, 바사니는 볼 키핑을 못해서 턴오버를 일으키거나, 상대 공격 시에 타이트하게 대인 마크를 하지 않아서 불안한 상황으로 이어질 때가 많았다. 여기저기 나오는 질문이었다. "대체 바사니는 왜 나오는 것일까?" 음모론까지 제기되곤 했다. 그런데 정말 누가 그 자리에 나와도 쉽지 않다는 것을 결국 깨닫게 된다. 나올 수 없는 것이 확실한 이상민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고무열(명단제외), 김경중(명단제외), 전진우(슈팅 1회와 프리킥 유도 1회로 나름대로 기여한 정도), 서동한(명단제외), 아코스티(공을 거부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 정도가 그 자리의 가용 자원인데, 누구도 썩 든든하지 않은 것, 그리고 측면 공격에서 오로지 김주찬 하나 바라보고 있는 것이 냉정한 현실이다. 뮬리치가 측면에서 전진하는 모습이 자주 연출되는 것은 의도된 전술적 선택보다는 윙의 부재에 따른 불가피한 임기응변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상황에서도 측면으로 진출한 뮬리치를 지원하는 선수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더욱 고민을 안겼다.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안정을 찾을 것으로 보이는 측면 수비도 계속 거칠게 뛰고 경합에 자주 휘말리는 김태환이 부상이라도 당한다면 더욱 암울해질 가능성이 있다. 후반전 상대 선수와의 충돌 이후 김태환이 고통을 호소한 순간 빅버드 N석에 낮게 웅성대던 불안감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공감대일 것이다.

 

2) 실점 위기 패턴의 반복: 결정적 슈팅 찬스를 많이 내주는 것은 고질병이다. 포항이 측면에서 중앙을 겨냥한 크로스 위주로 공격을 풀었으니 어떻게든 버텼지만, 수비진을 돌파하거나 측면 라인을 무너뜨리면서 골문을 위협하는 데에 특화된 선수가 있었다면 상당히 곤란해질 뻔했다. 심지어 후반전 막판 20분 정도의 수원은 사실상 5백을 선택했으나 여러 차례 팬들의 심혈관계 건강을 위협하는 위기를 맞이했다. 이날의 포항보다 에너지 레벨이 높고 공격진의 기동력이 있는 팀을 상대한다면, 희망하는 결과를 마냥 기대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선수비 후역습이든 '딸깍축구'이든 수원에서 쉽지 않은 것이 바로 이런 수비에 대한 불신이 널리 퍼져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 불신감을 압축하자면, "내려앉으면 막을 수 있기는 하냐?" 같은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다행히 포항전은 1:0으로 승리를 가져왔지만 '쎄오타임'에 대한 우려는 수원 팬들의 마음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고 있다. (이제는 '쎄오타임'이라는 표현이 부적절한 것 같기도 하다. '쎄오' 때의 문제라고 할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으니 말이다.)

 

3) 카드캡터 이종성: 요즘 이종성의 플레이에 큰 불만은 없다. 오히려 이 경기에서는 든든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피치 위에 나설 수 없게 되면 문제가 있다. 고승범과 카즈키는 말할 필요 없는 대체 불가능이지만, 지금 이종성 역시 대체할 만한 자원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제 매 경기가 중요하고 이종성은 중원 전술을 위해 중용되고 있는데 경고 누적으로 퇴장을 당했다. 두 번째 경고를 받던 시점에서 하창래에게 걸었던 태클이 필요했는지 혹은 적절했는지는 의견이 엇갈린다. 보고 있던 나는 필요했고 적절했다고 생각했다. 그 상황에서 패스 한 방을 맞아 일직선으로 뚫리면 '쎄오타임'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다행히 경기가 잘 마무리되었으니 이 정도로 평가하는 것임은 사실이다. 플레이스타일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는 하더라도 카드 관리는 중요하다. '카드캡터'라는 리스크는 선수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팀 전체에 결국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5. 난세의 영웅들

 

김주찬이 득점한 경기에서 수원은 지지 않았다. FA컵 대구전, 23라운드 울산전, 24라운드 강원전, 그리고 33라운드 포항전. 올해 프로 데뷔한 19세의 선수를 향한 수원 팬들의 사랑은 말과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약팀이 중요한 경기에서 승점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골키퍼의 쇼가 필요하다. 사실 강팀이라고 해도 골키퍼의 쇼는 필요하다. 포항 같은 강팀을 상대할 때 수원에게는 골키퍼 쇼가 절실했다. 리그 막판으로 갈수록 자주 보이기는 했지만 또 그 쇼가 나왔다. 포항전은 '양형모 쇼'였다.

 

이날 수원의 공격을 주도한 것은 뮬리치, 카즈키, 김주찬이었다. 포항 골문에 대한 가장 중대한 위협들은 소수의 뛰어난 선수들의 발로 빚어졌다.

 

6. 리빌리와 검은 옷

 

경기 이틀 전부터 빅버드 앞에 '잼버리'로 불린 텐트 행렬이 갖추어졌다. 창모와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리빌리 굿즈가 경기일에 블루포인트에서 판매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유난히 진심인 사람들이 먼저 와서 진을 친 것이다. 개인 간의 리빌리 굿즈 거래는 지금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다.

 

32라운드 인천전에 이어서 많은 수원 팬들이 검은 옷을 입고 경기장을 향했다. 블루포인트 앞에 줄을 서다 리빌리를 포함한 굿즈를 사러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들의 많은 수가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N석만이 아니라 W석, E석까지도 검은 물결이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30라운드 대구전이 끝나고 나서 검은 옷을 입자는 제안을 팬 커뮤니티에 올렸다. 그때부터 꿈꾼 순간이 포항전 직후의 카니발 같은 것이었다. 멕시코판 할로윈이라 할 수 있는 '망자의 날'처럼, 죽은 모양새로 있던 사람들이 크게 울리는 음악에 맞춰 축제를 즐기는 모습을 줄곧 상상했다.

 

상상하던 카니발의 한복판에, 리빌리 '잼버리'부터 계속 빅버드에 있었을 사람들과, 청백적의 심장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과 함께 노래하고 뛰놀면서 새삼 느꼈다. 내가 수원에 유난히 깊이 빠진 이유는 누가 보면 미친 것처럼 보일 수원의 지지자 동료들이라는 것 말이다.

 

축제 속에서도 수원 팬들은 대의를 잊지 않았고 잊지 않을 것이다. 선심에 기댈 수밖에 없는 프로리그의 척박한 토양 속에서도 어떻게든 팬들의 손으로 변화를 일구기 위하여 시작한 검은 물결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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