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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글챌린지 반유대주의 없는 사회는 가능한가 - 박노자

저는 "반유대주의"라는 현실을 처음 정면으로 맞딱드리게 된 것은 아마도 9살 때, 1982년쯤이었을 겁니다. 그 해 여름이 극우 내각이 이끌었던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략했습니다. 침략은 매우 야만적이었고, 이스라엘과 친이스라엘 세력들이 팔레스타인 피난민에 대해 민간인 학살 등을 자행했습니다. 소련은 반이스라에리 진영의 "총본산"에 가까운 위치이었는데, 스탈린 말기 이후의 반유대주의를 피해 1970년 이후 수많은 소련 유대인들이 이미 이스라엘로 이민 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남은 유대인마저도 거의 "오열 분자", "내부의 적"처럼 취급을 받게 됐습니다. 그 해 가을, 정체 모를 괴한들이 저희 가족의 우폄함을 불태웠습니다. 그 이상의 피해를 입혔다면 아무래도 수사의 대상이 됐겠지만, 나무로 만든 우편함을 불지르는 정도의 "불량배적 행각"은 저수준의 테러라 그 당시에는 수사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한데 여러 우편함들이 같이 붙어 있었던 아파트의 구조 때문에 저희 우편함이 소실됨에 따라 이웃 아파트들의 우편함들도 약간 불에 타는 등 "손실"을 봤습니다. 그래서 이웃들이 제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언급하고 "유대인의 우폄함을 불태울 때에 우리도 간접 피해를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저희들에게 화도 내지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반유대주의를 모종의 "불가피한 상황", 그저 하나의 "현실"로 알고 그 현실에 의해 본인들도 피해를 좀 입은 건 "운명"이라고 본 것 같았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반유대주의가 없는 사회가 과연 존재한가?"라는 질문은 제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게 사실 "우문"에 다름 아닙니다. 물론 수많은 역사적인 비유럽적 사회들은 "반유대주의"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예컨대, 중국에서는 유대인들이 처음으로 당나라 시절에 중동으로부터 상인으로서 입국하고, 황소의 난 때에 광주에서 상주했던 다른 외국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손실을 봤지만, 송나라 이후 그 다수가 개봉에서 정착한 뒤에는 그 어떤 차별대우도 받은 바 없었습니다. 중국인들이 그들을 이슬람 신도인 회족의 한 부류로 취급했는데, 또 "יהודים" (유대인)이라는 말을 한자로 음차표기하여 "竹忽", "珠赫" 등 다양한 방식으로 불렀습니다. 송나라 때에 그들이 황실의 성씨인 조씨 성을 사성 받고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 시작하여 청나라 말기까지 수많은 유명한 관료, 학자들을 배출했습니다. 즉, 개인 영역인 "종교" 이외에는 그저 "보통의 중국인"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이죠. 마찬가지로, 상인으로서 현지에서 정착한 남인도 고친 왕국 (오늘날 게랄라주)의 유대인들은 거기에서 차별을 받을 일이라고 없었습니다. 반대로 주로 상업에 종사하는 만큼 중산-상류층의 일부로 편입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유대주의"란 세계사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역사를 이어, 유일신을 받느는 "아브라함" 계열의 종교 (기독교, 이슬람 등)를 믿는 유럽사 등의 문제입니다. 한데 유럽의 정신세계가 제국주의 시대에 "세계화"된 뒤에는 유럽의 반유대주의도 같이 세계화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반유대주의 전통이라고 전무했던 한국에서마저도 반유대주의 인식의 일부가 수입돼 정착된 것이죠.

유럽적 반유대주의의 기원은 무엇인가요? 제가 청년 시절에 입수할 수 있었던 가장 연대가 오래된 반유대주의 관련 기록은, 고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살았던 유대인 계열의 팔로토주의적 철학자 필론의 책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공동체의 대변인 격인 그는, 기원후 38년에 알렉산드리아의 희랍인과 이집트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많은 유대인 가족들을 잔인하게 살인했던 일을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유럽사 최초의 포그롬"이라고 알려져 있는 그 알렉산드리아 폭동의 원인은? 비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유대인들이 "폐쇄적인 공동체", 주변 사회에 잘 적응되지 못하고 동화가 안되는 공동체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목숨 이상으로 안식일 (שבת)을 지키는 일을 중시하고, 로마 황제의 동상을 숭배하는 것을 기피하고 비유대인과의 혼인 등을 회피했습니다. 누구에게도 "남", "타자"인 그들을, 비유대인들이 너무나 쉽게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즉, 사회-경제적 상황이 악화되거나 정치적인 불안이 생길 때마다 "영원한 타자"로 인식됐던 유대인들이 "분풀이" 대상의 1호로 여겼던 것입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로 개종되기 이전에도 이미 그랬다는 것이죠. 제국이 기독교로 개종되고 나서는 제국의 판도 내에서 도처에서 살았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상황은 더욱 더 악화됐습니다. 기독교가 대표적인 선교형 종교이었지만, 로마 시대의 유대교도 "선교 행위"에 적극적이었던 종교이었고, 로마 제국 말기에는 그 총인구 중의 유대인의 비율은 약 10%에 달했습니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유대인들이 바로 최악의 "경쟁자"이었던 것이죠. 유럽 유대인들의 비극의 씨앗이 그렇게 뿌려진 것입니다.

기독교가 그 정체성의 기반이 된 중세나 중세 이후의 유럽에서는, 유대인들이 사실 거의 유일한 비기독교적 마이너리티이었습니다. 이슬람 신도들이 유럽의 기독교 사회들에서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9세기 중후반 이후의 일인데, 그 전에는 "유대인"은 사실 "소수자"의 대명사이었죠. 그래서...유대인에 대한 개인적 폭력부터 사회적 폭력 (포그롬)까지 그저 "일상"이었습니다.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인 남성들의 폭력이나, 식민지 침략, 통치 과정에서 유럽인들이 행사했던 폭력처럼, 유대인에 대한 폭력도 상습화돼 있었습니다. 러시아 내지 우크라이나 (키이우 루시)의 역사에서는 최초의 포그롬은 이미 1113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기독교인으로서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이 비농업 활동, 즉 수공업과 상업, 그리고 고리대 등에 종사했는데, 경제적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키이우의 기독교인들이 그 해에 유대인의 다수를 살인하고 그 재산을 약탈했습니다. 물론 12세기초의 키이우는 그저 유럽의 다른 도시들과 다를 게 없었다는 것이죠. 유대인에 대한 혐오나 폭력이 하나의 "아비투스"가 된 이상, 유럽이 탈기독교화되어도 혐오는 새로운 채널들을 찾아 오히려 더 번창하게 된 것입니다. 19세기말부터 독일 등 유럽 선진국의 반유대주의는 종교와 관계 없는, "인종" 그 자체를 문제 삼은 형태로 바뀌면서 오히려 더 독해졌습니다. 종교는 그나마 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인종"이란 생득적인 범주를 아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세계 유대인들이 상당히 기대했던 것은 소련 초기의 반유대주의 청산의 시도이었는데, 그 시도 역시 1940년대 중후반부터 스탈린의 지도부에 의해서 종식되고, 소련에서 국가 주도의 반유대주의가 냉전의 분위기 속에서 다시 도입됐습니다. 반유대주의 바이러스는 적어도 유럽 문화권에서 죽지 않고 계속 변이되어 그 생명력 (?)을 과시해온 것입니다.

2024년 오늘, 세계의 가장 민주적인 나라로 알려진 노르웨이에서마저도 (오슬로대 홀로코스트 연구센터의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14%의 주민들이 "전세계 유대인들이 세계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같이 움직이고 있다"든가 "유대인들의 세계 경제에 대한 지배력은 지나치다"와 같은 류의 주장을 믿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대한민국은 어떤가요? "유대인들이 미국을 움직인다"는 류의 주장들은 거의 당연시되고, 심지어 진보적인 인사들의 입에서도 계속 나옵니다. 이 주장이 반유대주의적 음모론에 속하다는 의식 자체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유대인들이 왜 불안을 계속 느끼고 왜 이스라엘 같은 류의 피난처를 필요로 하는가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들은, 이런 주장들에 내재돼 있는 타자화, 그리고 집단 악마화에 대해 생각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현재 세계의 "혐오 시장" (?)에서는 반유대주의는 아마도 최대로 팔리는 상품 (?)도 아닐 겁니다. 중국(인) 혐오 (Sinophobia)나 이슬람 혐오 (Islamophobia) 등이 해일처럼 일어나는 형국이고, 특히 후자의 경우 유럽의 전통적 반유대주의의 많은 특징들을 그대로 내포하기도 합니다. 한국도, 중국(인) 혐오 (혐중)이나 이슬람 계열의 소수자에 대한 혐오의 태도 등은 반유대주의보다 훨씬 크고 급한 문제들일 겁니다. 그렇다고 각종 혐오가 가장 잘 팔리는 이념 상품이 되고 만 이 신자유주의 위기 시대에, 유대인들도 안심하고 살기 어렵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출처] 반유대주의 없는 사회는 가능한가?|작성자 박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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