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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글챌린지 차별, 디아스포라 민족주의의 '어머니' - 박노자

제가 요즘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것은 조승복 교수 (1922-2012)의 개인사입니다. 한국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실 조선인 조승복은 북구 일본학 및 한국학의 한 창시자에 해당됩니다. 만주 출신인 조승복은 동경제대와 미국에서 유학했지만, 6.25 전쟁에의 미국의 개입과 파병 등에 반대했다가는 "민주 국가" 미국에서 상당히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쫓겨나서 스웨덴에 가서 망명 신청을 해야 했습니다. 거기에서는 북구 중국학의 거인인 Karlgren 교수 밑에서 중국어 음운사로 학위를 받고, 결국 조선어 연구도 계속 했지만 Karlgren 등의 압력으로 주로 일본어 연구와 교수에 집중해 결국 스톡홀름대의 초대 일본학 정교수가 된 것입니다. 조승복은 동아시아 3개국어를 포함하여 러어 등까지 해서 8개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 "언어 귀재"이었습니다. 프랑스인인 부인과 주로 불어로 대화했는가 하면, 학술 작업을 영어와 불어, 스웨덴어, 일어, 조선어 등으로 하고, 그가 일어로 쓴 글들을 일본인이 봐도 "완벽한 일본어"라는 이야기 밖에 안나옵니다. 그의 학술 교류망은 냉전시대의 동유럽을 포함해 전세계를 아울렀는가 하면, 그가 스톡홀름에서 일찍 사귄 친구 중의 한 명은 나중에 세계적 "포스트모더니스트"가 된 바로 그 미셀 푸코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푸코를 알아준 최초의 한국인이었을 겁니다.

이렇게 보면 그야말로 "최고의 국제인"인 셈이죠? 한데 스웨덴어로 그가 낸 자서전 (En korean i Folkhemmet, 2014)을 보면 그 마지막 단락 중의 하나는 다름이 아닌....발해의 귀속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사망하기 거의 직전에 쓴 그 자서전의 마지막 부분이라면 아마도 조승복이라는 세계적인 언어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를, 그야말로 놓쳐서 안될, 그런 문제를 다루는 것이 돼야 했을 터인데, 그 문제는 바로 우리 민족, 즉 고구려인이 발해의 건국자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조승복의 한국어 자서전 (『분단의 恨: 과거와 미래 趙承福의 斷想集』 , 2004)을 보면, "민족"이라는 핵심어는 전 텍스트를 통하여 계속, 일관적으로 나옵니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 민주화로 세상이 좀 좋아져서, 조승복 교수와 같은 평화주의자/해외 통일주의자가 남한에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되자마자 그가 남한 지식인 사회에서 벌인 운동이란 바로 "우리 말 우리 문화 동질성 회복 추진회"라는 사업이었습니다. "민족 동질성 회복"을 통해 남북 평화 통일을 앞당기자는 것은 그 운동의 주요 취지였습니다. 그러니까 "발해의 민족 성분" (?)에 대한 그의 뜨거운 관심은, 사실 논리적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현대 한국 지성사에서 가장 넓은 국제 관계망을 가진, 가장 다국어 구사에 능한 지성인 중의 한 명이었지만, 동시에는 - "평화, 민주화, 통일"의 차원에서는 - 가장 철저한 "민족 지성"이기도 했습니다. 그게 과연 어떻게 가능했던 일이었을까요?

저는, 그의 국제주의도 그의 민족주의도 동시에 그의 "디아스포라적 존재"의 연장선상이라고 봅니다. 그는 디아스포라 구성원으로 태어난 것이죠. 만주에서 조선인으로 태어나고, 거기에서 때때로 중국 사회에, 때때로 일본 (만주국) 사회에 언어적으로 편입되라는 압력을 계속 받았습니다. 동경제대에서 그는 부득불 일본어로 학술적 사고를 하게 돼 있는 훈련을 받아야 했던 것이고, 나중에 구미권에서 학술적 작업을 할 때에 영어로 사고하게끔 다시 훈련을 받았던 것입니다. "언어 구사"가 "생존"을 의미하는 것은 디아스포라의 존재 조건입니다. 조승복은, 이런 조건하에서 "생존"하여, 거기에다 "학술적 업적"을 남기기 위해서는 각종의 외국어들을 "스펀지처럼" 받아들이는 "세계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데 그는 동시에 계속해서 "조선인", 혹은 "동양인", "외국인"이라는 그의 태생적인 민족 성분으로 인해서 "남과 다르게" 취급되어지는 것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만주국이나 일본에서는 물론이고, 그는 스웨덴에서도 계속해서 "차별"이라는 또 하나의 존재 조건과 맞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보다 학술적 업적이 훨씬 없어도, 정당하게 하자면 그가 들어갔어야 할 중국학 교수 자리에 결국 "좋은 가문" 출신의 스웨덴 학자가 들어간 것은, 그가 경험한 사실상의 차별의 하나의 사례이었습니다. 그러나 차별이 심하면 심할 수록 "민족 의식"이 강하게 자리를 잡게 되는 법입니다.

저는 조승복의 자서전을 한국어나 스웨덴어로 읽을 때에 정말 묘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가 아닌, "내가" 스스로 쓴 책이라는, 이상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죠. 물론 그와 제가 "같은 사람의 분인"이 아니고, 그제 디아스포라라는 같은 생존 조건을 안고 산다는 의미에서 (소속 '민족'과 관계 없는!) "동질성"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 디아스포라도 늘 "언어"에 굉장히 민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현지 언어를 "현지인 이상으로" 터득해 사용해야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현지에서 "지성인"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소련이나 미국에서 유대인 출신의 좋은 작가들이 그토록 많은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것이었을 겁니다. 한데 아무리 러어나 영어, 내지 그 어떤 다른 현지어를 모어로 내지 모어만큼 구사했다 해도, 아무리 현지 문화에 상당한 기여를 해도, "출신 성분"이라는 꼬리표는 늘 붙어있게 돼 있습니다. 동유럽은 그렇다 치고,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이라는 부자나라 노르웨이에서마저도 학교에서 "jøde" (유대인)이라는 말은 모욕적인 욕설에 가깝습니다. "jøde"라면 "구두쇠", "이기주의자"와 같은 의미가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저의 자녀들은 그들이 다니는 학급에서는 저의 혈통 등에 대해서 말을 일체 못하고 그저 "러시아 출신"이라고만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그게 21세기의 세계에서 가장 유복한 사회의 실정이란 말이죠.

저는 민족주의자도 아니고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민족만을 위한 국가 성립이라는 방식이 "유대인 문제"를 풀 수 있는 적당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유대인 문제"의 해법이란 1차적으로 유대인이 살고 있는 현지에서의 차별의 근절, 차별 의식의 근절, 반유대주의의 근절인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현재 이스라엘이 저를 포함한 많은 평화주의자들에게 안겨주는 것이 "실망"과 "분노"뿐이지만, 어쨌든 간에 이스라엘이든 어떤 방식이든 핍박 받는 유대인들이 가서 보호 받을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유대인 디아스포라 사이의 공감대를, 저도 쉽게 비판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유대인이 차별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이 땅에서는, 비유대인들도 똑같이 차별을 받아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차별 없는 나라"야말로 "유대인 문제" 해법의 궁극일 것 같은데, 현재 이스라엘의 모습은 이 꿈과 정반대라면 정반대입니다...

[출처] 차별, 디아스포라 민족주의의 '어머니'|작성자 박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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