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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독한 형사 <2장 6화 - 도시락통>

 

1

 

 

 

조그만 사무실 안에서 흰 가운을 입은 의사와 눈을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는 이가 있었다.

그는 도봉 경찰서 강력팀 형사 이재웅.

반대편에 앉아있는 의사 주변에 놓인 커다란 화분에서 나오는 꽃내음이 그의 코 끝을 자극했다.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의사의 손이 점점 빨라진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 얽혔다.

여러 가지 질문이 오갔다.

요즘도 꿈을 꾸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꿈인지.

잠은 잘 자는지. 잘 못 잔다면 언제 가장 그러는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해보려는 새로운 취미가 있는지.

그때마다 재웅의 대답은,

꿈을 꾸는데 악몽입니다.

글쎄요, 자주 못 자는 거 같습니다.

따로 하는 것은 없습니다.

무의미한 대답뿐이었다.

의사는 안경을 고쳐 썼다.

 

"환자분…환자분의 상태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제 역할이긴 하지만…그 건강해지는 데 있어서…

환자분의 의지도 매우 중요하답니다…쉽지 않으시겠지만…

자주 좋은 걸 보면서 생각을 바꿔보려 노력해 보시길 권유 드릴게요……."

 

"그게 쉬웠으면…제가 이러고 있겠습니까…안 그래요, 선생님?"

 

"흠…일단 알겠고 약 처방해 드릴 테니 약국에서 받아 가세요……."

 

진료실을 나온 재웅은 계산대로 가서 진료비를 지불했다.

2년 전, 여자친구 사망 후 다니기 시작한 정신의학과.

처음부터 다닐 맘은 없었으나 자꾸 주변에서 다녀보라는 말을 많이 해서 어쩔 수 없이 다니고 있다.

추천한 이들 중에서 공 반장이 제일 적극적이었다.

본인의 소개로 애인을 만났다가 안 좋은 일을 겪었으니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도봉 경찰서 강력팀 사무실 안에서 정적이 흘렀다.

병원을 간 이재웅을 제외한 모든 이가 현장을 나가있었기 때문이었다.

쇠로 된 출입문이 활짝 열렸다.

며칠 전부터 밀착 취재를 명분으로 이곳을 방문 중인 대국 일보 서유미 기자가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텅텅 빈 사무실을 보자 저절로 고개가 갸웃거렸다.

그녀는 이재웅 형사의 자리를 멀리서 지켜보았다.

체크무늬가 그려진 보따리 하나가 책상 위에 올라가있다.

그녀의 발걸음이 천천히 그쪽으로 향했다.

도시락통을 보았다가 우연히 그 뒤쪽에 있는 액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재웅 형사, 본인의 모습을 그린 듯한 사진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입을 비죽 내밀었다.

이런 취미도 있으신가? 때 마침 열리는 문.

놀란 그녀가 휴대전화를 들어 통화하는 척 연기한다.

 

-네네…그렇죠 그렇죠…아 그러면 제가 나중에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제 자리에서 뭐 하시는 겁니까?"

 

정신과 진료를 받고 돌아온 이재웅의 싸늘한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그녀는 눈빛을 일부러 피했다. 혹여 속마음이 들킬까 봐 말도 살짝 얼버무렸다.

 

"그…그…그냥 출근했는데…아무도 없어서…둘러보다가…그런데 이 그림…형사님이죠?"

 

"상관하지 마십시오…대국 일보 기자님은 참 하는 일이 없으신 거 같아요…그렇죠?"

 

"뭐라고요? 아니…이 밝은 대낮부터 또 시비를 거시겠다?"

 

"됐고…밥 먹어야 하니까 저 멀리 가세요……."

 

어느새 책상 위에 있던 보따리를 풀어 도시락통을 열기 시작하는 이재웅 형사.

그녀는 눈치를 살폈다. 노릇노릇 익은 스팸, 잘 익은 계란프라이, 윤기가 좔좔 흐르는 시금치까지.

저절로 없던 식욕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못 들었어요? 밥 먹을 거니까 멀리 떨어지시라고요……."

 

"크흠……."

 

꼬르륵.

그녀의 뱃속에서 배꼽시계가 울렸다.

그 소리를 들은 이재웅 형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치 달라는 듯한 저 표정, 왜 이렇게 꼴보기가 싫지?

 

"한 입…아니 두 입만 먹으면 안 될까요?"

 

"한 입이 두 입이 되고…두 입이 세 입이 되는 겁니다…범죄도 그렇고요……."

 

"무슨 비유를 해도…범죄랑…아앙…제발요!"

 

"하…그 참……."

 

의자에 앉아서 밥을 먹으려던 이재웅 형사가 인상을 찌푸린다.

숟가락을 쥔 오른손이 부르르 떨렸다.

깊은 고뇌에 빠진 듯, 3초 정도 그녀를 바라봤다.

 

"나무젓가락 저기 커피 두는 데 있으니까 가져오세요……."

 

"감사합니다!"

 

부랴부랴 뛰어가서 나무젓가락을 가지고 돌아왔다.

 

2

 

 

 

근무를 마치고 나와서 걷는 이재웅의 오른손에 도시락통이 들려있다.

자신이 없을 때 먹을 것을 주고 떠난 전 여자친구의 어머니를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그는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도시락통을 한 번 쳐다본 뒤 마음속으로 말했다.

오늘은 꼭 돌려주면서 이제는 도시락 가져오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씀드리자.

기필코 말씀드리자.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빨리 말씀드리고 속 시원하게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뿐.

얼마나 걸었을까? 전 여자친구의 부모님이 사는 아파트가 점점 보이기 시작했다.

아파트 정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선 이재웅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할 수 있다, 나는 잘 말하고 나올 수 있다.

다시 발길을 재촉했다.

앞을 쳐다보며 걸어가고 있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살짝 고개를 돌려 상대를 바라봤다.

 

"네가 여긴 왜 온 거야…이젠 아예 대놓고 오네?"

 

"재혁이구나……."

 

"닥쳐…그 더러운 입으로 내 이름 부르지마…그리고……!"

 

재웅의 오른손에 있던 도시락통 보따리를 빼앗았다.

 

"네가 뭔데…우리 어머니가 해주는 밥을 먹어? 쓰레기 새x…넌…사람도 아니야……."

 

"재혁아…오늘 내가 온 건……."

 

"꺼져…듣기 싫으니까……."

 

상대의 말을 가로챈 후 돌아서는 김재혁.

이재웅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뚜벅뚜벅 걸어가는 여자친구의 남동생을 그저 멀리서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김재혁은 텔레비전을 보는 어머니에게 다가가 도시락통을 건넸다.

지윤의 어머니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마치 네가 이걸 왜 들고 있어,라고 되묻는 듯한 표정.

그의 양손에 힘이 들어갔다. 멋대로 재웅에게 도시락을 준 어머니를 보자 화가 뻗친 모양.

다소 감정을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엄마가 그 xx한테 이거 매일 갖다 준 거야? 그 xx가 뭘 잘했다고…그 xxxx가 뭐가 예쁘다고!

그 xx…우리 누나 죽인 사람이야…그때 누나가 고통에 몸부림칠 때…그 xx는 술 처먹고 놀기만 하고 있었다고!"

 

"재혁아…이건…그저…엄마가……."

 

"뭔데 소란이야?"

 

안방에서 싸우는 소리를 들은 지윤의 아버지가 방 안에서 걸어 나왔다.

재혁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꼭짓점이 이제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아빠…아빠도 똑같아…왜 안 말리는데…그 xx한테 이딴 거나 만들어주는 엄마를 왜 안 말리는데!"

 

"인마…아무리 그래도 네 누나 남자친구였어! 화가 나도 그렇지…말 가려서 해!"

 

"그딴 게 무슨 남자친구야…지 애인 하나 지키지 못하는 놈이…무슨 남자친구냐고!"

 

탱그랑 - !

도시락통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지윤의 아버지가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안 돼요, 여보!"

 

찰싹.

아들을 향한 손찌검.

따귀를 맞은 재혁의 얼굴이 왼쪽으로 돌아갔다.

그는 즉시 고갤 돌려 아버지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입술을 오물거리다 이내 체념하고는 방으로 유유히 돌아간다.

지윤의 어머니가 그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방 문을 걸어 잠근 아들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밖에서 수차례 문을 두드리는 그녀.

지윤의 아버지는 현관으로 가서 슬리퍼를 신은 후 밖으로 나갔다.

 

어두운 밤.

주인을 떠나보낸 놀이터에서 삐거덕, 삐거덕 그네 타는 소리가 들린다.

차마 발길을 뗄 수 없었던 이재웅이 그곳에 있었다.

그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바스락바스락 부서지는 모래밭을 내려다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3

 

 

 

어느 대형병원 수술실 앞.

중년의 부부가 걸어 나오는 의사에게 다가가 수술은 잘 끝났느냐고 되묻는다.

의사는 시선을 피했다.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반응.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부인이 비틀거리자 이를 옆에 있던 남편이 다가와 양팔을 꽉 붙잡는다.

그들 곁엔 젊은 청년이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자녀였다.

그는 등을 돌렸다.

잠시 바람을 쐬려고 나가려다 반대편에서 누군가와 마주친 것이다.

 

"지윤이는…지윤이는…어떻게 됐어?"

 

재웅의 얼굴에서 땀이 비질비질 흘렀다.

과거의 김재혁이 그에게 다가갔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

 

"나쁜 xx…네가 죽인 거야…네가…네가!"

 

상대방의 멱살을 덥석 잡았다.

재웅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4

 

 

 

마음속에 생긴 응어리를 잠시 풀기 위해 놀이터를 들렀던 이재웅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길을 걷는데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재웅아! 아직 안 갔어?"

 

지윤의 아버지가 그 앞에 섰다.

재웅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버님……."

 

"잠시 차라도 마시고 가지 그러냐……."

 

"아닙…니다…내일 출근도 해야 되고…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재웅아!"

 

본인 앞을 지나가는 그를 불러 세운다.

 

"오늘 일은 미안했다…재혁이 그 녀석에게 들었어…미안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대답 없이 한 번 고개를 까딱거린 후 곧장 발길을 옮겼다.

지윤 아버지의 시선이 살짝 가라앉았다.

조금씩 멀어지는 예비 사위의 어깨가 유난히 오늘 좁아 보인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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