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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이 있는.. 사진 거창 사동마을[발롱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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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묻는다면 어디를 말해야 할 지 헷갈리지만, 시골을 묻는다면 말할 수 있는 곳이 한 곳 있다. 거창에 있는 사동마을. 
 어린 시절 이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김천에서 나와, 1시간동안 구불구불한 국도를 열심히 달려야 했었다. 그렇게 국도를 타다보면, 맨 첫 사진에 있는 이정표가 우리를 반겨줬었다. 
 그 다음으로 볼 수 있는건 두번째 사진의 나무. 저 큰 나무 아래 평상에서 이야기를 나누시던 마을 주민분들을 지나쳐, 세번째 사진의 너른 벌판을 지나쳐가면, 마을 가장 안쪽에 터줏대감 처럼 자리하고 있는 할아버지 댁이 나왔다. 우리가 오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시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주시고, 난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오래된 신동아를 읽거나 집안 여기저기를 쏘다니곤 했었다. 7번째 사진의 옥상에 올라가는 계단은 너무 높고 험해 발이 빠지지 않을까 두려웠었지만, 그 위에서 보는 뒷산의 새들의 풍경이 어린 마음에도 멋져서 자주 올라가곤 했었다. 온가족이 모두 모일때는 집에 자리가 없어 옥상에서 텐트를 치고 자기도 했었다. 그 어린날에도 텐트의 바스락 거리는 소리와 풀벌레 소리는 왜 이리 귀에 박히던지. 
 어린 시절에는 5번째 사진의 창고 앞에서 소와 개를 키웠었는데, 그 개 덕분에 형은 지금도 개를 조금 무서워한다. 온가족이 모였을땐 저 앞에서 고기를 구워먹곤 했었다. 매 여름이 되면 온가족이 다 모였었는데, 5남매의 가족들이 모두 모이니 저 너른 마당도 비좁았었다. 저기서 고기를 조금이라도 더 먹겠다고 안간힘을 쓰다가 체신머리 없이 사촌동생 고기도 열심히 빼앗아먹곤 했었다. 뒷산의 왜가리인지, 황새인지를 찍던 사진작가가 우리집에 잘못들어왔다가 고기를 잔뜩 얻어먹고는 온 가족의 가족사진을 찍어줬던 기억도 난다. 
 더운 여름날이면, 집 뒤에 있던 개울에서 수영을 하곤 했다. 수영이래봐야 물장구였지만, 그래도 개울가에서의 수영은 그 어떤 풀빌라에서의 수영 부럽지 않은 기억이었다. 
 화양연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그 시절은 지났고, 거기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라고. 우리가 놀던 개울가는 직강화되어 반쯤 복개되었고, 옥상은 텅 비어있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 반갑고도 난감하게 우리를 맞아주던 동네 어르신들은 물리적으로든, 거리적으로든 떠나신지 오래다. 집은 벽들로 가로막혔고 우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남은 것은 철마다 돌아오는 정체모를 새와 입구의 나무, 이정표와, 가끔 거창으로 내려오시던 할아버지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얼마전부터 서울에 계셨다. 인생의 마지막을 정리하시는 동안에도 당신께서는 집에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입버릇처럼 하시곤 했다. 난 멀쩡한데 왜 날 이곳에 두냐고. 그 말을 할 수 있는 이유도 다 진통제 덕임을 아는 우리는 아무말 없이 뒤돌아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결국, 할아버지는 가시고 싶은 집 대신 병원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셨다. 이제, 정말 그 순간에 남은 건 없어져버렸다. 가끔 이 곳을 추억하고 그릴 수야 있겠지만, 즐거웠던 과거는 흐린 유리창처럼, 저 멀리서 아스라이 보이게 될 뿐이다. 한없이 높아보이던 계단은 너무 낮아졌고, 흥미진진한 신동아는 박물관에나 보낼 존재가 되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 흐릿한 시절을 다시 기억하고자 함도 있지만, 그 시절의 마지막 상징과도 같았던, 할아버지의 부고 때문이기도 하다. 항상 엄한 모습으로 남아있던 할아버지라, 난 별로 울지 않을 줄 알았다. 그립지도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엄함 만큼이나 단단하게, 할아버지는 내 마음에 뿌리박혀있었다. 존재의 부재는 할아버지를 납골당에 모신 다음에도 쉬이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돌아오는 길, 아무것도 아닌, 카카오톡 생일 알림으로 절절하게 실감이 났다. 핸들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며, 새삼 할아버지의 존재감을 깨닫고 뿌연 시야로 어서 집에 도착하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그 감정을 모두가 알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이 글을 본 사람들은, 한번씩이라도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위해 기도해주었으면 한다. 엄했지만 자상하고, 때로는 늦은 귀가를 타박하고, 때로는 보수적이었던, 우리가 길거리에서 흔히 마주할 수 있는, 그렇지만 나로서는 너무 묵직하게 자리 잡아버린 누군가의 마지막 가는 길을 위해 조금이라도 애도해주었으면 한다.

댓글 2

데모오니이쨩 2022.08.23. 05:53
나랑 비슷한 심정이군, 나도 최근에 우리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비록 서울에서 돌아가셨고 할아버지의 품에서 자라왔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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