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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종교 역대교황 파트2 (21~40) 총정리 꼭보자!

역대교황-2(21대~40대)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내용이 워낙많다보니 늦었습니다.
자 한번 다시 가톨릭에 세계로 빠져보자!
 

21. 고르넬리오(Cornelius)

 

교황 고르넬리오(Cornelius)는 A.D. 251년-A.D. 253년)에 재위한 21대 교황이다.  

  

로마 황제 데키우스(A.D. 249년 ~ A.D. 251년)는 로마 제국의 영토에 거주하는 모든 기독교인을 산발적이고 지엽적으로 박해하였다. A.D. 250년 1월부터 그는 모든 제국 신민은 감독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황제의 신상에 분향하며 제물을 바칠 것을 명하는 칙령을 내렸다. 만약 이를 어길 시에는 처형하도록 하였다.

 

많은 종교인이 자신들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감독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황제의 신상 앞에 분향하며 제물을 바쳤지만, 기독교도들은 우상 숭배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함으로써 교황 파비아노를 비롯하여 많은 이가 순교했다.

 

교황 파비아노가 순교한 후에도 계속해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치열하였으므로 교회는 후임 로마의 주교 즉, 교황을 선출할 여유가 없었다. 교황의 부재기간 동안 교회는 로마 교구 사제단에 의하여 임시 통치되었다. 일련의 박해기간 중에 교회는 두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로마 교구의 사제 노바시아노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황제의 박해기간 동안에 고문과 죽음 등이 두려워 배교하거나 교회 활동을 그만둔 사람들은 설사 나중에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할 지라도 다시 교회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노바시아노주의 참조). 이들은 배교자들이 교회로 다시 들어오려면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로마 교구의 사제인 고르넬리오와 카르타고의 주교 치프리아노를 포함한 또 다른 세력은 배교했다고 해서 세례를 다시 받을 필요는 없으며, 대신 참회한 후 고해성사를 받고 용서받은 죄에 대한 보속만 하면 된다고 가르쳤다.

 

한편, 데키우스는 교황만 없으면 기독교는 결국 없어질 것이라는 판단 하에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새 교황이 선출되는 것을 방해하였다.

 

그러나 고트족의 침입 때문에 데키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전투 지역으로 떠나야 했으며, 그 동안에 새 교황이 선출되었다. 14개월 동안의 사도좌 공석 기간 중에 유력한 교황 후보자였던 모세스가 순교하게 되었다. 노바시아노는 자신이 새 교황으로 선출될 것으로 기대하였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고르넬리오가 A.D. 251년 3월에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노바시아노는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재 세례를 믿지 않은 고르넬리오가 교황으로 선출된 것에 대해 앙심을 품었다. 그리하여 그는 고르넬리오에 대한 반역을 획책하면서 스스로 대립 교황이 되어 교회 내에 분파를 조직하였다.

 

고르넬리오가 교황으로 선출된 후, 노바시아노는 자신의 사상에 더 심취하였으며 만약 주교가 죄를 짓는 것은 다른 모든 사람이 죄를 짓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기 때문에 살아 생전에 용서를 받을 수 없으며, 최후의 심판 때에 가서야 겨우 용서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고르넬리오가 치프리아노 및 디오니시오와 대다수 아프리카 주교들과 동방 주교들의 지지를 받는 한편 노바시아노는 고르넬리오를 교황으로 인정하지 않는 로마 교구의 소수 사제들 및 평신도들의 지지를 받았다.

 

고르넬리오는 60명의 주교들을 모아 주교 시노드를 소집하였다. 주교 시노드에서는 고르넬리오를 적법한 교황으로 다시 한 번 재확인한 동시에 노바시아노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을 모두 파문한다고 선언하였다.

 

주교 시노드에서는 또한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기간 동안 배교하거나 활동하지 않은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문제도 다루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받아야만 성찬례에 참여할 수 있다고 확인하였다.

 

주교 시노드의 판결은 당시 노바시아노의 후원자 가운데 가장 대표적이었던 인물인 안티오키아의 주교에게 보내졌다. 안티오키아의 주교에게 서신을 보낸 목적은 그에게 주교 시노드의 판결을 알려 승복시키기 위함이었다.

 

고르넬리오는 서신에서 로마 교회에 대해 사제 46명, 부제 7명, 차부제 7명, 시종직 42명, 수문직 52명 및 1,500명 이상의 과부와 약 5만 명 이상의 신자로 구성된 공동체라고 언급하였다.

 

A.D. 251년 6월, 데키우스 황제가 고트족과의 전투 도중에 전사하였다. 데키우스 황제가 죽자 즉시 그의 뒤를 이어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가 새 로마 황제로 등극하였다.

 

A.D. 252년 6월 기독교에 대한 로마 제국의 박해가 재개되었으며, 고르넬리오 교황은 오늘날 이탈리아 치비타베키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253년 6월에 선종하였다. 《리베리오 교황표》는 고르넬리오가 힘겨운 유배생활을 보내다가 쓰러져 선종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후대 문헌들에서는 고르넬리오 교황이 참수형으로 순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르넬리오 교황은 사후 역대 교황이 묻혀 있는 지하 무덤에 안장되지 않고, 근처에 있는 지하 무덤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그의 묘비에는 ‘고르넬리오 주교 순교자(Cornelius Martyr Ep)’라는 문구가 새겨졌는데, 전임 교황들이나 후임 교황인 루치오 1세와는 달리 그리스어가 아닌 라틴어였다.

 

22. 루치오 1세(Lucius I)

 

교황 루치오 1세(Lucius I)는 A.D. 253년- A.D. 254년에 재위한 22대 교황이다. 루치오 1세는 로마 태생으로 생년월일은 불명이다. 그의 가족에 대해서도 그의 아버지 이름이 포르피리아누스(Porphyrianus)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데키우스 황제 치하의 기독교 박해 기간 중에 교황 고르넬리오가 체포되어 로마에서 추방당하자 후임자로 루치오 1세가 선출되었다. 루치오 1세 역시 그의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로마 주교 착좌식 이후 바로 축출당하였지만, 발레리아누스 황제로부터 로마로 돌아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루치오 1세는 데키우스 황제 치하에서 일어난 기독교 박해 당시 배교한 신자들 중에 회개한 이들을 다시 교회 안에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한 노바시아노주의자들을 비난하고, 전임 교황의 관대한 정책을 고수하였다.

 

치프리아노는 이에 대해 서신을 보내 루치오 1세에 대하여 ‘가장 친애하는 형제이자 존경하는 증거자’라고 칭하며 찬사를 보냈다. 루치오 1세는 로마에 귀환한 후 몇달 만에 죽었다.

 

23. 스테파노 1세 (라틴어:Stephanus I)

 

교황 스테파노 1세(라틴어:Stephanus I리:)는 A.D. 254년 A.D. 257년)에 재위한 23대 교황이다. 그는 그리스 혈통이었지만, 로마에서 태어났다. 교황 루치오 1세의 수석부제로 봉사하다가 그에게 후계자로 인정받아 교황직을 위임받았다.

  

A.D. 250년에서 A.D. 251년에 걸친 데키우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가 끝난 후, 배교했다가 회개한 신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지에 대해서 교회 내에서 서로 의견이 일치되어 있지 않았다. 리옹의 주교 파우스티노는 스테파노 1세에게 배교했다가 회개한 신자들에 대한 용서 및 교회로의 복귀를 거부한 아를의 주교 마르치안을 고발하였다. 파우스티노는 마르치안이 이단으로 단죄받은 노바시아노주의와 같은 주장을 하고 있으니 단호하게 조치할 것을 스테파노 1세에게 촉구하였다.

 

스테파노 1세와 치프리아노 사이에 이교(離敎)에서 집전한 세례의 유효성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스테파노 1세는 이교에서 세례를 받았지만 보편 교회로 회심한 이들은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반면에, 치프리아노와 아프리카 및 소아시아의 다른 로마 속주의 주교들은 이교의 세례는 무효이기 때문에 회심한 이들이 보편 교회의 성찬례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A.D. 255년 평신도 마그누스의 요청에 따라 치프리아노가 교회 밖에 있는 이단자들은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논증하자 A.D. 255년 카르타고 교회회의는 이를 지지하였다. 이에 치프리아노는 A.D. 256년 71명의 주교가 참석한 회의의 결과를 로마에 보냈다. 그러나 치프리아노의 사절단이 홀대받자 로마 교회와 카르타고 교회는 대립하게 되었다. 치프리아노는 스테파노 1세에게 편지를 보내어 각 주교는 자기 교구에서 주인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스테파노 1세도 강경하게 맞섰다. 그러자 치프리아노는 A.D. 256년 9월 1일에 소집된 주교 87명의 지지를 얻어 카파도키아 지역 카에사리아의 주교 피르밀리아노에게 편지를 보내어 상황을 설명하고 지지를 호소하였다. 피르밀리아노가 보낸 편지는 스테파노 1세를 심하게 비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이교에서 거행한 세례를 인정한 로마 교회의 가르침을 신랄하게 공격하고 있다.

 

스테파노 1세가 이들을 파문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후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오 주교가 스테파노 1세에게 편지를 보내어 양자를 조절하였다. 결국 스테파노 1세의 주장이 승리하여 교회 전체에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이교에서 회심한 이들은 안수로써 죄 사함을 받고 성찬례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스테파노 1세는 또한 데키우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 기간 동안 레온의 주교 미르시알과 아스토르가의 주교 바실리데스가 이방 종교의 신에게 제물을 봉헌하였다고 하여 주교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바실리데스가 개인적으로 스테파노 1세를 찾아가 용서를 청하였다. 이에 스테파노 1세는 미르시알과 바실리데스를 용서해주고 그들을 주교로 복직시켰다.

 

A.D. 257년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다시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시작하였으며, 스테파노 1세가 교황직에 올라 A.D. 257년 8월 2일 기독교 신자들을 위한 미사를 집전하고 있던 중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고 한다.

 

24. 식스토 2세(Sixtus II)

 

식스토 2세(Sixtus II)는 A.D. 257년 A.D. 258년)에 재위한 교황이다. 발레리아누스 황제 때 교황이 되어 순교했고 죽은 후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8월 7일이다. 

 

식스토 2세는 그리스 태생으로 본래 철학자였다고 하나 증거가 없다. 그러나 현대 역사학자들은 저자가 당시 피타고라스 학파의 그리스인 학자이자 작가인 시스토와 혼동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식스토 2세는 카르타고의 주교 치프리아노에게 사절을 보내어 화해를 시도하여 아프리카 교회와 동방 교회와의 관계를 회복시켰는데, 그 전까지는 이단 종파 노바시아노주의에 의한 이단적 세례의 유효성 문제를 놓고 전임 교황과 두 교회와의 친교가 잠시 끊어져 있었다.

 

A.D. 258년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의 기독교 박해가 일어나면서 많은 수의 주교와 사제, 부제 등이 붙잡혀 순교하였다. 식스토 2세 역시 야누아리오, 빈첸시오, 마노, 스테파노, 펠리치시모와 아가피토, 라우렌시오 등 여섯 명의 부제와 함께 붙잡혀 순교하였다.

 

식스토 2세는 8월 6일 참수되었으며, 그와 함께 붙잡힌 부제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라우렌시오는 식스토 2세의 순교한 지 3일 후인 8월 10일 순교하였다.

 

식스토 순교후 100년이 지난 후에 교황 다마소 1세가 식스토 2세를 기리기 위하여 갈리스토 카타콤바에 있는 그의 무덤에 새길 묘비명을 제작하도록 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칼날이 어머니의 내장을 꿰뚫었을 때 나는 여기에 묻혔다. 내가 목자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던 와중에 군사들이 급습하여 나를 의자에서 끌어내었다. 신앙인들이 칼날 앞에 자신의 목을 내놓았지만, 순교의 영광을 원했던 목자는 광란에 빠진 이교도가 다른 신자들을 해치지 못하도록 먼저 자신의 목을 바침으로써 최초로 순교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목자의 공로를 받아들이시어 교우들을 무사히 보호해 주심으로써 보답을 잊지 않으셨다.

 

25. 디오니시오(Dionysius).

 

교황 디오니시오는 A.D. 259년- Aa.D. 268년에 재위한 교황이다. 사후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12월 26일이다.  

 

디오니시오는 마그나그라이키아 태생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로마 교회 사제단의 일원으로서 A.D. 258년 교황 식스토 2세가 순교한 후 1년이 지난 A.D. 259년에 새 교황으로 디오니시오가 선출되었다. 이 시기에는 기독교인들이 혹독한 박해를 겪는 시대라서 새 교황을 선출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성좌가 거의 1년 동안 공석 상태에 놓여 있었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잠잠해지기 시작하자 디오니시오가 새 교황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지시하였던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A.D. 260년 에데사 부근의 전투에서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의 샤푸르 1세에게 패한 후 포로로 사로잡혀 살해당하게 된다.

 

새 황제 갈리에누스는 A.D. 261년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고 몰수했던 성당 및 기타 교회 재산들을 돌려주어 기독교는 약 40년 동안 짧은 평화를 누릴 수가 있었다. 새 교황은 극심한 혼돈 상태에 빠진 로마 교회를 다시 바로 세울 과업을 안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일부 신자들로부터 탄원서를 받은 교황 디오니시오는 동명이인인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디오니시오에게 문제제기가 되었던 주장에 대해 해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 주장은 하느님과 로고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는데, 삼신론(三神論) 주장을 했다는 고발이 있었던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오 주교로부터 해명을 들은 교황 디오니시오는 그의 주장에 납득하였다.

 

교황 디오니시오는 고트족의 약탈로 파괴된 카파도키아 지역 교회들을 위해 성당 재건 및 포로로 끌려간 기독교 신자들의 몸값으로 많은 금액의 지원금을 보내주었다. 그는 교회 제도를 재정비하고 묘지를 여러 성당에 나누어 관리하게 하며 새로운 교구 행정 구역을 설치하는 등 각종 정책으로 교회의 질서를 가져왔으며, 갈리에누스 황제가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는 칙령을 내리면서 A.D. 303년까지 기독교에 평화로운 시기가 지속되었다. 디오니시오는 A.D. 268년 12월 26일에 죽었다.

 

26. 펠릭스 1세(Felix 1)

 

교황 펠릭스 1세는 A.D. 269년- A.D. 274년에 재위한 교황이다. 펠릭스 1세는 로마 태생으로 A.D. 268년 12월 26일 교황 디오니시오가 죽자 A.D. 269년 1월 5일 그 뒤를 이를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펠릭스 1세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일치에 대한 교리서를 저술하였다. 그는 안티오키아 주교회의와 정통 신앙을 가진 돔노스에 의해 이단으로 고소당해 안티오키아 주교직을 상실한 반(反)삼위일체론자인 사모사타의 바울로와의 신학 분쟁에서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도움을 받았다.

 

바울로는 주교직에서 물러나라는 요구를 거부하였으며 A.D. 272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에게 자신과 돔노스 중 양자택일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바울로에게 ‘로마의 주교(펠릭스 1세를 가리킴)와 이탈리아의 주교들에게 인정받은’ 주교, 즉 돔노스에게 교회 소유권을 넘기라고 지시하였다.

 

교황 연대표에서는 펠릭스 1세가 순교자들의 무덤에서 미사를 봉헌해야 한다는 법령을 제정했다고 나온다. 또한 카타콤바 위에 세워진 바실리카에서 장엄 미사가 거행되는 동안 카타콤바 지하에서 순교자들의 무덤 위나 근처에 있는 제대에서 개인적으로 미사를 봉헌하는 관습을 있었음을 분명하게 암시하고 있다.

 

에페소 공의회 행전은 펠릭스 1세를 순교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펠릭스 1세가 사후 아피아 가도에 있는 갈리스토 카타콤바에 안장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가 순교했다고 하나 순교자 목록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27. 에우티키아노.(Eutychianus)

 

에우티키아노는 A.D. 275sus-A.D. 283년에 재위한 교황이다. 갈리스토 카타콤바에 그리스어로 새겨진 묘비에서 발견되었다. 이 외에는 정보가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제위한 시기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교황 연대표에는 재위 기간을 A.D. 275년부터 A.D. 283년까지 약 8년 으로 기록되고 에우세비오는 10개월이었다고 기록했다.

   

에우티키아노는 포도나 콩 등 곡식의 맏물을 제대에 바쳐 축복하는 예식을 제정하였으며, 324명의 순교자를 손수 장사 지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A.D. 275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죽은 후부터 기독교에 대한 어떠한 박해도 없었으며, 미사 때 봉헌할 농작물을 축복하는 예식은 좀 더 나중에 도입되었다고 보고 있기도 하다.

 

28. 카이오(Caius)

 

교황 카이오는 A.D. 283년-A.D. 296년에 재위한 교황이다. 전승에 의하면, 카이오는 로마 제국 속주인 달마티아의 살로나에서 카이오라는 이름을 지닌 귀족 남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친척이라고 한다.

 

오늘날 카이오에 대한 정보는 교황 연대표를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교황 연대표에 기록된 내용도 성녀 수산나의 순교와 관련하여 내려오는 전설에 의존하고 있다.

 

교황의 책에 따르면 카이오는 달마티아인(유고슬라비아인)이며 로마 제국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친척으로 여겨졌다. 카이오는 교회의 위계 질서를 강조하여 독경자로부터 주교에 이르기까지 위계적 질서가 준수되어야 한다는 칙령을 내렸으며 부제들에게 교회의 일곱 구역을 관리하게 하였다.

 

도서관원이었던 아나스타시우스에 따르면 카이오는 미래의 교황들(식스토, 디오니시오)와 함께 A.D. 257년 투옥되었다. 성녀 수산나의 이야기는 카이오를 수산나의 순교와 연관시키고 있으나 순교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리베리아노 목록에 따르면 카이오는 A.D. 283년 12월 17일부터 A.D. 296년 4월 22일까지 교회를 통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연대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 이전 시기이다. 에우세비오는 카이오의 재위기간을 15년으로 보았다. 교황 우르바노 8세는 A.D. 1631년 카이오의 유해를 성 카이오 성당으로 옮겼다.

 

A.D. 280년경, 지금의 산타 수산나 성당이 있는 장소에 초기 로마 기독교 신자들의 집회소가 세워졌는데, 당시 다른 많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모임 장소와 마찬가지로 집 안쪽에 세워졌다(domus ecclesiae). 6세기의 공식 기록에 의하면, 이 가옥은 유명한 기독교도인 카이오와 가비누스 형제들이 소유했었다고 한다. 여기서 카이오라는 인물은 아마도 카이오 교황이거나 혹은 동명이인의 사제일 것으로 추정된다. 가비누스는 성녀 수산나의 아버지이다. 따라서 카이오는 성녀 수산나의 숙부에 해당한다 카이오는 로마에 있는 카타콤바에 피신하였다가 체포되어 순교했다고 한다.

 

29. 마르첼리노(Marcellinus.).

 

교황 마르첼리노는 A.D. 296년-A.D. 304년에 재위한 교황이다. 마르첼리노는 프로옉투스의 아들로서 로마 태생이며, 교황 카이오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되었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로 있던 시절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처음부터 기독교를 박해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였다. 덕분에 기독교 신자 수는 빠르게 증가하였다. 그러나 부황제 갈레리우스가 기독교에 대응하여 이교 운동을 이끌었으며 A.D. 302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마저 기독교에 대한 태도를 적대적으로 바꾸었다. 기독교도 병사들은 군대에서 강제로 퇴역당했으며, 나중에는 교회 재산은 모조리 몰수당하고, 기독교 서적들은 불태워졌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에서 두 번이나 화재가 일어난 이후에 그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더욱 강경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의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 처형하도록 하였다. 마르첼리노 교황의 재위기간 중 301년 아르메니아가 티리다테스 3세에 의해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 기간 동안 마르첼리노는 체포되어 우상들에게 향을 올리라는 강요를 받아 그대로 따랐다. 하지만 풀려난 후에 곧바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다시 기독교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몇몇 신자와 함께 순교하였다고 한다. 다른 문헌들 역시 마찬가지로 마르첼리노가 잠시 배교했었다는 기록이 나오며, 아마도 이러한 행적 때문에 고대 전례력에 그의 축일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5세기에 들어서면서 도나투스주의자인 콘스탄틴의 주교 페틸리아누스는 마르첼리노 교황과 그의 사제들이 교회의 거룩한 책들을 이교도들에게 넘겨 주고 거짓 신들에게 향을 올렸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히포의 아우구스티노 주교가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6세기 초에 위조된 시누에사 교회회의 기록에 따르면, 마르첼리노는 배교한 죄목으로 고발당해 교회회의에 출두하였지만, ‘주교는 누구에 의해서도 판결받을 수 없다(prima sedes a nemine iudicatur)’라고 주장하며 재판을 거부하였다고 한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마르첼리노의 일시적인 배교를 역사학적으로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배교에 대한 주장이 그의 사후 100년 뒤에 생겨났고, 411년 카르타고 교회회의에서 도나투스주의에 대해 논의할 때에도 마르첼리노의 배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마르첼리노는 순교한 지 25일째 되는 날인 304년 4월 26일에 살라리아 가도에 있는 프리실라 묘지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30. 마르 첼로 1세(Marcellus I)

 

교황 마르첼로 1세는 제30대 A.D. 308년 5월/6월 - A.D. 309년)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교황 마르첼리노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되었다. 그는 근래에 기독교 박해 때 배교하였던 기독교인들에게 공적인 참회와 가혹한 보속을 요구하자 이를 계기로 소동이 일어나 309년 로마 황제 막센티우스에 의해 로마에서 추방당했다. 같은 해 그는 유배지에서 선종하였으며, 교황 에우세비오가 그의 뒤를 이었다. 마르첼로 1세의 유해는 로마의 산 마르첼로 알 코르소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A.D. 304년 교황 마르첼리노의 순교 이후로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는 조금도 약화되지 않고 가혹함이 지속되었다. A.D.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퇴위하고 다음해 10월 막센티우스가 제위를 계승하면서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다시 얼마간 평화로운 시기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년 가까이 새로운 로마의 주교는 선출되지 못하고 계속 미루어지다가, 308년에 가서야 마르첼로 1세가 선출되었다. 마르첼로는 교회가 큰 혼란 속에 빠져 있음을 인식하였다. 기독교인들의 모임 장소와 몇몇 교회 묘지가 몰수되었으며, 신자들의 일상 생활 및 교회의 활동이 위협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교회 내에서 불화가 일어났다. 오랜 기독교 박해기간 동안 배교했었다가 다시 돌아온 많은 신자가 어떠한 속죄 절차 없이도 교회로의 복귀가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교회 내의 갈등이 촉발된 것이다.

 

교황 연대표에 따르면, 마르첼로 1세는 예비 신자들의 신앙 교육 준비를 도맡아 했으며, 보속 행위를 지시할 사제들을 임명하였으며, 로마 교회 구역을 본당 25개별로 나누어 재정비하였다. 그리고 사제들이 죽은 사람의 매장과 순교자의 죽음을 기념하는 의식을 주관하도록 하였다. 또한, 살라리아 가도에 새로운 교회 묘지(성 프리실라 카타콤바)를 만들었다.

 

그러나 마르첼로 1세의 활동은 배교했던 신자들을 교회 안에서 다시 받아들이는 문제와 관련한 논쟁이 생기면서 바로 끝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내막은 훗날 교황 다마소 1세가 마르첼로 1세를 기념하여 그의 비문에 새긴 헌정시를 통해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다. 이 비문에는 교황의 권위가 헤라클리우스의 반대로 신망을 잃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이유는 마르첼로 1세가 배교자들에게 공적인 참회를 요구하자 이를 계기로 문제가 일어나 평화를 깨뜨렸으므로 막센티우스 황제가 마르첼로 1세를 유배 보냈기 때문이다.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시신은 로마로 옮겨져 성 프리실라 카타콤바에 매장되었다. 5세기에 나온 《마르첼로의 수난》은 막센티우스 황제가 마르첼로 1세를 마부로 강등시킨 후 귀양지에서 실제로 그 일을 시키자 중노동에서 오는 과로로 인하여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31. 에우세비오.(라틴어Eusebius)

 

교황 에우세비오는 그리스 출신으로 아버지의 직업은 의사였다. A.D. 309년-310년에 재위한 교황이다.  

 

에우세비오의 재위기간은 고작 4개월에 불과하였으며, 기독교 박해 당시 배교했던 신자들의 장기간 공적 참회 문제와 관련해서 교회 내부에서 끊임없는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 결국 폭력사태로까지 이어지자 막센티우스 황제에 의해 공권력이 투입되기에 이르렀다.

 

막센티우스 황제는 A.D. 306년에 로마 황제로 재위하여 처음에는 기독교를 우호적으로 취급하였다. 에우세비오는 전임자인 마르첼로 1세와 마찬가지로 배교했던 신자들에 대한 태도 때문에 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교황 마르첼로 1세 시대에 시작된 배교자를 처리하는 문제가 교황 에우세비오에게로 이어졌다. 에우세비오는 마르첼로와 마찬가지로 통회를 하고 공식적으로 용서를 받아야 다시 교회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배교자들은 이에 대하여 크게 반대하며, 헤라클리오(Heraclius)를 대립교황으로 세웠다. 그리고 보속 없이 바로 다른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주장하였다.

 

논쟁이 지속되자 로마의 황제 막센티우스(Maxentius)가 헤라클리오와 에우세비오 두 교황을 시칠리아(Sicilia)로 쫓아냈다. 에우세비오는 그곳에서 곧 세상을 떠났다. 311년에 교황 밀티아데스(Miltiades)가 교황에 오른 뒤 그의

시신을 로마로 옮겨 갈리스토의 카타콤에 안치하였다

 

32. 밀티아 데스.(Miltiades)

 

밀티아 데스는 A.D. 311년-313년에 재위한 교황이다. 그는 순교자이자 성인(聖人)이다. 축일은 12월 10일이다.

밀티아 데스는 아프리카 출신이다. 밀시아데 또는 멜키아데라고도 한다. 교황 에우세비오(Eusebius)의 뒤를 이어, 311년 7월 2일에 제32대 교황이 되었다.

   

밀티아데스가 교황을 맡은 시기는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Galerius)가 그리스도교인 박해를 중단한 때였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가 밀라노칙령을 공포하고 신앙의 자유를 허락한 시기이기도 하다. 로마 황제 막센티우스(Maxentius)는 밀티아데스에게 교회의 재산을 돌려주었다.

 

밀티아데스가 카르타고의 주교로 카이킬리아누스(Caecilianus)를 선출하자, 북아프리카 지역의 도나투스파(派)에서 심하게 반발하였다. 이로 인하여 교회에 분열이 발생하였다. 밀티아데스는 A.D. 313년에 라테란궁(宮)에서 공의회를 열어 도나투스파를 단죄하고 카이킬리아누스를 지지하였다. 도나투스파가 공의회의 결정에 승복하지 않자, 콘스탄티누스 1세는 아를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밀티아데스는 공의회가 열리기 전에 죽었다. 그는 로마 황제 막시미아누스 치하에서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순교자로 인정된다

 

33. 실베스테르 1세.

 

교황 실베스테르 1세(Silvester I.)는 A.D. 314년-A.D. 335년에 재위한 교황이다.

  

실베스테르는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하여금 성당을 선물로 받았다. 실베스테르 1세의 재위기간 동안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주도로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과 예루살렘의 성십자가 성당, 성 베드로 대성전 등의 웅장한 성당들과 몇몇 순교자들의 무덤이나 공동 묘지 위에 성당들이 건립되었다.

 

실베스테르 1세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실베스테르 1세 사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그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야기가 윤색되어 교황의 권위가 황제의 권위보다 더 높다는 사상적 입증 및 8세기에 위조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을 지지하는 토대가 되었다.

 

실베스테르 1세는 325년에 열린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비투스와 빈첸시오를 교황특사로 대신 파견하였다. 그는 교황특사들을 통해 공의회의 결의를 승인하였다.

 

실베스테르는 교회에 많은 겅적을 남기고 A.D. 335년 12월 31일dp 죽었다.서방 교회의 전례력에서 실베스테르 1세의 축일은 그가 선종한 후 프리실라 카타콤바에 안장된 날짜인 12월 31일로 지정되었다. 이날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에 독일어권 나라들을 포함한 몇몇 나라들에서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을 ‘실베스테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밖에도 기독교 전통이 있는 나라들에서도 보통 이 날을 ‘성 실베스테르 축일’로 부르기도 한다.

 

34. 마르코.(Marcus)

 

마르코는 A.D. 336년 1월 18일-A.D. 336년 10월 7일에 재위한 교황이다. 죽은 후에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고 그의 아버지는 프리스쿠스라고 한다.

  

교황 연대표에 따르면, 교황 마르코는 앞으로 새로 선출된 교황은 착좌식 때 오스티아의 주교로부터 직접 팔리움을 수여받음과 함께 축성받아야 한다는 칙령을 반포하였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세 명의 주교가 로마의 주교를 축성해야 하는데, 그 가운데 첫째가 오스티아의 주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팔리움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5세기 중엽부터였다.

 

교황 마르코는 또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로부터 기증받은 영지 위에 산 마르코 성당을 세우고 발비나 카타콤바 위에는 기념 성당을 세웠다. 마르코는 자연사하였으며, 시신은 발비나 카타콤바에 매장되었다. 그러다가 A.D. 1048년 그의 유해는 발레트리 시로 이장되었으며 A.D. 1145년에 다시 로마의 산 마르코 성당으로 이장되어 성당 제대 밑 유골함에 안치되었다.

 

-팔리움-

수도대주교 관할권을 갖는 대주교나 주교에게 교황이 수여하는 팔리움은 교황의 권위에 동참한다는 의미로 착용되었다. 팔리움은 5㎝ 너비의 백색 양모로 된 원형 띠 모양을 하고 있는데, 4개의 검은색 십자가가 장식으로 수놓여 있다. 앞쪽과 등쪽으로는 어깨의 원형 띠 중앙 아래로 긴 띠 조각이 길게 늘어져 있어서 전체적으로 Y자 모양을 취하고 있다. 팔리움은 고대 그리스의 히마티온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로마에서는 일종의 망토로 몸 주위에 둘러 걸치는 4각형 천조각을 팔리움이라 불렀으며, 보온이 필요하지 않을 때는 자연스럽게 걷어올려 어깨에 걸치고 다녔다. 이것의 너비는 점차 좁아져 긴 스카프와 유사해졌다. Y자형은 7세기에 개발되었다.

 

35. 율리오 1세(Julius 1).

 

율리오 1세는 A.D. 337년-A.D.352년에 재위한 교황이다. 율리오는 ‘감았다’란 뜻이다. 《교황 연대표》에 의하면, 루스티쿠스의 아들로서 로마 태생이다. 교황 마르코가 선종한 지 4개월 만에 새 로마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율리오 1세는 주로 아리우스파의 주장에 맞서 정통 기독교의 교리를 수호한 활약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죽음으로 로마 제국은 그의 세 아들에 의해 삼등분되었다. 두 아들 중 콘스탄티누스 2세와 콘스탄스는 정통 그리스도인이었고 동로마를 차지한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리우스주의 추종자들과 가까이 지냈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 주교를 유배지에서 돌아오게 하였다. 그러자 아리우스주의를 따르던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추종자들은 A.D. 341년 안티오키아 시노드에서 아타나시오 주교를 다시 추방하는 동시에 서방 황제 콘스탄스와 교황 율리오 1세에게 대표단을 보내 아타나시오의 주교직 퇴위를 갱신하고 알렉산드리아로 들어가려는 피스투스를 새 주교로 인정해달라고 청원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아타나시오는 에우세비우스의 지지자들이 자신에게 가한 일에 대하여 변명하고 그 결과를 율리오 1세와 다른 주교들에게 발송하였다.

 

율리오 1세는 아타나시오에게 우호적인 의견을 표명한 후에 중재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노드(교회 문제를 의론 결정하는 모임)를 소집해 양측 모두를 초대하였다. 하지만 율리오 1세의 제안에 대해 동방의 아리우스파 주교들은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다. 오히려 그들은 물리적으로 아타나시오를 쫓아낸 후 피스투스 대신 카파도키아의 그레고리우스를 알렉산드리아의 새 주교로 착좌시켰다.

 

또 다시 쫓겨난 아타나시오는 이 사건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로마로 갔으며, A.D. 342년 율리오 1세가 주재한 시노드에 의해 알렉산드리아의 적법한 주교로 재차 인정받았다. 더불어 그와 함께 추방된 다른 주교들도 모두 복직되어야 한다는 결정을 보았다.

 

율리오 1세는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강조한 내용을 담은 서신들을 동방 주교들에게 보냈다. 그는 편지에서 설사 아타나시오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문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먼저 로마 주교인 자신에게 이를 알리고 자문을 구했어야 했음과 자신이 소집한 시노드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이 모르는 채 있을 수 있는 것입니까?” 율리오 1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는 곧 우리가 제일 먼저 따라야 할 관례이며, 이를 통해 정의가 내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모른 채 넘어갈 수 있는 것이란 말입니까? 무지하지 않게 되는 방법을 모르는 채 있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율리오 1세의 서신들은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였다.

 

얼마 후 콘스탄티우스 1세에 의해 소집된 교회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의 주교직 박탈이 재차 확인되었으며, 이단자 아리우스의 주장들이 채택되었다.

 

그 후 율리오 1세는 난국을 타결하기 위해 일리아에 아르키다무스와 필록세누스를 사절로 파견하여 사르디카 교회회의를 소집하였지만, 동방 주교들은 겨우 76명만 참석하였다. 다른 동방 주교들은 서둘러 필립폴리스에 모여 필립폴리스 교회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이 회의에서 그들은 아타나시오와 다른 주교들을 단죄하여 그들의 주교직 박탈을 재차 확인하였으며, 또한 율리오 1세에게 로마 주교직에서 물러날 것을 결의하였다.

 

에우세비우스의 지지자들은 교황 사절들과 접촉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갔으며, 남아있던 300명의 주교들은 이전 로마 시노드의 결의를 재차 확인하고 율리오 1세와 아타나시오를 지지하였다. 그리고 로마에 상소할 여러 규정을 결정하였다. 아타나시오는 A.D. 346년 그레고리우스가 사망하자 콘스탄티우스 2세의 허락을 받아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율리오 1세는 A.D. 352년 4월 12일 죽었다. 죽은 후에 가톨릭에서 성자로 시성했다.

 

36. 리베리오(Liberius).

 

교황 리베리오는 A.D. 352년-A.D. 366년dp 재위한 교황이다. 그는 교황 율리오 1세의 뒤를 이어 로마 제위 되었다.

 

로마 제국의 콘스탄스 황제가 350년에 서거하고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신앙 고백을 반대한 동방 주교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콘스탄티우스 2세는 서방의 주교들로 하여금 그 공의회의 동일한 실체’를 철회하고 그 신조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를 배척하였다.

 

동방 주교들은 리베리오가 로마 주교좌에 오르자마자 전임 교황 율리오 1세가 지지한 아타나시오의 주장과 사르디카 교회회의의 결정을 수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리베리오는 아타나시오에게 로마에 오도록 지시하였지만, 아타나시오는 자기가 가는 대신 이집트의 주교 80명이 서명한 문서를 보냈다. 그 문헌을 심사한 로마 시노드는 아타나시오의 적들을 지지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리베리오는 당시 아를에 있는 숙소에 머물러 있던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에게 아타나시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아퀼레이아에 교회회의를 열어야 한다고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리베리오가 보낸 사절인 카푸아의 빈첸시오는 알렉산드리아의 정통 주교를 배척하고 아를에서 교회회의를 열어야 한다는 황제의 주장에 동조할 것을 강요받아야 했다.

 

이에 리베리오는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강력히 항의하며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결국 리베리오가 요청한 교회회의는 밀라노에서 개최되었으나 콘스탄티우스 2세의 압력이 작용하여 세 명을 제외한 나머지 주교들은 모두 아타나시오를 이단자로 판정하였다. 리베리오도 아타나시오에 대한 단죄에 서명하라는 압력을 받았으나 하지 않자 A.S. 355년 콘스탄티우스 2세가 보낸 병사들에 의해 한밤중에 라테라노 궁전에서 체포되어 이틀 후 트라키아로 유배되었다.

 

리베리오는 2년 간의 유배생활 끝에 그는 일시적으로 굴복하여 아타나시오를 단죄하는 문서에 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리베리오의 항복’이라고 부른다. 이에 콘스탄티우스 2세는 다시 리베리오를 로마로 불러들였지만, 로마 교회는 이미 대립 교황 펠릭스 2세가 차지한 지 1년이 지난 후였다. 리베리오와 대립 교황 펠릭스 2세가 공동으로 로마 교회를 사목하게 하는 것이 황제의 의도였지만, 막상 리베리오가 로마에 당도하자 로마 시민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하며 대립 교황 펠릭스 2세를 로마에서 쫓아냈다. 리베리오와 대립 교황 펠릭스 2세 중 누구도 리미니 교회회의(359년)에 참석하지 않았다.

 

A.D. 361년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가 사망하자, 리베리오는 과거 아타나시오 등의 주교들을 단죄하였던 교회회의의 법령을 공식적으로 무효화하고 주교직에 다시 복직시켰다. A.D. 366년 리베리오는 자신을 찾아온 동방 교회의 사절단을 냉대하였으며, 옛 아리우스주의자들 중에 비교적 온건한 성향을 지녔던 이들은 로마 주교좌와의 일치를 강조하며 보다 잘 대접해 주었다. 리베리오는 동방 교회의 사절단에게 로마 교회와의 친교를 회복하는 조건으로 니케아 신경만이 참된 기독교의 교리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리미니 교회회의의 결정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교황 리베리오는 A. D. 366년 9월 24일dp 죽었다.

 

37. 다마소 1세(Damasus I).

 

교황 다마소 1세는 A.D. 366년 10월 1일 - A.D. 384년 12월 11일)이다. 다마소 1세는 A.D. 305년경 오늘날 포르투갈 이다냐아벨냐에 해당하는 서로마 제국의 속령인 루시타니아의 에기타니아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에 그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등극과 동로마 제국-서로마 제국의 통일 및 재분열 그리고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서 인정된 것(밀라노 칙령)과 A.D. 380년 공식 국교(로마 제국의 국가교회)로 지정된 것을 모두 지켜보았다.

  

다마소 1세는 로마의 산 로렌초 푸오리 레 무라 성당에서 성직자로 사목하였으며, 교황 리베리오가 죽자 공석이 된 로마 주교 좌를 서로 차지하기 위한 여러 세력 간의 폭력이 난무하는 와중에 로마 주교 좌를 계승하였다.

 

이 와중에 다마소의 지지자들이 적대자이자 리베리오 교황의 부제였던 우르시노의 지지자들을 공격하여 사망에 이르게 할 정도로 사태가 심각해졌기 때문에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의 진압으로 가까스로 상황이 수습될 수 있었다.

 

다마소 1세는 로마 주교좌에 착좌하자마자 살인과 혼인하지 않았음에도 간통 등의 죄를 저질렀다는 고발을 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당시 다마소 1세와 첨예한 갈등으로 인해 교회 분열을 야기한 아리우스주의자들이 퍼뜨린 이야기라서 그 신빙성이 없다.

 

다마소 1세는 교황으로 착좌하면서 이교의 조짐에 맞서 가톨릭교회를 수호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A.D. 368년과 A.D. 369년 두 차례 로마에서 시노드를 소집한 그는 아폴리나리우스주의와 마케도니우스주의를 단죄하고 A.D. 381년 이단 문제를 다루기 위해 소집된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이 공의회는 대단히 중요하다. 아리우스주의가 단죄되고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신앙 선서문이 공적으로 채택되었다.

 

그리고 다마소 1세의 교회 개혁에 따라 라틴어가 기독교의 중심적 전례 언어가 되었다. 또한, 당시에는 성경이 여러 역자에 의해서 번역되어 통일성이 없이 난잡하고 정리가 안 되어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통일성 있는 새로운 공용 성경 본문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다마소 1세는 예로니모에게 그리스어 신약성경과 70인역 등을 번역 대본으로 삼아 옛 상고 라틴어로 번역된 성경을 보다 정확하고 당시 대중이 널리 사용하는 대중 라틴어로 번역하도록 장려하였다. 그 결과 불가타 성경이 나오게 되었다. 이 성경은 382년 로마 교회회의를 통해 공식적인 라틴어 성경으로 인준을 받았다.

다마소 1세는 이교도 최고승의장을 겸했다. 다마소 1세는 80세에 가까운 나이에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의 치세 때 죽었다.

 

38. 시리치오.(Siricius).

 

교황 시리치오는 A.D. 384년 12월 11일 - A.D. 399년 11월 26일)이다. 시리치오는 리베리오에 의해 부제로 서품되었으며, 다마소 1세가 죽자 후임 로마 주교를 선출하기 위한 투표에서 상대 후보였던 대립 교황 우르시노의 각종 선전에도 불구하고, 만장일치로 새 로마 주교로 선출되었다.

  

시리치오는 활동적인 주교로서 교회 행정에 깊이 관여하여 교회 안의 여러 파벌들을 조정하였다. 또한 그는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교서를 반포하였다. 그가 반포한 교서 가운데 하나가 바로 타라고나의 히메리우스 주교에게 보낸 《Directa Decretal》이었다. 이 교서에서 시리치오는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재확인하였다.

 

시리치오는 성직자의 독신에 관한 법령을 제정하였는데, A.D. 385년 반포한 법령에서 그는 이미 혼인한 성직자들은 아내와의 동거를 금지하고 절제 생활을 해야 하며, 무절제하게 사는 성직자들은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더불어 엄격한 참회 규정을 정하고, 서품자들의 연령을 정하였으며, 군복무자에게는 사제 서품을 금지하였다.

 

유아 세례는 위급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예수 부활 대축일과 성령강림 주일에 주도록 하고, 예수 성탄 대축일 때에 거행되던 유아 세례는 폐지하였다. 주교 성성은 주교 한 사람이 할 것이 아니라 여러 주교에 의하여 거행하도록 하고, 다른 교구의 사제나 다른 교구에서 면직된 사람을 새로 서품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히스파니아의 주교이자 금욕주의자였던 프리스킬리안이 동료 주교들에게 이단 혐의로 고발되어 마그누스 막시무스 황제에 의해 마법을 사용했다는 혐의로 처형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 시리치오는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주교, 투르의 마르티노 주교와 함께 황제의 판결에 의문을 제기하며 항의하였다.

 

시리치오는 무엇보다도 로마 주교의 권위를 크게 신장시켰다. 자신이 베드로의 후계자임을 확실히 깨달았던 그는 그 권한을 실제로 행사하였다.

 

시리치오는 3세기 전부터 모든 주교에게 칭해오던 파파(PaPa)라는 칭호를 자신이 스스로 파파라 했고 로마 교황만이 파파라는 칭호를 써야 한다고 했다.

 

39. 아나스타시오 1세.(Anastsius 1)

 

아나스타시오 1세는 A.D. 339년-A.D. 401년에 제위한 교황이다. 그는 로마 태생이며 막시무스의 아들이다. 교황이 되기 전의 활동은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아나스타시오 1세는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게네스가 쓴 글들의 라틴어 번역본을 읽은 후에 바로 그의 신학적 오류를 지적하였다. 교황으로 재임하는 동안 그는 오리게네스의 주장에 맞서 싸웠으며, 400년에는 이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 교회회의를 소집하였다. 교회회의에서는 오리게네스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은 충실한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고 규정하였다.

 

교황으로 재임하는 동안 아나스타시오 1세는 도나투스주의에 맞서 싸우는 북아프리카의 가톨릭 신자들을 지지하였다.[2] 아나스타시오 1세는 또한 미사 중 말씀 전례 때 사제가 일어서서 복음서를 향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후에 복음을 읽을 것을 지시하였다. 그의 절친한 벗으로는 암브로시오, 예로니모, 바울리노 등이 있다. 사후 그의 시신은 폰시아노 카타콤바에 안장되었다.

 

40. 인노 첸시오 1세(:Innocentius I).

 

교황 인노첸시오 1세는 A.D. 401년 12월 22일 ~ A.D. 417년 3월 12일)이다. 사후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7월 28일이다.

   

인노첸시오 1세는 알바노 태생으로 인노첸시오라는 남자의 아들이라고 한다. 인노첸시오 1세는 전임 교황들인 시리치오와 아나스타시오 1세의 정책을 이어받아 로마 교황좌의 권위를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교황의 권위를 강조하며 기독교 내에서의 모든 분쟁에 대한 최후의 해결 수단으로 교황의 중재를 제시하였다.

 

인노첸시오 1세가 루앙의 빅트리치오와 툴루즈의 에우페리오, 안티오키아의 알렉산데르 등과 나눈 대화는 물론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에 반대하며 항의를 제기했을 때 취한 행동을 보건대, 그가 교황으로서 중재한 사건이 수없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와 황후 아일리아 유독시아의 박해를 받았을 때 이를 옹호하여 사절을 파견하기도 했다.

 

인노첸시오 1세는 펠라기우스 논쟁에 대해 확고한 태도를 보이며 개입하였다. 펠라기우스는 A.D. 411년 카르타고 교회회의에서 이미 단죄되었으나 A.D. 415년 팔레스타인의 디오스폴리스 교회회의에서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카르타고와 밀레비스의 교회회의는 펠라기우스를 다시 단죄한 후 A.D. 416년 그 결정을 로마로 보냈다. 그들은 인노첸시오 1세에게 펠라기우스의 문제점을 지적한 서신을 보내어 로마 교회의 개입을 청하고 그를 로마로 소환하여 파문할 것을 촉구하였다.

 

인노첸시오 1세는 A.D. 417년 1월 27일 카르타고 교회회의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답신을 보낸 동시에 밀레브의 누미디아 교회회의에 참석한 주교들에게도 비슷한 논조의 서신을 보냈다. 당시 교회회의에 참석한 주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히포의 아우구스티노는 이 서신을 받아 읽어 본 후 “로마에서 발언했으니 사건은 이제 끝났다(Roma Locuta Est. Causa Finita Est).”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인노첸시오 1세는 여러 서신을 썼다 그가 쓴 서신 가운데 하나는 예로니모에게 보낸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의 주교 요한 2세에게 보낸 것인데, 전자는 베들레헴에서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활개치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노첸시오 1세는 417년 3월 12일 죽었다. 그의 축일은 13세기부터 20세기까지는 7월 28일이었지만, 오늘날에는 3월 12일로 개정되었다.

 

끝으로 다른주제를 신청해주실분들은 쪽지로 해주세요. 

예시:예수님 연대기? 

자 신청해보자!

 

댓글 2

에스덥 2020.09.18. 23:06
성경에 관련된 이야기(?) 연대기(?)는 어떤가요? ㅎㅎ.....
성경 내용을 하나도 몰라서...ㅡ 궁금하네요.. 어떻게 흘러가는건지
댓글
킹시티 작성자 2020.09.18. 23:13
 에스덥
음...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참고하겠습니다.
한달 후에 정식으로 연재 해볼까도 생각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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