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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종교 천주교 역대교황-파트1 (1~20)[발롱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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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즐겨읽는 성경도 동일!

자 이제 알아보자?

 

역대 교황 (1대-20대)​

1. 베드로(Petrus)

 

예수의 승천 후 베드로는 예수를 대신하여 교회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으며 헤로데 아그리파 1세에게 붙들렸다가 도망하여 소아시아 및 안티오키아에서 전도하였다. 가톨릭교회에 내려오는 전승에 따르면 그는 로마에서 잠깐 동안 교회를 주재하였으나 네로 황제의 박해에 휘말려 거꾸로 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하였다고 전해 내려온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전 아래에 그의 무덤이 있다. 베드로는 예수로부터 하늘나라의 열쇠를 부여받았기 때문에(마르 16,19),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에서는 그를 초대 교황으로 인식을 함께하고 있으나, 로마 가톨릭교회만이 이 제도를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

 

베드로를 유일의 교황이란 한 것은 동로마 교회와 서로마 교회가 분열하면서 서로의 우위권을 주장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천국 열쇠를 베드로에게만 주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마 16:16-21]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위의 말씀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알고 있느냐 묻자 세례요한이나 선지자중 한 사람이라고 시원한 대답을 하지 못하자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선 듯 대답한 사람이 베드로였다. 그 믿음이 있는 자들이기에 장차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임할 수 있는 자들인 것을 인정하시고 천국 열쇠를 준다는 말로 장차 교회를 위임했다. 이 위임 받은 자들을 사도라 한다.

 

그런데 가톨릭에서는 자기들의 전통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베드로가 머물렀던 서로마 교회가 베드로의 계승자로 유일한 전통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천국 열쇠를 준 것은 눈에 보니는 어떤 교회 열쇠가 아니라 장차 교회를 위임한다는 의미인 것이었다. 그 위임은 베드로 한 사람만이 아니라 거기에 앉아 잇는 모든 제자들에게 위임한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체제이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베드로를 말한 것이고 그 베드로가 순교한 로마 교회에세 성당을 건축하고 성 베드로 성당이라고 칭한 것이다.

 

2. 리노(Linus)

 

리노는 A.D. 67년 - A.D. 79년의 사람이다. 이는 디모데 후서 4장 21절에 나타나는 사람으로 추정한다.

(딤후 4:21)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바울의 로마 투옥때 디모데를 오라 하면서 개인적으로 문안한 사람이다. 정승에 의하면 베드로가 로마에 있을 때에 자신의 집에 모신 사람이라 한다. 베드로와 바울이 합의하에 교회의 지도자로 64년-79년까지 교회를 다스렸다고 한다.

 

마스티알(Mastial= Marius Valerius Martialis A.D.40년-104년)의 풍자 시(Epigramma)에 언급되는 뿌렌스와 동일 인물이라고 한다.

 

3. 아나 클레토( Anacletus)

 

아나클레토스는 A.D. 76년 - A.D. 88년의 사람이다. 로마 순교록에는 클레토라고만 언급하고 있고 교황청 연감에는 아나클레토와 클레토 로 기록되엇다. 에우세비오와 성 이레네오, 성 아우구스티노, 옵타토 모두 아나클레토와 클레토는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하지만 리베리오 교황 목록과 교황 연대표에는 아나클레토와 클레토는 서로 다른 인물이라고 기록되었다.

 

클레토는 고대 그리스어로 ‘불림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아나클레토)는 ‘다시 불림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나클레토는 또한 ‘의심할 바 없이 진실됨’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전승에 따르면, 아나클레토 또는 클레토는 로마에서 태어났으며 12년 동안 교황으로 재위하였다고 한다. 교황청 연감은 “교회가 세워진 이후 처음 2세기 동안에는 교황들의 재위 시작 날짜와 종료 날짜가 확실하지 않다.”라고 밝히고 있다. 아나클레토는 비대해진 로마 교회를 15개의 본당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A.D. 79년에 리노를 계승하여 3대 고부가 되었다. 그리고 디오클레시안 박해 때에 순교했다. 그의 유해는 오늘날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지하에 안장되어 있다.

 

4. 클레멘스 1세(Clemens 1)

 

교황 클레멘스 1세 A.D. 92년 ~ 99년 또는 101년 기독교의 첫 번째 교부로 여겨지기도 하다.

 

초대 교회의 교황 목록에서는 성 베드로의 뒤를 이은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후계자로 클레멘스 1세를 지목했다는 설이 있고 한편으로는 베드로가 리노와 아나클레토를 둘 다 주교로 서임하면서 두 사람에게 교회 공동체의 사목에 대한 전반적인 업무를 맡기고 본인은 기도와 강론에 주력하였으며, 클레멘스 1세를 자신의 실질적인 후계자로 지명하고 교회의 모든 업무를 위임하였다고도 전해진다.

 

클레멘스 1세가 작성한 문헌 가운데 유일하게 현존하는 것은 그가 코린토 교회에 보낸 서간(클레멘스의 첫째 서간)이다. 이 서간은 코린토 교회의 일부 사제들이 논란으로 인하여 자리에서 물러난 사건에 대한 답장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서간에서 클레멘스 1세는 사도들이 사제들을 임명했다는 근거를 들어 사제들의 권위를 옹호하면서 분열 위기에 놓인 코린토 교회의 화합을 촉구하였다

 

클레멘스의 첫째 서간은 신약성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된 기독교의 문헌으로서, 최초의 교부 문헌이기도 하다. 이 서간은 4세기 말엽까지 훗날 초대 교회의 경전집에 포함되어 있고 성직자들의 사도 전승과 그 권위를 주장한 최초의 문헌으로서 교회사적으로도 귀중한 문헌이다.

 

클레멘스는 트라얀 황제 박해로 투옥되었다가 케르소네수스 체석장으로 유배되엇는데 그 채석장에 물이 부족하여 고통받는 것을 보고 기도했는데 언덕위에 양 한 마리가 서있어서 그 곳을 곡괭이로 파서 물이 나오게 되므로 채석장의 죄수들이 그리스도에게 돌아오게 되자 이에 대한 죄벌로 몸을 닻에 달아 훅해애 수장되었다고 한다.

 

5. 에바리스토(Evaristus)

 

에바리스토(라틴어: Evaristus, 이탈리아어: Evaristo)는 제5대 교황(재위: 98년/99년 - 105년/108년)이다. 아리스토(Aristus)라고도 불린다. 에바리스토는 베들레헴 출신의 그리스계 유대인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교도 박해가 일어났던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 치세 때에 클레멘스 1세의 뒤를 이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에우세비오는 자신의 저서 [교회사] 제4권 에서 에바리스토는 8년간 교황직에 있다가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 재위 12년에 선종했다고 기록하였다. 에바리스토는 로마에 거주하는 사제들에게 로마 시내 교회 25곳을 분배하였으며, 일곱 명의 부제들로 구성된 부제단을 조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에바리스투스가 교황으로 재위하던 기간 동안의 업적에 대해 정확하게 기록된 문헌들은 그리 많지 않다. 현재 알려진 바에 의하면 교황은 로마 시내에 있던 25개 본당을 구역에 따라 교구로 분할하였으며, 각 교구에 명칭을 부여하고 일정 수의 본당을 관할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당시 신자들의 수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신자들의 관리를 위해 필요하였던 조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교황은 6명에게 사제품을 주었고, 5명에게 주교품을 또한 2명에게는 부제품을 주었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교회 초기의 일곱 부제의 직분에 따라서 7명의 연장 사제들에게 각 교구를 관할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의 사망에 대해서도 다양한 기록들이 존재한다. 즉 에우세비우스(Eusebius)의 “연대기”(Chronographia)에는 성 에바리스투스가 9년 동안 로마의 주교직에 재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연대 교황표”에는 10년 간 재직하였다고 나타난다. 또한 순교자 명부에 의하면, 그는 9년 3개월 동안 로마의 주교로 재임하였다고 한다. “리베리오 교황표”에는 13년 10개월 동안 교황으로 재직하였다고 한다.

 

에바리스토는 순교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로마 순교록》에는 순교자라는 칭호를 붙이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순교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가 없다. 에바리스토는 바티칸에 있는 초대 교황 성 베드로의 무덤 옆에 안장되어 있다.

 

초대교회의 교황이었던 성 에바리스투스(또는 에바리스토)에 대한 기록은 희박할 뿐만 아니라 문헌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나타난다. 이레네우스(Irenaeus)에 의하면, 성 에바리스투스 교황은 성 클레멘스 1세(Clemens, 11월 23일)를 계승하여 교황직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으나, “리베리우스 교황표”와 다른 문헌들은 성 아나클레투스(Anacletus, 7월 13일) 교황 다음에 위치시키고 있다.

 

6. 알렉산데르 1세(Alexander 1)

 

교황 알렉산데르 1세(라틴어: Alexander I, 이탈리아어: Alessandro I) A.D. 105년/107년 - A.D. 115년/116년)이다.

 

알렉산데르 1세는 트라얀 황제 8년에 교황으로 제위되었고 하다리안 황제 3년에 순교했다.

 

알렉산데르 1세는 정화의 의미에서 소금과 물을 석어서 또는 포도주와 물을 썩어서 성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하드리안 치세 때에 헤르마스와 함께 그 휘하에 있는 1.5000명이 개종시켰다고 하고 알렉산데르가 1세가 투옥된 감옥 간수인 노이스 퀴리노와 그의 딸 발비나가 개종했고 이들을 후에 성인으로 시정되었다고 한다.

 

알렉산데르 1세는 불로 살을 태우는 고문을 당한 후 참수형으로 순교했고 당시 비안 노벤티나의 7번째 이정표에 매장되었다가 A.D. 834년에 독일 바이에르 주 프라이징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7. 식스토 1세(Sixtus I)

 

교황 식스토 1세(라틴어: Sixtus I, 이탈리아어: Sisto I)는 제7대 교황(재위: 115년/116년 - 125년)이다. 식스토(라틴어로 여섯 번째라는 뜻)라는 이름에 걸맞게 실제로 그는 성 베드로 이후 여섯 번째 교황이다. 하지만 성 베드로까지 포함하면 일곱 번째 교황에 해당되기 때문에 식스토라는 이름은 사실 적합하지가 않다.

 

식스토 1세의 재위기간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교황청의《교황청 연감》(A.D. 2012년판)에 의하면 식스토 1세의 재위기간을 A.D. A.D. 117년 또는 A.D. 119년부터 A.d. 126년 또는 A.D. 128년까지로 기록되어 있다. 《리베리오 교황표》에서는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치세에 속하는 A.d. 117년부터 A.D. 126년까지로 기록하고 있다. 에우세비오는 자신의 저서 《연대기》에서 식스토 1세가 A.D. 114년에서 A.D. 124년까지 교황으로 재위하였다고 기록하였지만, 또다른 저서 《교회사》에서는 조금 다른 교황 목록표를 인용하면서 A.D. 114년부터 A.D. 128년까지 재위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모든 공신력 있는 문헌들과 증언자들은 식스토 1세가 약 10년간 재위하였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식스토 1세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법령을 제정하였다.

첫째, 성직자가 아닌 사람은 미사 때 사용하는 제구를 절대로 만져서는 안

된다.

둘째, 교황에게 소환당한 주교들은 자신의 교구로 돌아갔을 때 교황의 증명

서한을 교구민들에게 제시하지 못할 경우에는 영접을 받지 못한다.

셋째, 미사 중에 상투스를 집전 사제와 회중이 함께 노래로 부른다.

 

식스토 1세는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확실하지 않으며, 그의 유해는 대부분의 선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초대 교황인 성 베드로의 무덤 인근에 안장되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알반 버틀러에 의하면, 교황 클레멘스 10세가 성 식스토 1세의 유해 가운데 일부를 레츠 추기경에게 주었으며, 레츠 추기경은 자신이 받은 성 식스토 1세의 유해를 로렌의 생미셸 수도원에 안치했다고 한다.

사후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4월 3일이다

 

8. 텔레스포로(Telesphorus)

 

교황 텔레스포로(Telesphorus)는 A.D. 125년 - A.D. 137년에 재위한 사람이다. 그의 재위기간은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치세와 겹친다. 텔레스포로는 그리스 혈통으로서 오늘날 이탈리아 칼라브리아 주 테란노바다시바리에서 태어났다.

《교황 연대표》에 따르면, 텔레스포로는 교황이 되기 전에 은수자였다고 전해진다. 이레네오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모든 이단에 반대하여》 3권 3.3), 텔레스포로는 ‘영광스러운 순교’를 했다고 한다. 물론 《교황 연대표》에서는 초기 교황 대부분을 순교자로 기록하였지만, 텔레스포로는 그보다 훨씬 이전 시기에 이레네오에 의해 순교자의 칭호를 받은 첫 번째 교황이다.

 

텔레스포로는 예수 성탄 대축일 전야 미사를 제정하고, 예수 부활 대축일 날짜를 주일(일요일)로 제정하였으며, 예수 부활 대축일 전 7주간을 사순 시기로 지정하였고, 미사 중에 대영광송을 노래로 부를 것을 지시하였다고 전해진다.

 

2세기 말엽 예수 부활 대축일에 관한 논쟁이 있었던 때에 이레네오가 교황 빅토르 1세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교황 텔레스포로는 유대인의 과월절 절기에 따라 평일이 아니라 주일에 예수 부활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였다고 증언하였다. 하지만 빅토르 1세와는 달리 텔레스포로는 이러한 전통을 따르지 않는 기독교 공동체와도 교류하며 지냈다.

 

가르멜회에서는 성 텔레스포로 교황을 수도회의 수호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성 텔레스포로가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에 가르멜 산에서 은수 생활을 했었다는 일부 문헌의 기록 때문이다.

 

캐나다 퀘백 주 남서부 지방에 있는 마을 생텔레스포르는 바로 성 텔레스포로 교황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9. 히지노(Hyginus)

 

히지노는 A.D. 136년/138년 - A.D. 140년/142년)dp 재위한 교황이다. 히지노는 그리스어로 ‘건강한’이란 뜻이다.

 

히지노는 아테네 태생의 그리스인이었으며, 성직자가 되기 전에는 철학자로 있었다. 전승에 따르면, 히지노는 성직자들의 각종 특권을 제정하고 교계제도를 설정했다고 전해진다.

 

히지노는 처음으로 물질을 악으로 취급하는 영지주의에 대항해서 싸운 것으로 알려졌다. 영지주의자 발렌티누스가 교황 히지노 시대에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 아니체토가 선출될 때까지 활동했다고 한다. 또 다른 영지주의자이자 마르키온의 스승인 케르도 역시 교황 히지노 시대에 로마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영지주의 이단자들은 자신들이 이단에 빠졌음을 시인하고 종래의 주장을 철회함으로써 다시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있었지만, 나중에는 결국 다시 이단에 빠져서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축출되었다.

 

히지노가 순교 했다고 하나 순교자로서 선종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확인된 바가 없다. 히지노의 시신은 바티칸 언덕에 있는 초대 교황 성 베드로의 무덤 인근에 안장되었다. 사후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1월 11일이다.

 

10. 비오 1세(Pius 1)

 

비오(Pius)는 ‘경건한’이란 뜻이다. 비오 1세는 1세기 말엽에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아퀼레이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다.《교황 연대표》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루피누스(Rufinus)’라고 하며, 역시 아퀼레이아 태생이라고 한다.

 

비오 1세는 《헤르마스의 목자》의 저자인 헤르마스와 형제 사이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헤르마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자신이 과거에 노예 신분이었다고 고백하였다. 이를 근거로 헤르마스와 비오 1세는 본래 노예였다가 해방되어 자유민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오 1세는 2세기 중엽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치세 동안 교회를 이끌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예수 부활 대축일은 오직 주일(일요일)에만 거행되어야 한다는 지시를 내렸다고 전해진다.

 

비오 1세는 또한 산타 푸덴치아나 성당을 건립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 성당은 오늘날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가운데 하나이다.

 

비오 1세는 재위기간 내내 힘겨운 시기를 보냈다. 왜냐하면 그가 교황으로 있을 당시 로마에서는 성 유스티노가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는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발렌티누스와 케르돈, 마르키온 등의 영지주의를 신봉하는 이단자들이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큰 문제를 일으켰으므로 비오 1세는 발렌티누스, 케르돈, 마르키온 등을 단죄하며 그들을 파문하였다.

 

비오 1세가 로마에서 순교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는데, 그 이유는 성무일도의 초기 판본에 그가 순교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1969년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인 달력이 개정될 때 조사한 바에 의하면, 비오 1세가 순교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순교자라는 칭호를 제거하였다.

 

11. 아니 체토(Anicetus).

 

교황 아니체토는 A.D. 155년 - A.D. 166년)dp 재위한 교황이다. 그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정복되지 않은(ἀ-νίκητος)’이라는 뜻이다. 로마 제국의 시리아 속주 에메사(오늘날의 홈스)에서 태어났다.

 

이레네오의 증언에 따르면, 사도 요한의 제자인 스미르나의 주교 폴리카르포가 예수 부활 대축일의 날짜를 고정시키기 위하여 로마로 가서 교황 아니체토를 만났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짜에 관하여 두 가지 관행이 공존하였다. 폴리카르포가 속해 있던 스미르나 교회는 유대교에서 초봄의 만월인 니산 14일에 과월절을 지내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와 동일한 날을 예수 부활 대축일로 기념하였던 반면에, 로마 교회는 과월절 당일 일요일 또는 과월절 다음 일요일에 예수 부활 대축일로 거행했던 것이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교황 아니체토와 폴리카르포 주교가 만나서 서로 다른 동·서방 교회의 예수 부활 대축일 날짜의 통일안을 의논하였다. 그 만남은 대단히 우호적이었지만 결국 합의를 이루어내지는 못하였다. 그렇지만 아니체토는 폴리카르포와 스미르나 교회의 관행을 존중하기로 하였으며, 폴리카르포 역시 로마 교회의 관행을 존중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이러한 논쟁은 이후 다음 세기에서는 더욱 격화되었다.

 

기독교 역사학자 헤제시포 또한 아니체토 교황 재위기간 중에 로마를 방문하였다. 이와 같은 방문들은 초창기부터 로마 주교좌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로 인용되곤 한다.

 

아니체토는 몬타누스주의를 금지함으로써 이단을 단죄한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 또한 그는 영지주의와 마르키온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교황 연대표》에 따르면, 아니체토는 성직자들에게 머리카락을 짧게 깎으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반면에 폴리카르포 등 동방 교회에서는 영지주의자들 때문에 긴 머리카락을 고수하였다.[1]

 

2세기 로마의 사제 가유스에 따르면, 목수 아나클레토가 세운 초대 교황 베드로의 무덤 기념비는 교황 아니체토의 것으로 밝혀졌고 현대의 발굴에 따르면 그 기념비는 2세기에 만든 것으로 드러났다.

 

아니체토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로마 제국의 공동 황제였던 루키우스 베루스의 치세 때에 순교를 했다고 전해지지만,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할 수 있는 역사적은 근거는 아직까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아니체토가 선종한 날짜는 4월 16일, 4월 17일 그리고 4월 20일 등이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오늘날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정식으로 채택한 축일은 4월 17일이다.

 

아니체토는 몬타누스주의를 금지함으로써 이단을 단죄한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 또한 그는 영지주의와 마르키온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교황 연대표》에 따르면, 아니체토는 성직자들에게 머리카락을 짧게 깎으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반면에 폴리카르포 등 동방 교회에서는 영지주의자들 때문에 긴 머리카락을 고수하였다.

 

12. 소테르(Soter)

 

소테르(Soter)라는 이름은 ‘구원자’ 또는 ‘해방자’를 뜻하는 그리스어(σωτήρ)에서 유래하였지만, 그의 출생지는 오늘날 이탈리아의 캄파니아 주 폰디이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기간인 A.D. 166년에서 A.D. 174년까지 교황직을 수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소테르는 성직자가 주재한 혼인만을 성사성이 유효한 혼인으로 인정하였으며, 예수 부활 대축일을 로마 교회의 연례행사에 정식으로 포함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소테르는 코린토의 디오니시오는 가난하고 쫓기는 신세가 된 그리스도교도들에 대한 자선과 애덕을 실천한 로마 교황 소테르에 대해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전임 교황 아니케투스와 마찬가지로 예언과 엄격한 도덕 규율을 지나치게 강조한 이단설 몬타누스주의를 비판했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전해지지 않지만, 순교자로 존경을 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초기 교황들 모두 순교자로 여겨졌기 때문에 《로마 순교록》도 이와 같은 추정을 받아들여 순교 혹은 순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는 말을 덧붙였지만, 소테르에 대해서만은 순교에 관하여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A.D. 1969년 전례력이 개정되면서 소테르와 카이오가 순교자라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는 판단 아래 순교자라는 칭호는 최종적으로 사라졌다

 

13. 엘레우 테리온(Eleutherius)

 

교황 엘레우테리오sms A.D. 174년/ A.D. 175년~A.D. 189년에 재위한 교황이다. 엘레우테리오는 ‘자유로운’, ‘솔직한’이라는 뜻이다.

 

엘레우테리오는 히분디우스의 아들로 그리스인으로 오늘날의 그리스에 해당하는 로마 제국 아카이아 속주에 속한 에피루스의 니코폴리스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헤제시포가 증언한 바에 의하면, 엘레우테리오는 교황 아니체토 밑에서 부제로 봉사하였으며 교황 소테르 밑에서도 그를 보좌하다가 A.D. 174년 소테르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몬타누스주의는 처음부터 이단으로 분류되어 정통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축출당하지는 않았다. A.D. 177년 몬타누스주의자들 때문에 큰 소요를 겪은 리옹의 기독교 신자들은 아시아 공동체와 프리기아의 교회 공동체는 물론 교황 엘레우테리오에게도 몬타누스주의의 문제를 판단하고 중재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편지 내용은 리옹의 기독교도들은 몬타누스주의에 반대하기는 하였지만, 교회의 일치를 호소하며 인내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로마에서는 영지주의자들과 마르키온주의자들이 가톨릭교회를 비방하는 설교를 공공연하게 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교황 엘레우테리오는 몬타누스주의자들에게 회심을 촉구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고 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아마도 엘레우테리오가 상황을 세심하게 파악하고 철저하게 조사하면서 오랫동안 고심한 끝에 결국 몬타누스주의자들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로 결심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교황 엘레우테리오를 통해 브리타니아 왕 루키우스가 개종한 사실이다. 엘리우레티 교황은 브리타니아의 왕 루키우스에게 권유함으로써 그로부터 “나는 교황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교도가 되기를 희망한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고 설명하면서 그가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기독교 신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엘레우테리오는 죽어 바티칸 언덕에 있는 초대 교황인 성 베드로의 무덤 인근에 안장되었고 기록하고 있다. 나중에 그의 유해는 판테온 근처에 있는 산 조반니 델라 피그나 성당으로 이장되었다가, A.D. 1519년 교황 식스토 5세의 누이 카밀라 페라티의 요청에 따라 산타 수산나 성당으로 최종적으로 이장되었다.

 

14. 빅토리오 1세(Victorus 1).

 

빅토리오는 로마 제국의 아프리카 속주에서 태어난 최초의 교황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렙티스 마그나(또는 트리폴리타니아)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ㅂㄱ토르 1세는 A.D. 189년 성 엘류테리우스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되었으며 교회에서 로마 교회의 권위를 드높인 사람으로 칭송된다.

 

빅토리오 1세는 A.D. 189년에서 A.D. 198-199년까지 교회를 다스렸다. 모든 자료들은 빅토르 1세가 10년간 교회를 통치했다고 주장하나 교황 연대표에는 9년을 주장하고 있다.

 

교황 빅토리오 1세 재임 기간 중에 원래는 법률학자였으나 195년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던 테르툴리아노가 중요한 진술을 남겼다. 그는 베드로의 우위성이 그리스도의 약속에 따른 우위성(마태 16, 18)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장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아울러 베드로의 권한은 전통과 계승을 통하여 결합되어 있는 모든 교회에 위임되었다고 하였다. 비록 베드로가 전체 교회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로마 교회는 베드로와 아주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로마 주교의 수위권은 예수의 약속에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이 인정받게 되었다.

 

그는 부활 축일을 둘러싼 논쟁에서 소아시아의 주교들에게 로마의 교회처럼 부활 축일을 같은 기간에 거행하라고 권위 있게 명령함으로써 로마 주교의 우위권을 정착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소아시아의 주교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부활 축일을 고집하자, 빅토리오 1세 교황은 그들에게 파문의 처벌을 내릴 것이라고 위협했으며 실제로 파문의 처벌을 내렸다.

 

처음으로 로마의 주교 인명록을 작성했던 리옹의 이레네오는 교황 빅토리오 1세의 이러한 조치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왜냐하면 이레네오는 이러한 조치를 취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 문제는 교의적인 문제가 아닌 전례적인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교황권에 대한 이레네오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이레네오는 다른 교회에 비해서 로마 교회의 우위성을 매우 강하게 강조하였고, 그래서 모든 교회들은 사도적 전통이 있는 로마 교회와 일치해야 할 것이라고 요구했다.

 

빌토르 1세는 부활절 축일 통일을 주장한 사람이다. 당시 소아시아 교회에서는 유대인의 유월절 전날인 유대인 달력 니산 달(3월) 제14일을 (주중의 무슨 요일이든 상관없이) 예수 부활 대축일로 기념하였는데, 그 이유는 예수의 십자가형이 과월절 축제 전의 금요일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반대로 로마를 포함하여 서방 교회에서는 니산 달 제14일 다음 주일을 예수 부활 대축일로 기념하였다. 예수 부활 대축일을 고정시키기 위하여 모든 주교가 로마에 모여 회의를 한 후 주일에 지키도록 합의를 보았으나 에페소스의 폴리크라테스가 주도하는 소수의 주교들은 이에 반대하였다. 빅토르 1세는 폴리크라테스를 파문하고 관계를 끊으려고 하였으나 여러 주교들, 특히 이레네오의 주장을 받아들여 회의를 조용히 끝냈다. 이레네오의 주장은 십사일 준수는 이름 있는 여러 교회가 초창기부터 지켜 온 관습이므로 이를 강제로 폐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빅토르 1세의 의지는 처음으로 로마의 영향을 다른 지역에 미치려는 움직임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빅토르 1세는 양자론자였던 비잔티움의 테오도투스를 단죄하기도 하였다.

 

15. 제피리노(Zephyrinus).

 

제피리노는 로마 태생으로 하분디우스의 아들이었으며, 17년 동안 교황으로 지냈다. 그의 재위기간 중에 교회에 대한 심한 박해가 일어나 A.D. 211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치세 동안(193년 ~ 211년) 로마 제국과 기독교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A.D. 202년 또는 A.D. 203년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기독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 포고령을 선포하였다. 이 포고령은 로마 신민들의 기독교로의 개종을 엄격하게 금지하며, 이를 어길 시에는 강력하게 처벌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박해는 로마보다는 주로 지방에서 심하게 일어났다. 제피리노는 박해받는 신자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었다. 또한, 그는 새로이 나타난 이단과 배교에 맞서 기독교를 수호하였다. 그가 상대하였던 적수들은 영지주의 자들인 마르키온, 프락세스, 발렌티누스, 몬타누스주의자 등이었다. 성 옵타토의 증언에 의하면, 이들은 모두 교황 제피리노에 의해 제압당하였다고 한다

 

제피리노는 테오도투스의 사상을 추종하는 이단자 두 명과 격렬하게 토론하였으며, 처음에는 제피리노를 경멸하였던 이단자들도 나중에는 그를 그리스도의 신성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라고 부르며 칭송했다고 한다. 비록 그는 신앙을 위하여 순교했다고 전해지지는 않지만, 재위기간 중에 겪었던 영적 고통을 이유로 훗날 ‘순교자’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제피리노는 죽은 후에 시신이 성 갈리스토 카타콤바에 묻혔다는 기록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제피리노의 축일은 본래 8월 26일이었지만, A.D. 1970년 전례 개혁 이후로는 12월 20일로 이동하였다.

 

16. 갈리스토 1세(Calitus 1)

 

교황 갈리스토 1세(Callistus I)는 제16대 A.D. 217년 - A.D. 222년/223년에 제위한 교황이다. 그의 재위기간은 로마 황제 엘라가발루스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재위기간과 겹친다. 사후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10월 14일이다.

 

갈리스토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과 적대적 관계였던 로마의 히폴리토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갈리스토는 도미티우스의 아들로서 본래 황족인 카르포포루스의 노예였다고 한다. 그는 은행업에 종사하였는데, 종종 자금을 가지고 기독교도 가운데 미망인이나 고아들한테 구호금을 보냈다. 그러나 갈리스토는 채권자들에게 빌린 돈을 실수로 분실하자 겁을 먹고 로마를 빠져 나와 도망갔지만, 포르투스 근처에서 생포되었다. 갈리스토는 병사들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배의 갑판 위에서 뛰어내렸지만, 결국 붙잡혀 그의 주인에게 끌려 갔다고 전해진다. 채권자들은 그가 다시 돈을 되갚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갈리스토의 석방을 탄원하였다. 결국 갈리스토는 석방이 되기는 하였지만, 유대인들로부터 돈을 차용하고 빚을 수금하려고 할 때 유다교 회당에서 싸움이 일어나 결국 다시 체포되었다.

히폴리토의 증언에 따르면, 갈리스토는 공금 횡령 및 기독교도라는 죄목으로 기소되어 노동형을 구형받아 사르데냐 탄광으로 보내졌다. 갈리스토는 기독교 사제 히야친토의 부탁을 받은 콤모두스 황제의 유명한 정부(情婦)인 마르치아의 도움으로 4년 만에 풀려났다. 이때 갈리스토의 건강이 너무 허약해져서 기독교 형제들은 그의 쾌유를 위해 안티움으로 보냈으며 교황 빅토르 1세는 특별히 그에게 연금을 주었다.

 

갈리스토는 교황 제피리노에 의해 부제로 서품받은 후에 아피아 가도 방향에 있는 지하 묘지 카타콤바의 관리인이 되었다. 3세기에 아홉 명의 교황이 갈리스토 카타콤바에 매장되었다. 이곳은 1849년 고고학자 조반니 바티스타 데 로시에 의해 발굴되었다.

 

제피리노의 뒤를 이어 교황 좌에 오른 갈리스토는 먼저 죄를 사면하는 교회의 권한을 강조하여 비록 배교자라도 뉘우치면 용서하여 속죄 행위를 하지 않았을 지라도 다시 교회 안에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은 갈리스토 1세의 지원으로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세기에 이 성당은 재건되면서 산 갈리스티 엣 율리아니 성당(Ss Callixti et Iuliani)으로 개칭하였으며, 12세기에 교황 인노첸시오 2세에 의해 수호성인이 성모 마리아로 새로 지정되어 봉헌되면서 오늘날의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으로 최종 개칭되었다.

 

갈리스토 1세는 A.D. 222년경 민중 반란 때 우물 안에 던져져 순교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충분히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로마의 한 사제가 우물에 던져진 갈리스토 1세의 시신을 밤중에 몰래 거두어서 매장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행각이 발각된 사제는 결국 붙잡힌 후 테베레 강에 수장되어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갈리스토 1세의 시신은 아우렐리아 가도에 있는 칼레포디우스 공동 묘지에 묻혔고 순교자 열전의 기록에 따라 10월 14일로 순교자 축일로 정해졌다. 9세기부터 오늘날까지 갈리스토 1세의 유해는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에 안치되어 보관되고 있다.

 

17. 우르바노 1세(Urbanus 1)

 

교황 우르바노 1세는 A.D. 222년/223년 - A.D..230년에 제위한 교황이다. 그는 폰티아누스의 아들로서 로마 태생으로 교황 갈리스토 1세가 순교하자 그 뒤를 이어 교황이 되었다.

 

우르바노 1세 생애의 대부분은 베일에 싸여 있기에 각종 전설과 잘못된 정보들이 덧붙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위기간의 날짜가 명확히 알려진 최초의 교황이다. 우르바노 1세의 재위에 대한 정보가 현재로서는 에우세비오가 쓴 《교회사》와 갈리스토 카타콤바에 있는 우르바노 1세의 비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가톨릭교회의 성무일도서에 수록되었던 영적 독서에 의하면, 성 우르바노 1세가 많은 사람을 기독교 신자로 개종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고 한다. 그 중에는 티부르티우스와 그의 형제이자 성녀 체칠리아의 남편인 발레리아누스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성 우르바노 1세가 기도하자 이교의 우상이 무너져 내리는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다는 전승도 전해져오고 있다.

 

우르바노 1세는 로마 황제 엘라가발루스의 치세 때부터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치세 때까지 교황으로 재위 기간에 이 3황제가 기독교에 대해 호의를 표하며 박해를 가하지 않았기에 재위기간 동안에는 기독교인들이 비교적 순탄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한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로마 제국을 통치하는 동안 다른 황제의 치세에 비해 상대적으로 누린 자유 덕분에 로마 교회는 급격하게 성장하였으며, 이는 곧 우르바노 1세가 탁월한 목자라는 신망까지 얻는 것으로 이어졌다. 우르바노 1세는 미사 중 신자들이 예물을 바칠 것을 지시했다고 전해진다.

 

수세기 동안 우르바노 1세는 순교했다고 믿어져 왔다. 하지만 최근의 역사학적 발견들에 근거하여 오늘날 학자들은 그가 자연사했다고 보고 있다.

 

18. 폰시아노(Pontianus)

 

교황 폰시아노(Pontianus)는 제18대 교황은 A.D. 230년- A.D. 235년에 재위했다.

로마 제국의 새 황제 막시미누스 트락스는 선대 황제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와는 달리 기독교에 대하여 강경한 정책을 펼쳤다. 교황 폰시아노는 대립 교황 로마의 히폴리토와 함께 체포된 후 로마에서 추방당하여 사르데냐 광산에서 광부로 노역하며 유배 생활을 보냈다.

 

유배형을 선고받은 폰시아노는 베드로 좌의 공백을 하루속히 메우기 위해 A.D. 235년 9월 28일에 스스로 교황직에서 물러났다. 유배지에서 폰시아노는 히폴리토와 화해 하므로 로마 교회의 분열은 종식되었다. 폰시아노와 히폴리토는 모두 끝내 살아서 로마로 돌아오지는 못하였다. 폰시아노는 A.D. 235년 10월에 죽었다.

 

A. D. 236년 혹은 237년 교황 파비아노에 의해 폰시아노와 히폴리토의 시신이 모두 로마로 운구되어 아피아 가도에 있는 성 갈리스토 카타콤바의 교황 납골당에 안장되었다. 폰시아노 교황의 무덤 석관은 A.D. 1909년 발굴 조사에서 발견되었다.

 

19. 안테로(Anterus)

 

안테로는 A.D. 235년 - A.d. 236년에 재위한 교황이다. 오늘날 칼라브리아 주 페틸리아폴리카스트로 에서 로물루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스 출신인 것으로 보이며 그의 이름을 볼 때 해방된 노예였을 가능성도 있다. 안테로는 폰티의 기독교도 주민들을 위하여 그곳의 교구장 주교를 서임한 적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교황 안테로가 순교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안테로는 생전에 교황 클레멘스 1세가 등용한 사서들이 작성한 순교자들의 행적 등을 수집하여 그것을 엄격하게 조사하라고 지시하다가 막시미누스 트락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 시대를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에 대해 또다른 학자들은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으며, 비록 기독교 박해 기간 중이었지만 별 탈 없이 선종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안테로 교황은 선종한 후에 아피아 가도에 있는 성 갈리스토 카타콤바의 교황 납골당에 시신이 안장되었다. 무덤의 위치는 1854년 데 로시에 의해 발견되었다. 좁다란 장방형 석판에 그리스어가 새겨진 비문 조각도 함께 발견되었는데, 무덤을 막고 있었던 석판에는 그리스어로 주교라는 뜻의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그의 유골은 캄푸스 마르티우스의 성 실베스테르 성당으로 이장되었는데 A.D. 1595년 11월 17일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성당을 재건하면서 발견되었다.

 

20 파비아노(Fabianus).

 

파비아노는 A.D. 236년~A.D. 250년에 재위한 교황이다. 에우세비오가 쓴 《교회사》에는 파비아노가 어떻게 교황으로 선출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있다. 본래 파비아노는 평신도였지만, 새 교황을 뽑기 위한 선거가 실시되는 동안 하늘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내려와 파비아노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고 한다. 이를 본 사람들에게는 그 모습이 마치 예수가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을 때 성령이 비둘기의 모습으로 하늘에서 나타나 내려온 모습과 같이 보였다. 누가 새 교황으로 적합한지를 하느님이 자신의 뜻을 밝힌 것이라고 여긴 그들은 그 자리에서 파비아노를 안수를 통해 사제와 주교로 연이어 서품하고 새 교황으로 등극시켰다고 전해 내려온다.

 

파비아노는 필리푸스 아라브스와 그의 아들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여러 카타콤바를 많이 건축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 중에는 성 갈리스토 카타콤바 안의 교황 납골당도 포함되어 있었다. 교회 조직을 개편하였으며, 순교자들의 목록을 등재하는 서기들을 임명했다고도 전해진다.

 

또한, 파비아노는 로마 황제들의 연이은 박해로 기독교 공동체가 점차 사라져가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갈리아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그곳으로 선교사들을 파견하였다고 전해진다. 파비아노의 지시에 따라 가시아노, 트로피모, 나르본의 바오로, 사투르니노, 디오니시오, 아우스트레모니오, 마르티알리스 등 일곱 명의 주교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갈리아를 향해 떠났다. 그리고 사르데냐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난 전임 교황 폰시아노와 히폴리토의 시신을 로마로 가져와 성대하게 예를 갖춘 후 성 갈리스토 카타콤바에서 장례 미사를 집전하였다.

 

파비아노는 데키우스 황제 치하의 기독교 박해시기에 순교하였는데, 가장 먼저 죽임을 당한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파비아노의 시신은 성 갈리스토 카타콤바에 안장되었다가 나중에 교황 클레멘스 11세에 의해 산 세바스티아노 푸오리 레 무라 성당 안의 알바니 경당으로 이장되었다. 그리스어로 새긴 그의 비문은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

 

댓글 14

best 킹시티 작성자 2020.09.12. 15:05
다음편은 21~40까지 생각중
킹시티 작성자 2020.09.12. 14:46
(참고)16대분에 사진은 아직 못구함 ㅠㅠ
댓글
킹시티 작성자 2020.09.12. 15:05
 피카츄Alter
맞지 근대 다음편도 있다는거 참고!
댓글
best 킹시티 작성자 2020.09.12. 15:05
 Bleoh
다음편은 21~40까지 생각중
댓글
Bleoh 2020.09.12. 15:08
 킹시티
아예 연재글로 하셔도 좋을거 같아요
현 교황님이 266대시니까..ㅎㅎ..
댓글
킹시티 작성자 2020.09.12. 15:25
 Bleoh
그거까지 할려면 최소 2주 ㄷㄷ
댓글
Bleoh 2020.09.12. 16:10
 킹시티
천천히 하셔도 좋을거에요!
댓글
킹시티 작성자 2020.09.12. 15:25
 안유진
다른 블로그랑 제 개인적인으로 읽고있는 성경을 참조해서 쓴거라
댓글
안유진 2020.09.12. 15:31
 킹시티
그럼 연재글로 처리해드리면 되나요?
댓글
킹시티 작성자 2020.09.12. 15:32
 안유진
네넵 그렇게 해주신다면 져야 고맙네요 ㅠ
댓글
RED-DEVILS 2020.09.12. 16:52
이런거 궁금했었는데 감사합니다
댓글
킹시티 작성자 2020.09.12. 17:18
 RED-DEVILS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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