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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축구 칼럼/프리뷰/리뷰 팬들은 악역을 기꺼이 떠맡는 감독을 원한다[발롱도르~]

한국 국가대표팀이 2023 카타르 아시안컵에서 맞이한 결말은 나에게 충격이 아니었다. 짧다면 짧지만 국가대표팀의 경기로서는 이미 데이터가 누적된 상태였다. 그래서 4강까지 간 것도 나의 예상을 한참 벗어난 성취였다. 4강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여러 축구 관련 전문가와 인터넷 방송인의 분석과 논평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축구에 대한 견문과 지식이 아직 턱없이 부족한 일반 팬이기 때문에, 굳이 세세한 분석을 더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 결국 이 글에서 전달하고 싶은 말은 그런 수많은 분석과 논평에서 나온 결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감독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국가대표팀만 보고 하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감독만 보고 하는 말도 아니다. 무슨 뜻인지 차근차근 풀어보자.

 

프로란 무엇인가. 영어의 프로페션(profession)과 프로페셔널(professional)을 찾아보면 종교적 의미가 먼저 나온다. 수도자의 맹세를 뜻하는 라틴어 프로피테리(profiteri)가 그 어원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며 이 낱말은 특화된 기술 혹은 지식을 사는 동안의 업으로 삼거나 그로써 돈벌이를 하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2023년 K리그 시즌 도중 갑자기 서울의 감독대행을 맡게 된 김진규는 축구 팬이라면 대부분 공감할 만한 말을 선수들에게 했다고 한다. "우리 선수들의 동기부여는 25일 월급날이다. 프로 선수가 동기부여란 단어를 꺼내면 안 된다. 돈 많이 받고 경기장에 나서는데 무슨 동기부여가 필요한가? 승리를 통해 화난 팬들의 마음을 돌리는 게 선수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이다. 유감스럽지만 김진규 정도의 직업윤리(work ethic)를 갖고 임하는 자들이 생각보다 적을지도 모른다.

 

한때 K리그에 '병수볼' 신드롬을 몰고 왔던 김병수는 훈련 방식으로 선수들에게 호평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김병수가 공식적으로 실시하는 훈련의 시간은 짧았다. 그 짧은 시간에 대기시간이 길지 않게 하면서 선수들이 흥미를 느끼게 훈련을 진행했다는 것이다. 다만 그 결과를 본다면, 특히 2023년 수원에서는 그리 좋지 않았다. 내부 사정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는 일개 팬의 추측이라 100% 타당하지 않을 수 있음을 전제하고, 떠오르는 몇 가지 문제점을 진술하자면 이러하다. 첫째, 감독의 전술이 상대의 전력을 극복하기에 부족했다. 둘째, 감독이 전술을 구현하기 위해 받쳐줘야 할 선수의 기본적 체력과 기술의 수준을 과대평가했다. 셋째, 감독이 체력과 기술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선수의 노력 혹은 의지를 전반적으로 과대평가했다.

 

조금씩 드러나는 과거의 조각들을 모아보면 위에 언급한 것 중 셋째가 결코 허황되지 않은 듯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선수의 자율적 훈련을 중시하던 김병수마저 9월부터 훈련의 강도를 높였다는 것은 당시 부상으로 출장하지 못하여 팬들의 원성을 사던 정승원의 해명에서 밝혀진 바이다. 김병수 경질 이후 감독대행이 된 염기훈이 진행한 훈련도 고강도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팬들의 분노와 원망 속에서 정식 감독이 된 염기훈에게는 2024년의 성과가 절실하다. 염기훈은 최근 인터뷰를 통해 이번 1차 동계 훈련은 오래 뛰었던 선수들도, 자신도 강했다고 느낄 만큼의 강도로 진행했다고 밝혔다. 이 말은 제법 중요한 것들을 암시하고 있다. 첫째, 염기훈이 수원에서 현역으로 뛰던 시절의 훈련 강도가 높지 않았다. 둘째, 감독이 된 염기훈은 (선수 시절과 달리) 훈련을 비롯하여 여러 측면에서 기강을 강하게 잡는 것을 정답으로 여기고 밀어붙이고 있다. 이병근, 김병수, 염기훈을 거치며 기강이나 정신력에 대한 발언이 꾸준히 나오는 것은 수원에 '정신력 타령'이라 취급하기 어려울 정도의 정신적 혹은 문화적 문제가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한 문제에서 예외인 선수가 분명히 있었으리라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가 과연 K리그 수준이 떨어져서 나타나는 것일까? 전혀 아니다. 잉글랜드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보라. 그 팀의 팬들은 허구한 날 알렉스 경(Sir Alex)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물론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무지막지한 폭력이라고 볼 수 있지만, 알렉스 퍼거슨은 '헤어드라이어'로 슈퍼스타들의 기강을 잡았다. 역대 축구감독 중 최상위권이라 할 만한 퍼거슨의 전술적 적응력과 대응력을 무시할 수 없지만, 팬들이 '헤어드라이어'의 위용을 그리워하는 순간은 많을 수밖에 없다. 최근 10년 사이 얼마나 잡음이 많았던가. 폴 포그바, 로멜루 루카쿠, 제이든 산초, 마커스 래시포드. 슈퍼스타들이 줄줄이 잡음을 일으키는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26년 동안 퍼거슨 한 사람만 감독으로 썼던 맨 유나이티드는 2013년부터 2023년까지 10년 동안 데이비드 모예스, 루이 판 할, 조세 무리뉴, 올레 군나르 솔샤르, 에릭 텐하흐까지 정식 감독만 무려 5명을 썼다. 중간의 라이언 긱스, 랄프 랑닉 같은 감독대행 혹은 임시감독까지 포함하면 7명이다. 그 사이 우승 트로피는 판 할의 FA컵 1회, 무리뉴의 리그컵 1회 및 유로파리그 1회, 텐하흐 때의 리그컵 1회 등 4개였다. 팀의 세계적 명성에 걸맞지 않는 성적을 거두고 있는 상황이다. 딱히 돈을 적게 쓰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덤이다.

 

요한 크루이프는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에 호마리우를 다스렸다. 지네딘 지단은 레알 마드리드 감독 시절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다스렸다. 펩 과르디올라는 식단마저 관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물론 모두가 퍼거슨처럼 가부장적 지도를 택할 필요는 없다. 카를로 안첼로티는 덕장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선수들이 편하게 생각하는 감독이지만 빅이어를 여러 차례 들어올렸다. 그러나 기강과 전술은 반드시 잡아야 한다. 한쪽만 잡으면 임무 실패 확률이 높아진다. 안첼로티의 덕망은 선수들의 충성심을 끌어냈고, (자주 저평가되곤 하는) 전술은 선수들의 능력 활용을 극대화했다.

 

팽팽하거나 느슨하거나를 떠나서 제대로 된, 정상(頂上) 반열에 오른 축구감독이라면 이렇게 한다. 큰 틀을 짠다. 적절한 대형과 간격을 찾는다. 선수들에게 확실한 역할을 알려준다. 상황이 바뀌고 문제가 생기면 벤치에 안주하지 않고 테크니컬 에어리어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전술 변화를 지시하거나 선수들을 독려한다. 막상 보면 정점을 뜻하는 정상이 아니라 보통을 뜻하는 정상(正常)에 가깝다. 결과를 떠나서 이렇게 일하는 감독을 기대하는 것이 과분하다면 도대체 왜 축구를 프로의 일이라 하고, 수많은 스폰서를 유치하고, 뭇사람은 몇 년을 일해도 벌 수 없는 돈을 연봉으로 아무렇지 않게 쥐어준다는 말인가?

 

특정 국가의 최상위권 리그에 진입하는 축구선수는 어린 시절 축구선수로 발들인 수많은 사람 중 1%도 채 되지 않는다. 관심은 언제나 그들을 따라다녔다. 프로에 진입하는 순간, 그리고 조금씩 경력과 성과가 쌓일수록 연봉도 올라간다. 그 연봉은 축구에 입문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선망할 만한 수준이 되기도 한다.

 

축구감독은 이런 선수들을 지휘하는 자리이다. 그 자리의 호칭이 매니저인지 헤드코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선수들을 하나의 팀으로 묶어내고 구단과 팬이 기대하는 성과를 내놓는 것이 축구감독의 직분이다. 원 팀(one team)이 되지 못하면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 슈퍼스타가 많아서 원 팀이 되는 것이 아니다. 감독이 좋은 선수 출신이라서, 슈퍼스타라서 원 팀이 되는 것이 아니다. 때때로 감독이 원 팀을 만드는 것을 어떤 의미로든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 대체로 깜냥도 되지 않는 주제에 '프런트볼'을 추진하는 자들이 악의 축이다. 하지만 감독의 책임이 면제될 수는 없다. 악의 축이 전폭적으로 지지한 감독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확실한 이유를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자유 혹은 자율이라는 미명으로 방임이 옹호되는 세상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그 결과는 일부 MZ세대 스스로도 MZ라고 부르기까지 하는, 하지만 MZ에서 태동했는지 의심스러운, 무질서와 무개념의 만연이다. 최소의 도의와 원칙이 무너진 폐허에 배려와 희생이 자리할 것이라는 기대는 허무맹랑한 낙관을 넘어 심각한 오판이다. 도의와 원칙을 세우고 그 토대 위에서 사람들에게 임무를 배분하고 그것을 달성하게 만드는 것은 필요하지만 지난한 일이다. 이런 일은 점점 기피되고 있다. 일 벌이면 귀찮아지니까, 괜히 사람들과 사이 불편해지니까, 이러쿵저러쿵 구설 오르고 민원 생기면 짜증만 나니까. 그래서 '좋은 사람' 코스프레가 강제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의 사회적 결과를 보고 있노라면 종종 들어왔던 말들이 생각난다. "애는 착해", "사람은 좋아", "대답은 잘해", 이런 말들은 끝까지 들어봐야 아는 조선 말의 대표적 사례들이다. 그리고 듣는 사람이 자연인으로서가 아니라 프로로서 이런 말을 듣는다면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리고 부끄러움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2023 카타르 아시안컵의 한국 국가대표팀 이야기로 돌아가자. 전례 없는 관심과 기대를 받으며 선수들이 부담을 느꼈을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예상보다 힘겹게 진행되던 경기들에 선수들이 피로를 느꼈을 수 있다. 그래서 이따금 선수들의 인터뷰가 투정처럼 들려도 크게 책망할 마음은 없다. 물론 그라운드 위에 올라온 순간만큼은 선수들이 한계는 보였을지언정 최선의 노력은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이 크다. 그런데, 그러나, 그렇지만, 한 사람에 대해서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이름값이 아니라, 조금 시간이 지난 과거의 고점이 아니라, 지금 최상의 기량을 발휘할지 아니면 추구하는 전술에 최적일지를 따지면서 선수단을 구성했는가? 대회 도중 발생하는 기량 저하, 부상, 출장 정지 등 변수에 대해 적절한 변화를 통해 대응했는가? 일부 특출한 개인의 역량에만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경기 운영을 준비했는가? 이 모든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사람 좋은 웃음으로 '좋은 사람' 행세나 하고 있는 꼴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달콤한 연봉과 효도관광을 즐기는 집무 태도를 크게 바꿀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나 안 나갈 건데?" 수준의 발언을 하며 자리를 지키려는 꼴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

 

팬들이 원하는 감독은 '좋은 사람'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 좋겠지만 그것이 우선순위는 아니다. 그렇다고 팬들이 '악인'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팬들은 선수를 다스리고 키우는 일에 필수 불가결한 '악역'을 기꺼이 맡을 감독을 원한다. '악역'은 도의와 원칙을 세우고 선수들을 담금질하고 때로 다그쳐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악인'이 아니라 '악역'으로서 해야 한다. 과거의 슈퍼스타, 현재의 슈퍼스타, 잠재적 미래의 슈퍼스타까지 다스리고 그들을 원 팀으로 만들어서 그라운드 위에 내보내야 한다. 연기에 야심이 있거나 연기력에 자신 있는 배우는 악역을 마다하지 않는다. 좋은 축구감독이라면 '악역'을 제대로 해내야 한다. 이것은 종목을 불문하고 비슷할 것이다. 팬들은 '악역'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제대로 된 프로선수를 만들고 그들로 성과를 내는 프로감독을 보고 싶다. 이것이 국적을 불문하고 어느 리그에 대해서도 어느 대표팀에 대해서도 과분한 기대라면, 그것을 프로로 인정하고 대접해야 하는지부터 다시 논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추신 : 아, 또 한 사람에 대해서도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애써 만들어놓은 정상적 절차를 무시하고 국가대표팀 감독을 선임한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우려할 만한 전과를 갖고 있는 사람을 그렇게 절차를 무시하면서까지 선임한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 한국 축구계 전체를 고사 위기로 내몰았던 승부조작 관련자 사면을 추진하고도 아랫사람들 잘라낸 뒤 입 꾹 다물고 있는 꼴은 이제 와서 새삼 끄집어봐도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댓글 3

깐풍기 2024.02.07. 15:43
글 존나 맛있게 잘쓰시네요 잘읽었습니다
댓글
stupidmc 2024.02.07. 17:00
벤투가 그리움
본인이 퇴장당하는 불상사더라도 희생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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