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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정보/칼럼 축구칼럼 토탈풋볼의 두 거장 - 上[발롱도르~]

0. 토탈풋볼의 주인은 누구인가

 

토탈풋볼은 무엇인가. 많은 축구팬들에게 토탈풋볼은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아마 토탈풋볼이란 말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토탈풋볼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또 별개의 말이다. 많이 쓰이는 용어이지만, 정작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토탈풋볼에 대한 이야기가 나름대로 많이 오가곤 하는데, 오늘은 조금 다른 화두를 던져보겠다. 토탈풋볼의 주인은 누구인가?

 

많은 사람들에게 토탈풋볼의 창시자로 불리는 인물, 리뉘스 미헬스. 아약스와 네덜란드, 바르셀로나에서 큰 성공을 거두면서 동시에 자신의 철학을 팀에 심었고, 그 철학의 핵심 아이디어는 전세계로 퍼져나가 현대 축구의 근간이 되었다. 축구의 역사를 그의 전과 후로 나눌 수 있을만큼 그 영향력이 엄청난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미헬스에 비해 비교적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역사에 남을 명장으로 기억되는 동시대의 또 하나의 천재가 있으니 그가 바로 에른스트 하펠이다. 축구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에른스트 하펠이라는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그의 놀라운 업적과 능력에 비해서 인지도는 낮지만 그래도 여러 전문가와 매체들에 의해 역대 최고의 명장 반열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그럼 하펠은 어떤 인물인가? 축구 팬들이 보통 하펠에 대해 떠올리는 이미지는 바로 '여러 국가를 돌아다니며 트로피를 안겨준 우승 청부사'이다. 그러나 그 말로는 그의 위대함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 또한 흔히 하펠은 미헬스와 동시대의 라이벌 관계로 여겨지는데, 그들의 관계는 단순히 라이벌이라는 말로 정의하기 어렵다.

 

하펠이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 그리고 알려진 내용조차도 실제와 괴리감이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하펠의 조용한 성격으로 인한 것이 상당히 크다. 그는 열정적으로 설전을 펼치는 달변가가 아니었고 다른 지도자들과 전술에 대해 토론하고 교류를 나누는 사교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자신의 생각을 정립하고 그것을 선수들 가까이에서 전해주는 고독한 지략가에 가까웠다.

 

그러한 이유로 하펠이 남긴 족적은 축구사에 제대로 새겨지지 않았고, 그에 대한 과소평가와 동시에 주로 미헬스의 것으로 여겨지는 토탈풋볼에 대한 작은 오해를 낳았다.

 

아마도 오늘날 축구팬들의 상당수는 토탈풋볼을 미헬스가 만들어낸 독자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

은 미헬스가 홀로 개발해낸 것이 아니다. 미헬스와 하펠은 네덜란드에서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직접 혹은 간접적인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이것은 각자의 철학을 전술적 실체로 구현해내는 과정에서 필수적이었다. 심지어 토탈풋볼로 알려진 전술의 형식(포메이션)을 미헬스보다 먼저 주력으로 사용한 인물이 바로 하펠이다. 혹자는 아예 미헬스를 하펠의 모방자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에 걸쳐 네덜란드 축구의 광명을 이끈 미헬스의 아약스와 하펠의 페예노르트, 이 두 위대한 팀의 경쟁 구도와 두 명장이 서로 주고받은 영향, 잘 알려지지 않은 하펠의 업적에 대해 재조명할 것이다. 토탈풋볼은 한 천재의 독자적인 발상이 아닌, 두 천재의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한다.

 

먼저 두 팀이 발전하는 과정을 훑어보면서 그들의 전술이 어떻게 변화하고 토탈풋볼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알아볼 것이며, 두 감독의 성향을 비교하며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글이 매우 긴 관계로, 세 편으로 나누어 업로드할 계획이다.

 

 

 

 

차례

 

0. 토탈풋볼의 주인은 누구인가

1. Totaalvoetbal

2. 리뉘스 미헬스, 이상에 가까이 다가가다

3. 에른스트 하펠의 마법

4. 리뉘스 미헬스와 12사도, 영광의 아약스

5. 가장 아름다운 라이벌

6. 토탈풋볼의 두 거장

 

 

 

 

1. Totaalvoetbal

 

선수들이 지속적으로 위치를 바꾸며 팀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시스템을 말한다. (명확한 정의는 아니다. 애초에 토탈풋볼에 대한 정의가 따로 있는게 아니다. 필자의 관점에서 최대한 명료하게 설명하고자 해서 쓴 문장이다.)

 

'Total'이라는 단어를 통해 '다 같이 공격하고 다 같이 수비하는 것'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며 간단하고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핵심은 '위치를 바꾸는 것', 즉 스위칭이다.

 

위치를 바꾸는 것은 선수가 고정된 포지션에서 뛰는게 아니라 다른 포지션의 영역으로 이동해서 뛰는 행동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주로 다른 선수와 위치를 교환하는 스위칭 플레이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스위칭. 보통은 두 선수가 서로 위치를 교환하는 것을 말하지만 여러 선수가 얽혀서 연쇄적으로자리를 옮기는 것도 스위칭이라고 볼 수 있다. 한 선수가 위치를 옮기면 다른 선수가 그 선수의 빈 자리를 메우고, 그렇게 생긴 새로운 빈 자리는 또 다른 선수가 메운다. 이런 식으로 한 선수의 이동이 팀 전체의 움직임을 유도하는 것이 팀 단위의 스위칭이다.

 

 

축구사에서 Proactive Football(능동적 축구)라고 불린 팀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공통적으로 크고 작은 스위칭을 자주 활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술적인 선택지가 비교적 다양하지 않았던 20세기 중반까지는 대부분의 팀들이 고전적인 2-3-5 기반 포메이션과 맨 마킹 위주의 수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뛰어난 공격진을 갖추고 스위칭 플레이를 통해 그 공격수들의 개인 역량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상대의 맨 마킹을 따돌리는 전략이 큰 효과를 보았고 그 팀들은 역사적인 강팀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수비라인 뒤에 리베로(또는 스위퍼)라고 불리는 최종 수비수를 배치하여 뒷공간을 커버하는 카테나치오가 잠시 유럽 대륙의 지배자로 떠오르며 스위칭과 능동적 축구는 잠시 힘을 잃은듯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고전적인 축구의 틀을 깨버리고 아예 팀 단위의 스위칭을 극대화하며 팀 단위로 움직이는 집단 맨 마킹 자체를 무력화시켜버린 것이 바로 토탈풋볼이다. 토탈풋볼의 핵심 아이디어를 알려면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출발해야한다. 초점이 '사람'에서 '공간'으로 이동한다.

 

공격할 때는 스위칭을 통해 대인 방어 체계를 무너뜨리고 열린 공간을 파고들어가며, 수비할 때는 공간을 압박하여 공을 탈취하거나 상대의 잘못된 선택을 유도하는 것이 이 진보의 핵심적인 아이디어가 된다. 여기서 공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팀 퀄리티의 열쇠가 되는 것은 자명하다. 공수 양면에서 공간을 잘 공략해야한다.

 

즉, 공격할 때 아군이 넓은 공간을 사용하고, 수비할 때 적이 좁은 공간을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목적이다. 넓은 공간일수록 상대를 끌어내서 뒤를 허물기 유리하고, 좁은 공간일수록 상대를 가두고 압박하여 숨통을 끊기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간을 통제한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했던 것은, 혁명을 위해서는 2-3-5 또는 WM 포메이션과 집단 맨 마킹이 주를 이루던 고전적인 체계에서 벗어나야만 했다는 것이다. 아군과 상대를 일대일로 매칭시킬 수 있는 공수 5:5의 선수 배치가 주류이던 시대에서, 경기장을 최대한 넓게 쓸 수 있고 필요에 따라 좁힐 수 있는(상대보다 넓은 공간을 활용하고 때때로 필드를 제한하기 위해서) 대안을 찾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 가능성을 비춘 것이 4-2-4 포메이션이다. 이것은 현대적인 포백의 시초이자 빠른 공격을 무기로 하는 굉장히 능동적인 시스템이며, 기존의 시스템에서 볼 때 자신과 포메이션이 다르기에 1대1로 맨 마킹을 붙이기 어렵다. 브라질과 일부 포르투갈 클럽들이 이 4-2-4를 채택하여 크게 성공을 거둔 이후로 이는 점차 대중화되기 시작했고 네덜란드에도 이 4-2-4를 받아들인 팀들이 많았다. 그래서 혁명의 불씨가 네덜란드 땅에서 피어오른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특히 아약스는 영국 출신 감독 잭 레이놀즈와 빅 버킹엄의 영향으로 '패싱 게임'의 뿌리가 이미 심어져있었기에, 능동적인 축구의 DNA가 갖춰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공격적인 4-2-4 포메이션을 쓰던 1965년의 아약스에, 한 남자가 부임한다. 그가 아약스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다음 장에서 보도록 하자.

 

 

 

 

2. 리뉘스 미헬스, 이상에 가까이 다가가다

 

네덜란드 최고의 명문 클럽 중 하나인 아약스는 1960년 이후로 리그 우승을 하지 못하며 암흑의 기운이 감돌았다. 특히 1964-65시즌에는 심각한 부진으로 리그 16개 팀 중 13위를 차지하며 강등을 겨우 면하는 위기를 겪었다. 어두웠던 시즌이 끝난 후 다음 시즌을 앞두고, 아약스의 공격수 출신 지도자인 리뉘스 미헬스가 새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아약스의 감독으로 부임한 리뉘스 미헬스

 

 

미헬스는 훗날 '토탈풋볼'로 불리게 될 자신의 철학을 클럽에 심으려고 노력했다. 그의 철학은 감독의 전술만으로 실현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이론상 완벽에 가까운 선수들이 11명 있어야 비로소 전술을 필드 위에 구현할 수 있는 것이고, 미헬스는 그 완벽에 가까운 선수단을 만들기 위해 선수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킴과 동시에 수준 미달로 판단되는 선수는 과감하게 내치고 수준 높은 선수를 영입하며 스쿼드 전력을 향상시키고자 했다.

 

그 신호탄으로 미헬스는 부임 첫 시즌에 3명의 주요 선수를 영입하며 야망을 드러냈다. 2년 전인1963년에 팀을 떠난 2명의 공격수인 헹크 흐로트와 코 프린스를 복귀시켰고, PSV에서 리그 수위급 골키퍼로 이름을 날리던 헤르트 발스를 영입했다. 흐로트와 프린스는 1962-63 시즌까지 아약스의 주전 공격수로서 활약했다가 시즌 종료 후 각각 페예노르트와 카이저슬라우테른(독일)으로 떠났는데, 미헬스는 이 둘의 공백이 부진의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하여 부임과 동시에 다시 데려온 것으로 추측된다.

 

 

영입한 자원들과 기존의 주축 자원들이 잘 어우러지며 미헬스의 축구는 순항하기 시작했다. 1964년부터 아약스의 공격수로 활약한 클라스 누닝하는 새 감독의 부임과 경쟁자들의 합류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주전으로 나서며 꾸준히 득점을 책임져줄 수 있는 선수로 거듭났다. 특히 양쪽 윙어인 피트 케이저르와 스야크 스바르트는 사이드 플레이와 컷인 플레이를 모두 능숙하게 구사하며 4-2-4 시스템이 원하는 윙어의 모습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당연하게도 양쪽 풀백인 테오 판 다위펜보데와 빔 쉬르비어 역시 오버래핑으로 공격을 지원해야했다.

 

그리고 지난 시즌에 1군에 데뷔하여 리그 10경기 4골을 기록한 유망주 요한 크라위프를 더 중용하기 시작했다. 크라위프는 미헬스가 추구하는 축구를 필드 위에 구현할 수 있는 이상적인 재능이었으며 공격수로서의 기량 또한 매우 뛰어났다. 그렇게 아약스의 투톱은 4명의 공격수가 번갈아 출전하며 긍정적인 경쟁을 이어나갔고, 덕분에 크라위프는 1965-66시즌 리그 19경기 16골, KNVB컵 4경기 9골을 기록하며 18세의 나이에 유럽 최고의 초신성 중 하나로 부상하였다.

 

크라위프의 빠른 성장세 덕에 수준급 공격수들이 많이 갖춰지자, 아예 흐로트를 미드필더 중 한 자리에 기용하며 극단적인 공격 전술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 경우 과거의 2-3-5 포메이션처럼 기본적으로 5명의 선수가 공격에 참여하는 형태가 나왔고, 흐로트의 중원 파트너는 1950년대부터 아약스에서 뛰고 주장을 역임한 적도 있었던 베니 뮐러였다.

 

 

아약스의 주포였던 헹크 흐로트

 

 

수비에서는 주전 스위퍼 프리츠 수테카우가 뛰어난 수비력과 리더십을 인정받아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미헬스의 축구에서 중앙 수비의 한 자리는 스위퍼가 담당했는데, 이 스위퍼는 기본적인 수비와 함께 수비 라인을 지휘하고 빈 공간을 커버하면서도 팀의 공격 상황에서는 전진하여 공격을 지원하는 매우 고난이도의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공격 도중 팀이 상대방에게 공을 빼앗겼을 때는 라인을 올려서 아군이 강한 압박을 시도하게끔 하며 오프사이드 트랩을 발동하여 역습을 차단해야했다. 체력과 축구 지능, 수비 스킬이 모두 갖춰져있지 않으면 해낼 수 없는 역할이다. 스위퍼 수테카우의 파트너로는 톤 프롱크가 주전 스토퍼로 나섰다. (프롱크는 점점 배리 훌쇼프에게 자리를 내준다.)

 

-중앙 수비수의 역할을 ‘스위퍼’와 ‘스토퍼’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분류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봐야 한다. 그러나 우선 이 글에서는 관용적인 표현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스위퍼’와 ‘스토퍼’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미헬스 체제 초기, 아약스의 주전 스위퍼이자 주장이었던 프리츠 수테카우

 

 

공수를 아울러서 미헬스의 지시 사항들이 착실하게 실행되어갔고, 자연스레 더 좋은 퀄리티의 경기력이 나오게 되었다. 그 결과 1965-66시즌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영광의 서막을 알렸다. 그러나 이들은 더 이상 네덜란드의 왕좌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유럽의 왕좌였다.

 

바로 다음 시즌인 1966-67시즌에도 아약스는 자신들의 야망을 드러내며 리그와 KNVB컵, 유로피언 컵에서 모두 압도적인 페이스를 보여줬다. 경기의 모든 단계에서 팀 전원이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쉴틈없이 몰아치는 “토탈풋볼”은 큰 효과를 보았다.

 

 

어쩌면 미헬스가 꿈꾸던 이상은 이미 실현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2명의 미드필더 중 한 자리에 본래 공격수로 뛰는 헹크 흐로트를 배치하여 전방과의 더욱 잦은 스위칭으로 득점 찬스를 만들어내고자 했고, 이것은 일반적인 4-2-4 포메이션보다 더 많은 스위칭을 창조할 수 있는 효과를 낳았다. 또한 5명의 공격수를 기용하여 공격 상황에서 기본적인 수적 우위를 갖출 수 있는 WM 포메이션과 특징을 공유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두 포메이션의 혼합은 '빠르고 포지션에 얽매이지 않으며 팀 전체가 하나로 돌아가는 공격 축구'라는 자신의 의도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미헬스의 기묘한 아이디어였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과연 이게 최선인가? 분명 미헬스의 철학은 옳다. 선수 기용에도 문제가 없고, 필드에서 선수들이 감독의 철학에 맞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선수들의 배치에는 다른 대안이 없나? 미헬스가 사용한 포메이션이 그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이상에 도전할 수단으로 적합한지에 대한 검증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는 역사의 문 앞에서 증명해야 할 시기인 것이고, 그를 위한 시험대는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다. 이제 우리는 미헬스의 포메이션이 과연 이론상 모든 상대를 완벽하게 압도할 수 있는 방법인지에 초점을 맞추어서 아약스의 행보를 계속 살펴보면 된다.

 

 

어찌됐건 시즌을 순조롭게 시작한 아약스는 리그와 KNVB컵에서는 그 페이스를 시즌 끝까지 유지하며 구단 역사상 최초로 더블을 달성했다. 특히 리그에서는 122골을 득점하며 에레디비시 단일 시즌 팀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을 갈아치웠고, 요한 크라위프는 33골로 득점왕에 오르며 네덜란드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했다.

 

 

아약스와 네덜란드 최고의 스타가 된 요한 크라위프

 

 

그리고 무엇보다 유로피언 컵에서의 행보에 주목해야한다. 아약스는 2라운드(16강)에서 리버풀을 만났는데, 홈에서 열린 1차전을 5-1로 대승하고, 2차전 안필드 원정에서 크라위프의 멀티골로 2-2 무승부를 기록하며 합산 스코어 7-3으로 준준결승에 진출했다. 특히 1차전의 대승은 암스테르담에서의 혁명을 당시 유럽 축구계에 알리는 큰 사건이었다.

 

8강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강호 두클라 프라하를 만났는데, 1차전에서는 스바르트의 골로 1-1 무승부를 거두었지만, 2차전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역시 스바르트의 골로 1-1이 유지되던 상황이었으나 경기 종료를 얼마 남기지 않은 87분, 주장 프리츠 수테카우가 자책골을 넣으며 패배하고 말았다.

 

그렇게 미헬스호의 첫 유로피언 컵은 다소 허망하게 끝이 났다. 탈락의 원흉으로 지목된 수테카우는 최고의 팀을 만들고자 하는 미헬스의 야망에 미치지 못하는 선수로 간주되어 시즌이 끝나고 짐을 쌌다. 그 수테카우의 뒤를 이어 주전 스위퍼 자리를 차지한 선수가 바로 후에 아약스 최초의 외국인 주장이 되는 벨리보르 바소비치다.

 

 

바소비치는 미헬스가 원하는 그림의 큰 퍼즐 조각이었다. 넓은 영역을 커버하고 수비 라인을 지휘하며 오프사이드 트랩을 구사하는 아약스의 스위퍼 롤에 바소비치는 이상적인 선수였다. 바소비치가 주전 스위퍼 자리를 차지하면서 아약스의 도전은 더 안정적으로 이루어졌다. 1967-68시즌에도 리그를 우승하며 구단 역사상 최초로 리그 3연패를 달성했다.

 

 

아약스의 후방 지휘관 벨리보르 바소비치

 

 

1968-69시즌은 아약스가 그토록 원하던 유럽 챔피언에 가장 근접한 시기였다. 유로피언 컵에서 뉘른베르크, 페네르바체, 벤피카, 스파르타크 트르나바를 차례로 꺾고 결승전에 진출했다. 대신 리그와 KNVB컵에서는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며 우승을 놓쳤다. 그래도 그들의 오랜 숙원인 유럽 챔피언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워졌다.

 

아약스에게 남은 마지막 관문은 바로 이탈리아의 AC 밀란이었다. 밀란은 이 당시의 전술적인 진보는 아약스보다 덜했지만, 역사가 깊어 오래 전부터 팀 단위 전술을 강조했던 이탈리아 축구계를 대표하는 명문 팀 답게 조직력이 뛰어났으며 선수 개개인의 클래스는 아약스보다 국제 무대에서 더욱 검증되어 있는 팀이었다. 크라위프의 등장 이전에 유럽을 강타한 천재 플레이메이커 지안니 리베라의 존재감도 컸다.

 

이에 맞서는 아약스의 라인업은 지난 몇 년간 지속적으로 다져온 최상의 전력을 그대로 이어간 것이었다. 미헬스 체제 초창기와 이 당시의 아약스 사이에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크라위프의 투톱 파트너로 스웨덴 출신 공격수 잉게 다니엘손을 기용하였다는 것, 그리고 원래 센터백으로 출전하던 톤 프롱크를 라이트 하프로 올려서 레프트 하프 헹크 흐로트가 공격에 가담해도 팀 밸런스가 더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게 하였다는 것, 프롱크를 포지션 변경시킨 빈 센터백 자리는 신예로서 좋은 성장세를 보여준 배리 훌쇼프가 차지하였다는 것 정도였다.

 

그렇게 많은 관심 속에서 치러진 경기는 밀란의 4-1 대승으로 다소 싱겁게 끝났다. 밀란의 레프트윙 피에리노 프라티는 해트트릭을 기록했으며, 센터 포워드 안젤로 소르마니가 한 골을 더했다. 아약스는 바소비치가 페널티킥으로 한 골을 만회했으나 필드골은 넣지 못하며 다소 허무하게 유럽 대항전 첫 결승전 도전을 마감했다. 무관이었다.

 

 

아약스의 숨통을 끊은 AC 밀란의 공격수 안젤로 소르마니

 

 

아약스는 여기서 큰 벽을 실감했다. 자신들이 유럽 축구계에 돌풍을 몰고왔지만, 오랫동안 세계 최고 수준의 무대에서 최고 자리를 두고 경쟁해온 팀과 맞붙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직접 체감했다. 대신 아약스는 여기서 좌절만 하지는 않았다. 이 때의 패배는 이후의 성공을 촉진시킨 각성제처럼 작용했다.

 

 

미헬스 체제 아약스의 1기는 여기서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제부터 미헬스는 다시 한 번 새로운 변화를 추구할 것이며, 그 시작은 대대적인 선수단 물갈이였다. 그는 자신이 여전히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믿었기에 자신의 전술을 수정하기보다는 선수들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쪽을 택했다.

 

 

미헬스 체제 초기, 아약스의 베스트11

 

 

대표적으로 레프트백 테오 판 다위펜보데는 페예노르트로 떠났고 유스 출신의 수비수 뤼트 크롤이 그 뒤를 이었다. 센터백 톤 프롱크는 배리 훌쇼프에게 점점 밀려나며 수비형 미드필더로 보직을 옮겼으나 1969년을 끝으로 백업으로 전락했고 결국 훗날 아약스를 떠나 위트레흐트로 이적한다.

 

베테랑 미드필더 베니 뮐러는 노쇠화로 인한 기량 저하로 주전에서 밀려났다. 앞서 말한 톤 프롱크가 뮐러를 대신해서 잠시 하프백으로 뛰었으나, 프롱크마저 팀을 떠나자 아약스는 고 어헤드 이글스에서 네덜란드 최고 수준의 미드필더로 떠오른 니코 레인더르스를 영입했다.

 

 

미헬스의 부름을 받아 아약스로 이적한 젊은 천재 미드필더 니코 레인더르스

 

 

헹크 흐로트가 치명적인 부상으로 은퇴하며 공백이 생긴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에는 폴렌담 출신의 재능 있는 플레이메이커 헤리 뮈렌을 기용했다. 이렇게 뮈렌-레인더르스 체제로 중원의 세대 교체를 한 번 진행하였다.

 

확고한 주전의 자질이 있는지에 대해 계속된 의심을 받아왔던 클라스 누닝하 또한 서브 멤버로 밀려났다가 마침내 대숙청을 피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누닝하를 밀어내고 주전 공격수로 활약한 스웨덴산 용병 잉게 다니엘손마저 숙청의 대상이 되어, 준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영입 한 시즌만에 방출되는 수모를 겪었다.

 

미헬스가 단순히 공격진의 교통 정리를 넘어서서 크라위프를 제외한 중앙 공격수를 모두 갈아치운 것은 바로 당대 에레디비시 최고의 스트라이커였던 디크 판 데이크를 영입하기 위해서였다. 트벤테 소속의 판 데이크는 1968-69시즌 리그에서 30골로 득점왕에 올랐고, 아약스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트벤테의 5-1 대승을 주도했다. 이 경기로 인해 판 데이크를 향한 아약스의 러브콜이 본격적으로 촉발되었다. 결국 시즌이 끝나고, 여름 이적시장에서 판 데이크는 아약스의 선수가 된다.

 

 

큰 기대를 받으며 아약스에 입단한 스트라이커 디크 판 데이크

 

 

여러 포지션에서, 만족스러운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선수들을 전부 내치고 그 자리를 리그 최고수준의 선수들로 대체했다. 가히 네덜란드 판 분노의 영입이라고 봐도 무방한 행보였다. 팀의 코어 멤버들은 그대로 유지한 채, 부족한 포지션들은 유스를 중심으로 젊은 선수들을 수급하여 자연스러운 세대 교체를 이뤄내고, 밀어낼 선수들은 가차없이 내치며 빅 네임이 필요하다면 그에 맞는 빅 사이닝을 했다. 모범적인 리툴링 과정이었다.

 

그렇게 파격적인 여름 이적시장을 보낸 아약스는 다시 네덜란드의 패권을 잡고 유럽의 왕좌를 노리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탄탄한 선수단을 갖춘 페예노르트, 크라위프와 라이벌 구도가 있었던 당대 네덜란드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인 빌리 판 데르 카윌런이 이끄는 PSV 에인트호펀과 함께 네덜란드 3강 체제를 이루었으나, 아약스가 이들보다 확연히 더 강한 전력을 구축하는데에 성공했기에, 아약스를 향한 기대치는 더 높았다.

 

그러나 이 때 페예노르트에 또 하나의 전설적인 감독이 부임했다. 이때까지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이 남자가 미헬스보다 먼저 유럽의 왕이 될 줄은. 

 

 

 

 

블로그 원문 

https://red-archive.tistory.com/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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