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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글챌린지 한국의 서양 콤플렉스, 러시아의 서양 르상티망 - 박노자

약 20년 (?) 전의 일이었습니다. 제가 오슬로에서 한 한국 관련 학회의 회의를 호스팅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회의에 나오신 연구자 분 중의 한 분은 한국 지역 연구의 한 원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발표 제목은, 제가 보기에는 너무나 이상하게 들렸습니다. "노벨상 받기 위한 한국의 바람직한 전략"을 가지고 발제하려 하신 것이었죠. 저는, 노벨상 "받아내기 전략"이란 과연 학술 토론의 주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그 때 의문을 표시한 바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그 원로 분과 나름 친해져, 서울에서도 몇 번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그 분은 서구에서 오랜 유학 시절을 보낸 바 있었는데, "우리 민족에게 평화상 이외에 노벨상이 없다"는 게 그에게 거의 개인적인 "한"에 가까웠습니다.

이 "한"이란 결국 구미권으로부터 "충분한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데에 대한 불만족, 일종의 "서양 콤플렉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1876년 이후의 서양의 "엄습" 이전에는 조선인들은 그들이 그 당시에 생각했던 "세계의 중심", 즉 북경과의 관계에 있어서 충분히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청나라는 "호인", 즉 만주족의 나라인 만큼 조선인들이 보기에는 정통 중원 왕조와 격이 일단 달랐고, 거기에다 조선의 성리학 연구 수준이나 조선 사대부들의 한시 작시 능력, 추사 김정희 같은 대가들의 서예의 수준이나 금석문에 대한 감식안 등은 청나라에 결코 뒤지지 않았습니다. 한국 선비들이 북경에 드나들었을 때에 아무리 "번국" 출신이라 해도 머리를 크게 숙일 일이라고 없었습니다.

한데 1876년 이후에는 "세계의 중심"은 갑자기 바뀌었습니다. 동아시아의 지역적 중심은 이제 동경이었지만, 새로운 "천하"의 중심은 런던이나 파리, 아니면 뉴욕이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우수성"에 대한 확인을 받자면 그 수단은 뉴욕이 선망할 만한 경제 성장이나 과학, 기술, 아니면 뉴욕에서 통할 만한 미술이나 영어로 번역되어 소비될 수 있는 성질의 문학 등이었습니다. 물론 스포츠도 새로운 "중심"에서 "인정"을 얻을 수 있는 주요 수단 중의 하나이었습니다. 온건 민족주의자 손기정도, 손기정을 백림에 출정시킨 중도 좌파의 몽양 여운형도 1936년의 "히틀러의 올림픽"에 대해 하등의 환상은 없었습니다.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달려야 한다는 사실도 뻔히 알고 출정을 결정한 것이죠. 그래도 그렇게 해서 "세계 만방", 무엇보다 서구에 "우리의 우수성"을 과시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1차적으로 중요했습니다. 손 선수의 금메달 소식을 듣고 경성의 길거리에서 환호했던 수만 명의 대중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순간은 조선이 "세계의 중심"에서 드디어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 기다리고 기다렸던 순간이었습니다.

평화상 이외의 노벨상 수상의 꿈 등이 아직 남아 있어 조금 그렇지만, 한국인의 이 "서양 콤플렉스"는 사실 1990년대말 이후 한류의 전세계적 유행 등으로 거의 충족됐습니다. 요즘 같으면...북구에서 대학 레벨에서 일어를 배우려는 신입생보다 한국어를 배우려는 신입생들이 대개 3-4배나 더 많다는 소식을 들어도 국내 분들이 그렇게까지 환호할 일도 없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듣곤 합니다. 한국이 구미권에서 "최고 인기의 나라"가 됐다는 것은 이제 주지의 사실이 된 거라서 과거의 열등감은 어쩌면 차라리 우월감으로 바뀐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와 비교하면 러시아의 역사적 궤적은 어떤 면에서는 비슷하고 어떤 면에서는 아주 다릅니다.

러시아도 주변부 국가로서 역사적으로 계속 "추격형 발전"을 해왔습니다. 9세기 이후는 러시아라는 주변부 국가로서 선망해야 할 "중심"은 비잔틴의 콘스탄티노폴리스이었고, 또 13세기 중반부터 또 하나의 중심은 카라코룸 (哈拉和林), 즉 세계적인 몽고 제국의 수도이었습니다. 한데 비잔틴도 몽고 제국도 다 역사의 뒤안길로 가고 나서, 약 16-17세기부터 러시아에게 새로운 중심으로 "서구"가 떠올랐습니다. 이미 16세기부터 러시아는 영국과 네덜란드에 모피나 목재 등의 자원을 수출하고, 그 대가로 총 등 기술 집약적 상품을 수입했습니다. 17세기 중반 이후 서구 장교들이 지휘하는 총사 부대들은 러 군에서 가장 전투력이 좋았습니다. 즉, 피터 1세 서구화 개혁 이전에도 러시아인들은 이미 묵묵히 서구의 "중심성"을 사실상 인정했습니다. 한데 피터 1세 이후로는 "서구 추종"은 그냥 핵심적 국시, 국책이 됐습니다. 제 고향 상트-페티르부르그 근방의 페테르고프 등 18세기 러시아 황제들의 궁전을 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그 모델은 프랑스의 베르사유이었습니다. 러시아 조정에서는 공용어는 불어이었으며,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독어가 강의와 토론의 언어이었습니다. 투르게네프 <아버지와 아들> 주인공 바자로프가 독어 원서로 유물론을 학습하는 것처럼 묘사돼 있는데, 우연은 아니었습니다. 레닌 세대까지만 해도 러시아 혁명가나 개혁가들에게는 독어는 "원어" 격이었던 것이죠. 사실, 러시아에서 서구 언어들이 했던 역할과 조선시대의 한문의 역할은 충분히 비교될 만합니다.

한데 한국의 "서양 콤플렉스"를 충족시키기가 쉬워도 러시아의 "서양 콤플렉스"는 현실적으로 충족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차이는 두 나라 지배자나 유식층의 "야심"의 레벨입니다. 한국의 경우 한국 스튜디오들이 넷플릭스 같은 미국 플랫폼에 콘텐츠를 공급하여 그 콘텐츠가 구미권에서 인기를 누려도 이미 "대만족"입니다. 미국의 지역적인 주니어 파트너로 정상적으로 역할을 해도 "대만족"이고 그 이상의 바라는 바는 어쩌면 "지역적 균형추" 정도 돼도, 그것도 그렇게까지 큰 숙망은 아닌 듯합니다. 한국의 "아류 제국주의"를 종종 거론하지만, 그건 미국의 군사 보호령으로서 미군의 "우산" 밑에서의, 미국의 "본류" 제국주의에 절대적으로 종속적인 제국주의의 모방에 불과합니다. 한미 관계가 아무리 본질상 불평등해도 2022년에 89%의 한국인들이 미국에 "호감"을 가졌습니다. 즉, 한국인의 "서양 콤플렉스"가 요구하는 부분이 "여기"까지라면 그 충족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겁니다.

러시아의 "서양 콤플렉스"란 단순히 "인정"을 받는 데에 그치지 않고 서구 열강 중에서 "1등 열강"으로 군림하고자 하는 것은 그 "콤플렉스"의 중심적 특색입니다. 사실 이 "1등 열강"의 꿈은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승리)이나 1945년 이후에는 수십년간 충족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19세기나 20세기에 기술 후진국 러시아가 계속 영국이나 미국에 기술력이나 생산력에 밀려 결국 그 "1등 열강"의 자리를 내놓아야 했습니다. 러시아 지배자들이 가능만 하면 단순히 "구미권 인정"을 받는 데에 그치지 않고 아예 구미권에 러시아 본위의 "규칙", 아니면 적어도 러시아가 구미권의 규칙을 무시해도 되는 러시아의 "예외성"에 대한 인정을 요구하고, 러시아 식자층은 또 식자층 나름대로 러시아의 "특별한 세계사적 역할"을 여전히 대부분 믿고 있습니다. 한데 이 "세계사적 역할"을 "중심"에서 인정하려 들지 않기에 그 "중심"에 대한 르상티망 (ressentiment), 즉 원한은 또 무시무시합니다. 지금 현실적으로 러시아 군대의 미사일들이 러시아인들의 수백만 명의 친척이나 친지들이 살고 있는 인접 국가 우크라이나를 초토화시키고 있지만, 러시아 지배자나 많은 러시아 교양인들의 머리 속에서는 이 미사일들이 "우리를 감히 존중해주지 않고 있는 오만한 서양"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크라이나에 와 있는 서구 군 고문관이 전사하기만 하면 러시아 언론에서 그 소식을 자랑스럽게 전해주곤 하죠. 한데 동시에 푸틴에 대한 일부 서구 극우 정당 대표자들의 찬사 등도 "특급"으로 대서특필합니다. 서구인 위에서 군림할 수 있는 "스승" 내지 "지도자" 입장이 된다는 것은 푸틴의 가장 큰 숙망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허황한 야망들이 우크라이나에서의 패배로 다 같이 망해버렸으면 가장 좋았을 것이지만,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의 상황으로 봐서는 푸틴 침략군의 완패는 현실적으로 그 가능성이 높지 않습니다. 결국 아마도 앞으로 일련의 지속되는 침략, 침공, 제국주의적 충돌 속에서 수십년 간 수십만 명이나 그 이상의 러시아 평민들이 희생돼야 제국주의적 야망에 대한 "환멸"의 분위기가 러시아에서 본격적으로 정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제국주의적 침략의 끝에 있는 것은 죽음, 파괴, 환경의 피폐화, 그리고 쓰라린 환멸일 뿐입니다. 단, 제국주의적 분위기 속에 침략 전쟁에 "중독"된 이들은, 그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할 뿐이지요...

[출처] 한국의 서양 콤플렉스, 러시아의 서양 르상티망|작성자 박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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