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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글챌린지 몸, 계급의 산물 - 박노자

'몸'을 보는 눈과 '몸'을 대하는 태도는 주지하듯이 시대마다 다릅니다. "개미허리"가 지금 "여체의 미"의 기준처럼 여겨지지만, 조선 시대 같은 경우에는 "아름다운 여성"은 일차적으로 "아이를 잘 낳을 수 있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골격이 건강해 보이고, 엉덩이나 허벅지가 좀 풍만한 여체는 더 선호됐던 것이죠. 조선 시대의 미인들이 "3백" (하얀 치아, 살결, 손)을 추구했지만, 지금 같은 경우에는 선턴이 좀 된, 약간 검은 피부는 오히려 서구에서 "건강미" 차원에서 더 선호될 것입니다. "좋은 몸"의 기준도 시대마다 바뀌지만, '몸'을 대하는 태도도 계속 바뀌어 왔습니다.

동아시아 대륙, 즉 중국이나 조선의 독서인들은 대체로 궁술 이외의 육체적 "움직임"에 대해 좀 소극적인 편이었습니다. "섭생"을 당연히 추구했지만, "섭생"은 대개 식이요법이나 방중술 (성적 밸런스) 차원에서 이해되곤 했죠. 반대로 근세의 서구 귀족들은 굉장히 육체적이었습니다. 역시 "전쟁"을 담당해야 하는, "무사" 계열의 귀족들인 만큼, 자신의 몸을 이용해 다른 몸을 죽일 줄 아는 등 "몸"의 기술에 신경 써야 했습니다. 19세기말까지 보통의 서구 귀족은 사격이나 펜싱 (서구의 劍道) 정도는 기본으로 어린 시절에 익히곤 했습니다. 남성들끼리 서로를 죽일 줄 알아야 했지만, 또 예컨대 여성 파트너와의 무도회에서의 춤을 추는 것도 배워야 했고, 무용에 익숙치 않으면 웃음거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럽 귀족이라면 대개 "기민한", 말 잘 듣는 몸이 "표준"이었는데, 반대로는 18세기까지의 제3계급, 즉 부르주아는 좀 뚱뚱하고 몸을 움직이는 데에 미숙할 수 있었습니다. 뚱뚱한 이유는, 고기 등 담백질이 아닌 빵 류를 지나치게 많이 섭취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귀족과 달리 "몸"이 날렵하지 못한 것은, 어렸을 때부터 검술이나 무용 등을 배울 만한 "여유"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한 마디로는 "남자의 날렵한 몸"은 어디까지나 "지배계급"의 표식이었습니다.

19세기의 부르주아들은, 사회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그 과정에서는 "몸"의 헤게모니도 장악해야 했습니다. 즉, 귀족들보다 "더" 잘 만들어진 몸을 과시해야 했던 것이죠. 그 방법 중의 하나는 나폴레옹 전쟁 시절 이후부터 독일 등지에서 흔해진 소위 기계체조조합 (turnverein)에서 배울 수 있는 "체조"이었습니다. 기계체조, 병식체조 등은, 19세기의 고학력 유산층의 삶에서 요즘의 헬스처럼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죠. 제3계급, 즉 부르주아나 전문가층 등의 합리적인 근대인은, 자신의 몸도 합리적으로 가꿀 줄 알아야 했던 겁니다. 실은, 사회주의 혁명가들도 고학력 유산층의 출신이었다면 대개 에외가 아니었습니다. 레닌도 아령 체조를 잘 했던 걸로 유명하죠. 바로 이 "체조운동"은 개화기 때에 조선까지 급습했습니다. 1896년부터 체조가 조선의 각급 학교 필수 과목이 되어 "개화인"들은 대부분은 어린 시절부터 체육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여학교도, 강도는 덜 됐지만 체조 수업을 하긴 했죠). 1920년에 생긴 조선체육회의 역대 회장들을 보면 최린이나 신흥우 같은 그 당시 명망가들을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1936년 개편 이후 조선체육회의 지도층을 보면 회장과 부회장은 각각 친일 부호인 윤치호와 유억겸이었지만, 이사 중의 한 사람은 온건 사회주의자 여운형이었습니다. 실은 여운형은 권투 등 각종 스포츠를 잘하고, 그 시대의 "몸짱"으로 알려지기도 했죠. 즉, 좌도 우도 "체격이 강한 건강한 근대적 신체"를 열망한 데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죠.

해방이 되고 나서 일면으로는 특히 "여체"에 대한 규제들이 많이 풀렸습니다. 예컨대 1957년의 제1회 "미스 코리아" 미인 대회에서 참가자들에게 요구했던 정도의 신체 노출은, 여성을 "제국의 어머니"로 상정한 일제 강점기의 말기에는 아마도 상상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성의 경우에는, 비록 학교나 군대에서는 체육은 "필수"이었지만, 출세의 사다리는 일차적으로 "학력"으로 이루어졌던 만큼 "몸짱"은 그렇게까지 중요시되지 않았습니다. 1960년대를 생각해보면, 그 시대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신성일-엄앵란 부부의 수영복 사진은 있는데, 신성일에게는 "초콜릿 복근" 따위는 보이지 않습니다. 즉, "몸만들기"를 따로 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죠. 더 재미있는 것은, "몸"을 상당히 중시한 근대의 많은 사회주의자와 달리, "운동권" 시대의 학생 리더들이 대개 "스포츠"의 세계와 어느 정도 담을 쌓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즉 1990년대말까지 학력의 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는, 공식적 루트 (대입 - 고시/재벌기업 입사 - 정계/사회 활동)든 대항적 루트 (대입 - 운동권 입문 - 재야 조직 생활)든 "캐리어"를 추구하는 남성에게는 "몸"보다 두뇌가 훨씬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근대적인 "몸 중시"보다 오히려 조선 시대 독서인들의 상대적인 "몸 경시"가 더 영향을 많이 미친 듯한 풍토죠.

신자유주의화 이후의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미래"가 불투명해지고 대형 서사가 불신의 대상이 되고 모든 것이 다 "개인"으로 환원되는 IMF 이후의 시대에는 개인의 가장 중요한 자산인 신체는 갑자기 평가절상되어버렸습니다. 건강 악화는 노동능력 저하, 그리고 심각한 경제 문제 등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거고, 개인화된 저복지 사회인 한국에서는 노동 능력을 잃은 개인은 국가의 도움도 가족의 도움도 제대로 받을 수 없기에, 일단 "나의 가장 중요한 자산"인 "나의 몸"을, 너나 나나 열심히 가꾸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한국의 생활 체육 참여 수준은 약 60%로, 예컨대 노르웨이 등 북구 사회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습니다. 한데...해마다 조금씩 바뀌지만 생활 체육 참여자 중에서는 약 55-60%는 특별한 비용 등을 요구하지 않고 간단히 할 수 있는 걷기나 등산을 합니다. 고비용을 요하고 상당한 시간을 들여야 하는 요가나 필라테스 등은 체육참가자 중에서도 약 7%만이 할 수 있는 조건에 있고 헬스에 다닐 수 있다는 것은 13-15%의 몫입니다. 즉, 쉽게 이야기하면 "몸짱 열풍"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신자유주의 대한민국에서는 어디까지나 "중산층 이상" 계층들부터입니다. "몸"은, "계급"을 그대로 나타내는 "표식"이 되는 것은, 18세기나 21세기나 마찬가지입니다.

한국만이 과연 그런가요? 노르웨이만 해도 저처럼 뚱뚱한 몸은, 하루에 1-2시간 운동하지 못하고 값싼 음식을 먹는 "동유럽 출신 이민 노동자"의 전형적인 몸입니다. 노르웨이 중상층의 신체란 대개 "군살"이 잘 보이지 않는, 보통의 경우에는 "관리"가 잘 되고 매우 건강한 신체죠. 이런 현상을 보면, 절로 "기민한 몸", "춤을 잘 출 수 있는 몸"이 신분적인 특권이었던 과거의 귀족들이 생각납니다. 중상층의 "관리가 잘 된 몸"은, 충분한 운동 시간과 함께 점심 때에 싼 샌드위치 아닌 좀 비싼 건강식 (초밥 등)을 먹어도 되는 "여유"를 나타냅니다. 한데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약 80% 정도의 구성원들에게 그럴 만한 "여유"가 없거나 부족합니다. 특권층과 비특권층의 "차이"를 나타내는 표식으로서의 "몸", 계속해서 모든 모순들이 다 내포돼 있는 인간 역사의 핵심 장소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출처] 몸, 계급의 산물|작성자 박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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