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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도서/음악 문학/도서 영웅은 인민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감상문[발롱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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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노벨문학상 수상자 중에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작가가 없다는 건 모두가 인정하는 명확한 사실이다. 하지만 개중에서도 가장 호불호가 심한 작가를 뽑자면 분명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1위에 오르리라고 생각한다. 작가 자신은 자기의 글을 ‘소설—코러스’라고 부른다 하지만, 실은 전부 타인의 말을 그대로 받아쓰기만 한 이야기라며 그저 지방인재전형으로 노벨상을 탔을 뿐이라 폄하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 이념경쟁에 의해 이리저리 곡해된 철의 장막 내부를 내부자의 입장에서 왜곡 없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수십 수백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야기를 쓰려는 노력에서 기존 논픽션과는 다르기에 노벨상을 이제야 수상한 작가였다고 호평을 하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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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녀의 책이 어떤 작품인지를 한 번 들여다보자. 늙은 대조국전쟁 참전 여군의 뒤늦은 회상을 담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는 우리가 흔히 전쟁을 다룬 논픽션하면 떠올릴 영웅의 이야기, 희생의 이야기만을 담지 않는다. 본 작품에서는 인터뷰이가 어떤 감정을 느끼던지 전부 한 책에 담았다. 그렇기에 어떤 이는 전승절을 맞았을 때의 기쁨을 회상하도 하며, 누군가는 전장에서 자신의 여성성을 통째로 잃어버렸음을 알고 슬퍼하던 감정을 들려주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여군이라는 이유로 겪었던 차별과 전쟁으로 잃은 가족에 대한 슬픔과 분노를 그대로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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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글은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기존 소련 매체에서 그려내고 냉전기 서방 매체에서 그려냈던 대조국전쟁의 모습과는 다르다. 기존 소련 매체에서 그려내는 여군 이야기라면 필시 영웅의 스토리였을 것이다. 한 예로 흐루쇼프 시대의 전쟁영화 《병사의 시》의 주인공 알료사는 “고향 집 지붕을 고치고 오겠다”는 목표를 가진 평범한 시골 청년이지만, 그가 전시에 고향 집 지붕을 고치러 갈 수 있던 이유는 홀로 적의 탱크 두 대를 격파하여 훈장도 수여받을 수 있던 전쟁영웅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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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서방 매체에서는 정 반대의 양상을 보였다. 서로 대량살상무기를 겨누고 있던 냉전 시대에 주적을 마냥 띄워줄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소련처럼 영웅의 이야기를 다루기보단 전쟁 전체를 다루는 쪽이 많았다.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이란 “소련의 전쟁 영웅은 선전용이기 때문에 실적이 과장되었다”였다. 기실 영웅의 실적 문제가 아니라 형벌부대나 227호 명령 등 승리를 위해 무자비한 조치를 거리낌 없이 취했던 소련 지도부의 모습을 보여야 그들의 비인간성을 보여주며 이와 대비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함을 그려낼 수 있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말이다.
이는 냉전이 끝난 이후에 나온 영화인 《K-19 위도우메이커》나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결국 소련의 지도부는 병사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불완전한 병기를 미국에 뒤처지면 안 된다는 이유로 일선 배치하며, 전선에서 잠깐의 유리함을 위해 병력을 사지로 내모는 철저하게 계산적인 존재로 그려지고 만다. 어쨌거나 공산주의는 망했고, 공산주의자의 조국도, 명예훼손이라며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전부 사라졌으니까.

 

 


그렇다고 냉전 이후 러시아 영화에서 진실된 묘사가 나오는가 하면은 또 그렇지는 않다. 간혹 케이블 영화 채널에서 평일 낮 시간대에 틀어주는 러시아산 전쟁영화를 보면 대부분 《병사의 시》보다도 못하단 생각이 든다. 적어도 당국이 원하는 스토리 내에서 최대한 인간적인 고뇌를 보여주려 노력했던, 비참한 후방의 삶을 묘사하고자 노력했던 소련 시기의 선전영화와는 달리 오늘날 러시아의 전쟁영화에서 붉은 군대는 마치 파워레인저에서나 나올법한 ‘정의롭고 강인한 진정한 용사’이다. 그러다보니 인물의 행동과 영화의 주제와 전개도 자연스럽게 10분만 보더라도 훤히 그려져 화려한 전투 신과 별개로 재미없다는 인상을 준다. 인물이 입체적이지 못 하니 플롯이 입체적이지 못 하고, 주제도 뻔한 “위대한 어머니 조국 만세”로 귀결되는 이런 영화에 러시아인도 아닌 내가 어떤 재미를 느끼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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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더더욱 그 진가가 빛나는 법이다. 소련과 그 후속국가의 예술작품 중에 이것만큼 영웅성이 배제된 작품이 어디 있단 말인가. 특히 소련은 스타하노프 운동 이후로 늘 영웅을 필요로 했던 나라니 말이다.
매 시기마다 나오는 소수 사회주의 영웅은 모든 소련 인민이 레닌의 당과 사회주의의 승리라는 목표를 향해 전진하도록 이끌어야 했으며, 특히 파시즘의 위협으로부터 목숨 걸고 조국을 지켜내는 군인과 전쟁영웅은 체제의 핵이었다. 노동영웅이나 모성영웅 등 민간의 영웅은 결국 전쟁영웅과 말만 동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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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소련은 영웅이 나오기 힘들어진 브레즈네프 시대부터, 전쟁영웅을 만들 수 없을 정도로 명분 없던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부터 몰락하기 시작한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전쟁이 한참이던 1985년, 비록 일부 검열이 된 판본임에도 전쟁영웅이란 존재가 사실 보통 인민과 큰 차이도 없고, 어쩌면 전쟁영웅은 모두가 합작해 만들어 낸 허상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담은 본 작품이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것도 시대 상황과 큰 상관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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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결론을 내자면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영웅이 있어야 하는 나라에 살아간 보통 인민의 이야기”를 글 안에 담앗다. 이는 억지로 영웅을 만들어내기까지 했던 소련 체제에 대한 그녀의 냉소적인 관점이 담긴 컬렉션의 일부일 수도 있고, 반대로 영웅과 보통 인민이 공존한 소련 체제를 온전히 담아내 후세에 전하고 싶었던 ‘보통 인민의 일대기’일수도 있다.
둘 중에 어느 쪽에 더 가깝다고 해서 그녀가 써낸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거나 더 높아질 일은 없다. 어쨌거나 그녀의 작품을 통하여 우리는 편견에 넘친 시선으로만 바라봐야 했던 철의 장막 너머의 솔직한 마음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세계화의 물결이 외국과의 교류를 더 용이하게 만들었다고 할지라도, 독자는 한 작가가 몇 년의 시간을 들여 만들어 낸 수백 명의 목소리가 인터넷 글보다 얼마나 더 생생하고 가치 있는지 알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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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소련이 망한지 30년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서방에서 만들어 낸 편견으로 철의 장막 너머를 바라볼 뿐이다. 공산주의가 너무도 허망하게 몰락했으니 그들의 입장을 제대로 들을 기회조차도 없었다. 우리가 아는 공산국가란 그저 이상을 잃은 관료제 국가일 뿐이었다. 나라 전체가 관료가 되어버린 국가.
이런 편견에 대해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작품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말한다. 소련은 그저 관료제 국가가 아닌 영웅과 보통 인민의 나라였다고. 오늘날 히어로 영화가 전부 어느 미국 만화가의 상상력에서 나왔듯이, 소련의 영웅은 당과 인민 대중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똑같은 존재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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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가 첫 작품인 점이 더 의미심장할지도 모른다. 제1세계의 사람들이 철의 장막 너머를 편견어린 시선으로 보는 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보통 인민들이 비슷하게 환상 속에서 벗어나지 못 했음을 암시하니 말이다.

 


그녀가 살아온 곳은 “모든 영웅은 인민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라는 당연한 진실을 1985년이 되어서야 알았던 세계였으니까.

댓글 9

고정닉 2024.01.12. 22:38
나는 이거 정말 더디게 읽히더라…
댓글
사요리 작성자 2024.01.12. 22:39
 고정닉
저는 마지막 목격자들이 가장 읽기 힘들었읍니다...

그래서 이 글은 어떤가요
댓글
고정닉 2024.01.12. 22:40
 사요리
그니까…. 잘 읽었읍니다!!
댓글
고정닉 2024.01.12. 22:43
 사요리
아 다시 생각하는데도 끔찍하네...
댓글
반희수 2024.01.13. 10:34
한국도 인민들이 영웅을 바라는 나라가 되어버린듯..
댓글
사요리 작성자 2024.01.13. 11:22
 반희수
헉헉 글 읽어준거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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