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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도서/음악 아무글챌린지 좌파에 필요한 건, 책임 의식 - 박노자[발롱도르~]

저는 좌파입니다. 정치 의식이 싹튼 10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이 위계서열이나 착취없이, 평등하게 사는 것이 저로서 인생의 꿈이죠. 이미 그렇게 생겨먹었기에 아마도 남은 생존 기간 (20-30년 정도?) 동안 크게 바뀔 일도 없을 것 같습니다. 한데 바로 좌파이기에, 저로서 가장 비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룹도 바로 동류 좌파입니다. 다름이 아닌 '동류'라는 이유로죠. '동류'인 만큼 그 건전성이 늘 걱정되는데, 내부 비판, 자아 비판이 없는 집단은 바로 썩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예컨대 레닌이 인생의 말년에 가장 많이 비판한 대상은 다름이 아닌 공산당과 소비에트 국가의 관료 기구이었죠. 비판이 없으면 자정 기능이 마비되는데, 그 만큼 진정한 좌파는 일단 자파부터 늘 비판적인 눈으로 봐야 합니다.

좌파의 많은 내부적 문제 중의 하나는 저는 바로 '동류'로 상상되는 그 연대 대상에 대한 분석적, 비판적 의식의 결여나 연대에 대한 '장기 지속성' 같은 겁니다. 좌파는 "켐페인"을 좋아합니다. 그 "켐페인"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가두 시위가 벌어지고 "분위기"가 만들어지지만, 또 그 속에서는 "켐페인" 대상에 대한 분석적 능력이 부족한 경우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거기에다 더해, "켐페인"이 끝나고 주목이 새로운 이슈로 옮겨지면 과거 연대 대상에 대한 관심 자체가 증발되곤 하죠. 그 만큼 좌파에 '지속성'이 부족할 때가 많습니다. 이 부분을 우리가 개선시키지 않으면 좌파의 미래가 좀 어둡지 않을까, 싶습니다. 비판성과 책임 의식, 그리고 지속성 없이는 대중들의 신뢰를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죠.

예컨대 베네수엘라라는 이슈를 봅시다. 민노당이 분당되기 이전인 2000년-2007년 사이에, 한국에서도 세계의 좌파 진영에서도 "차베스"와 "베네수엘라"는 그야말로 가장 "핫한" 이슈이었습니다. "볼리바르식 사회주의", "21세기형 사회주의"에 진보적 세계가 환호하고, 관련 서적들도 많이 출판되고, 민노당도 베네수엘라에 시찰단을 보내고 그랬습니다. 정말 세계적 좌파 "희망"의 중심은 베네수엘라의 수도인 카라카스이었습니다. 그러다가는...카리스마가 강한 차베스 대통령이 2013년에 사망하기도 전여 이미 2012년부터 베네수엘라의 평균 수명과 빈곤율, 불평등 지수 등 주요 사회적 지수들이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세계 좌파가 환호를 하면서 그다지 "비판적 분석"을 하지 않는 사이에 정부의 상층과 직접 연결이 닿는 새로운 관료 자본가 - 그 상당수가 군부 출신 - 의 계층이 형성되고, 베네수엘라의 경제를 그 손에 넣기 시작했습니다. 혁명이 보수화되면서도 대체 산업화는 되지 않았고 베네수엘라는 여전히 오로지 석유 수출에 의존했으며 그 주된 거래처는 바로 차베스의 숙적인 미국이었습니다.

그러다가는 2014년 유가 폭락 이후 베네수엘라는 "지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2018년 같아서는 물가는 약 100,000%나 뛰었습니다. 초과 인플레이 속에서는 약 7백만 명 정도 되는 중산층은 거의 전부 이민갔으며, 남은 인구의 95%나 되는 빈민들은 그저 정부가 분배하는 배급품을 받고 연명하는 국가 관료 자본주의 시스템의 "무력하고 침묵하는 다수"가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2019년에 매우 파괴적인 미국 제재까지 겹쳐져서, 2013-21년 사이의 GDP 폭락폭은 약 80%나 되었습니다. 그 속에서는 마두로 지도부는 최근 3-4년 동안 사실상 민영화 정책을 단행하면서 군부와 가까운 정실 자본가들에게 유전을 포함해 차베스가 공공화한 수많은 기업들을 되팔면서 그 영업으로부터의 수익의 일부분을 상납 받는 식으로 신흥 자봉층과 유착하게 되었습니다. 인가가 떨어지자 이제 "내부 결속"의 차원에서 마두로 지도부는 인접 국가 가이아나의 금싸라기 자원의 보고, 즉 국토의 3분의 2를 강제 합병하겠다고 전쟁 준비 태세를 갖춘 겁니다. 그런데 "볼리바르 혁명"의 이와 같은 퇴락, 변질, 퇴행, 그리고 베네수엘라 사회의 비극에 대해 지금 제대로 된 분석을 내놓은 좌파 활동가나 사상가는 있나요? 제가 베네수엘라 상황을 공부하면서 주로 참고하게 된 자료는, 별도의 정치적 "색깔"이 없는 오슬로대 국제 개발 전문가들의 보고서들이었습니다. 환호가 끝난 뒤에 좌파가 베네수엘라를 철저히 망각해 관련 서술이 거의 없어 참고할 만한 논문 하나 찾아낼 수 없었던 겁니다.

베네수엘라만이 갑자기 관심에서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2012년부터 한국을 포함한 세계 좌파가 몇년간 큰 기대를 걸었던 곳은 시리아의 로자와 지역에서 쿠르드 자치 정부가 벌인 진보적 사회 개혁이었습니다. 각종 조합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혼합 경제도 그렇지만 특히 남녀 평등의 실천 등은 상당한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2016-2019년 사이에 "생존"을 위해 미국과 일정한 관계를 맺어야 했던 로자와의 영토를, 점차 터키군과 시리아 관군이 잠식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의 하나에 로자와를 침범하는 데는 미국이나 그 지역적 "경비견" (이스라엘 등)이었다면 아마도 훨씬 더 많은 세계적 분노가 일어났겠지만, 터키는 - 비록 나토 회원국이지만 - 사실상 독립적인 지역적 열강이며 시리아는 중-러-이란의 피후견 국가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로자와의 영토를 잠식해도 한국을 포함한 그 어느 나라에서도 별다른 시위들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0여년 전에 뜨거웠던 로자와와의 "연대"의 열기는 이제 완전히 식어,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겁니다. 관심과 연대의 지속? 책임 의식? 그런 게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팔레스타인과의 연대의 열기는,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에서 매우 뜨겁습니다. 대단히 좋은 일이죠. 단, 제가 팔레스타인과의 연대를 외치시는 분들께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제발 연대를 하면서 "공부"도 좀 하시라는 것입니다. "연대"는 연대 대상에 대한 동감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의 지식 등도 함의합니다. 공부하면서, 한 때에 전세계 좌파의 기대를 모았던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그리고 그 안에서의 최대 주주이었던 파타당이 어떻게 해서 극도로 부패한 권위주의 관리 시스템으로 변질되었는지 "이해"를 한 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비판적 "이해"야말로 진정한 연대의 전제 조건이죠. 동시에 하마스의 사회-경제적인 역할이 무엇인지, 하마스와 팔레스타인 국내외의 (관료)자본과의 관계가 무엇인지 구조적으로 파악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파악 없이는 맑스주의에 기반한 비판적 연대는 힘들 겁니다. 그리고 이 연대가 일회성으로 끝날 것이 아니고 수년간, 수십년간의 지속성을 가져 제대로 제도화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좌파가 좌파답게 지속성을 가지고 연대 대상에 대한 "책임"을 다할 수 있을 겁니다.

 

 

[출처] 좌파에 필요한 건, 책임 의식|작성자 박노자

댓글 2

빵꾼 2023.12.12. 10:05
노자형 여전히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계시네요
댓글
앨버트졸스신 2023.12.12. 19:52
이 아저씨 책도 몇권 읽었는데 이 비판은 좌파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지 않을지? 동류의 기막힌 성공에는 관심을 갖지만 실패는 남탓으로 돌리는게 인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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