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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글챌린지 탈국가・탈민족의 동아시아 평화공생체로 가는 길 - 박노자

<동북아시아 평화 공동체를 상상한다> (원광대, 2023년10월12-13일) 학술회의에서의 저의 발제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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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언: 지금, 동아시아의 위기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2023년가을,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복합적 위기의 증후들이 명확히 가시화되고 있다. 일차적으로 ‘토대’라고 할 수 있는 동아시아 사회들의 경제 기반을 보자면 동아시아 전체의 경제가 지금 자본 축적 과정의 ‘위기’를 겪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일본의 고속 성장이 좌절된 1990년대초, 그리고 한국 경제의 성장률이 고정적으로 4% 이하로 떨어진 2010년 이후로는 동아시아 지역 경제의 성장 “엔진”으로 남은 것은 중국 경제였다. 한데 이 중국 경제도 2023년에 접어들어 대내적으로는 부동산 등에의 과잉투자와 악성 채무 누적,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우크라이나 침공이 촉발시킨 세계적 침체에 의한 수출 감소 등으로 이제 본격적 저(低)성장 모드로 들어간다.[1] 본질적으로는 한 때에 저(低)임금 노동력과 금융 팽창, 저(低)이율 자본의 공급 등에 입어 황금기를 구가했던 소위 “동아시아 개발 모델”은[2], 고(高)임금 노동력과 고(高)금리, 그리고 고(高)유가의 국면에서 그 힘을 구조적으로 잃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토대도 위기 국면이지만, 상부구조도 그 만큼이나 그 이상의 위기다. 동아시아 지역 경제는, 애당초부터 “지역내 연결망”을 그 특징으로 해왔다. 1960년대 이후부터 일본과 한국, 홍콩, 대만 등은 경제적으로 연결돼 있었던 구조에, 1980년대 이후 중국까지 편입돼 “동아시아 지역 경제”를 이룬 것이다. 그래서 중국과 안보 차원에서는 그다지 가까운 관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외 수출에서 중국에의 수출이 2010년에 25%라는 고지를 점하고 나서 대체로 그 수준에 머무르고, 중국과의 “탈동조화” (decoupling)가 정치적 의제로 떠오른 2022년에 내렸다 해도 여전히 22% 정도 된다는 것은,[3] 그 만큼의 충분한 구조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일본도 마찬가지로 일정한 정도의 “탈동조화”를 시도해왔지만, 일본 총수출 중에서의 중국으로의 수출의 비율은 최근 경향적으로 내려가도 여전히 20% 정도 된다.[4] 이와 같은 상호적 경제 의존의 상황에서는, 비록 안보 협력을 못하더라도 적어도 상호간에 “나쁘지 않은 관계”와 대중적 수준에서는 상호간의 대체로 긍정적 인식 등은 필수적일 겁니다. 한데 외교 관계의 상태로 보나 대중적인 상호 인식으로 보나, 중국과 한·일 등 이 지역에서의 미국의 하위 동맹국들 사이의 서로를 대하는 태도는 “좋다”고 말하기가 힘들 것이다. 중국이 한·미·일간의 군사 협력 움직임들에 대해 각을 세우는 등[5] 외교적 긴장이 팽팽한 가운데, 중국과 한·일 사이의 상호 인식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다. 한국인의 무려 81%나 중국(인)에 대한 비호감을 나타냈는데, 이는 69%의 대(對)중국 비호감을 나타낸 일본보다 더 높은 수치다.[6] 특히 한국의 20-30대의 대(對)중국 비호감의 수준은 91%나 넘었는데,[7] 이는 한국의 “혐중” (중국에 대한 혐오)이 이미 위험 순위를 한참 지나갔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중국과 한·일 사이처럼 경제적으로 가까운 관계는, 이와 같은 수준의 모든 층위에서의 중국과 한·일 사이의 “소외”와는 오랫동안 무사히 같이 가기가 힘들 것이다. 우리가 만약 오늘날 서로 경제적으로 읽히고 설킨, 그리고 평화로운 동아시아를 보존·발전시키자면, 이런 기록적인 “혐오의 해일”을 구조적으로 막는 방법을 필히 강구해야 할 것이다.

“혐오의 해소와 예방”은 여러 차원에서 강구될 수 있다. 일단 동아시아를 “광의의 중국 진영”과 “미국 진영”으로 나누는 “동맹 구조”의 문제점에 대해 인식을 해야 하며, 지역적 평화를 위해 “동맹”의 범위를 넘을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와 동시에 한국인과 일본인, 중국인 등 동아시아 각국 주민들의 “집단 자아”를 이루는 민족·역사 서술의 상호 모순성부터 신중하게 고민해야 하며, 지역적 차원의 미래·평화 지향적인 탈민족적 역사 인식의 가능성을 탐구해봐야 할 것이다. 또한, 동아시아 지역 이웃, 그리고 이웃나라에서 온 이민자에 대한 언론 등의 서사는, 자기 중심주의적 독선 (獨善)과 타자 악마화 (惡魔化)를 극복해야 할 것이며, “우리”와 다른 타자들에 대한 내재적 이해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평화’를 원한다면 우리들의 평화 인식, 우리들의 통념들과 평화의 상호 호환성의 문제, 그리고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평화로의 길과 우리들의 평화 운동 등을 같이 점검해봐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위와 같은 네 가지의 방향으로 나의 고민들을 나누며, 국가·민족이 아닌 평화 등의 보편적 가치 중심의 “또 다른 동아시아”의 가능성을 논의해보도록 하겠다.

 

2. “동맹은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

특히 요새와 같은 지정학적 불안 국면에서는, 한·미 동맹은 한국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는다. 한·미 동맹에 대한 지지야 아예 90% 이상이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한·미·일 동맹이라는 구상 역시 72,2%의 지지를 받는다.[8] 이처럼 한국의 엘리트뿐만 아니라 다수의 민초들까지도 ‘동맹’을 절대시하는 배경에는, 전세계적 불안 속에서 (일정한 조건 하에서 일본까지 포괄할 수 있는) 한·미 동맹만이, 핵과 미사일로 무장된 북한을 맞이하고 있는 한국을 보호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 이 확신은 사실 꼭 허구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가령 2010년 연평도에 대한 북한이 포격을 가했을 때에는, 그 당시의 이명박 대통령이 보복 조치로 – 자칫하면 남북한 국지전을 초래했을지도 모를 – 대(對)북 폭격을 지시했으나 “미군과의 합의 사항”이라고 군관계자들이 그를 만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9] 즉, 어떤 상황에서는 한·미 동맹 사이의 교전 수칙 등의 절차들과 의사 결정 구조 등은 한국의 강경 우파 지도자에 대해 일종의 “안전 장치”의 역할을 할 수 있기도 한다.

한데, 이와 반대되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었다. 예컨대 1968년의 전쟁 위기 이후로는 한반도의 가장 심각한 위기 상황이 벌어졌던 1994년에는,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대북 폭격 계획을 세웠으며, 김영삼 대통령이 이 계획의 실행을 사실상 막을 수 없었던 것으로 지금 알려져 있다. 결국 북한의 방공망이 치밀해 폭격에 나설 경우 미국 폭격기의 손실율이 50%에 이를 위험성과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대북 외교 성공 등으로 전쟁의 위기를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지만, 1994년에 한·미 동맹의 틀 속에서 한반도에서 남북한의 공멸로 이어질 전쟁이 현실적으로 벌어질 뻔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이다.[10]

한·미처럼 서로 국력이 비대칭적인 두 나라 사이의 동맹은 자연히 하위 동맹국의 안보에 대한 관리권이 상위 동맹국의 손에 쥐여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상위 동맹국이 갖고 있는 하위 동맹국 안보에 대한 최종적 결정권을, 하위 동맹국이 쉽게 상대화시킬 수 없다. 그 만큼 하위 동맹국의 자율성이 침해되는 것인데, 이는 특히 전세계적인 지정학적 불안의 시대에는 상당한 위험 부담으로 작용될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또한 상·하위 동맹국 사이의 ‘거리’, 그리고 그 쌍방 관계 속에서 관례화된 하위 동맹국 자율성의 수준 등이 또 하나의 변수로 등장한다. 동맹마다 동맹국 사이의 실질적 관계, 하위 동맹국 종속성의 수위 등은 다를 수 있다. 예컨대 형식적으로 북·중은 동맹국이며,[11] 북한에 비해 중국의 국력은 비교할 것도 없이 월등히 강하다. 한데 그렇다 해도 핵실험 등 북한 정권의 각종의 도발적 행위에 대해 중국이 사실상 발언권이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형식적으로 터키는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의 회원국이지만, 현재 터키의 외교 정책은 «친미»라기보다는 미국과 중국, 러시아 사이의 «줄타기», 즉 일종의 자국 이익 본위의 등거리 외교에 훨씬 더 가깝다.[12] 또 하나의 나토 회원국인 헝가리도 미국과 러시아, 그리고 중국 사이에서 ‘적절한 거리’를 탐색하면서 사실상 동맹에 그다지 구속되지 않는 외교적 행보를 보인다.[13] 한데 북한이나 터키, 헝가리의 경우와 달리 미국이 갖고 있는 전시 작전권이 상징하는 것처럼 하위 동맹국으로서의 한국과 그 상위 동맹국인 미국 사이의 관계는 훨씬 더 가깝고, 위계적이고, 한국의 자율성을 제한시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동아시아 평화 공동체로 가는 길에 있어서는 한·미 동맹은 디딤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걸림돌의 역할을 잠재적으로 더 많이 할 수 있다. 적어도 한국의 대북 접근의 가능성을 제한시키는 차원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역사의 교훈은 명확하다. 대개는 한 쪽의 가까운 동맹 관계는, 궁극적으로 반대쪽의 동맹화를 촉발하는 경우들이 많다. 전형적으로는 1882년 이후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이탈리아의 삼국 동맹은, 영-독과 불-독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결국 1904-7년 사이에 영·불·러 등의 삼국 협상 (Triple Entente)이라는 반대쪽 블록의 형성을 가속화시켰다. 이 두 블록의 – 다수가 예상했던 – 충돌은,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을 촉발시키고 말았다. 즉, 동맹 시스템은 영국의 세계적 패권의 말기인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14]에는 국제 체제를 안정시켰다기보다는 차라리 그 파열의 계기를 마련했다. 미국의 패권이 경향적으로 쇠락해 가고 있는 오늘날[15]에도 동맹시스템이 자칫하면 국제체제의 불안을 더 가중시키는 노릇을 한다. 예컨대 최근 세상을 놀라게 한 러시아 대통령 푸틴과 북한 지도자 김정은 사이의 정상 회담 등 북·러의 가시적 밀착은, 사실 한·미·일 군사 공조에 대한 «대칭적 대응»의 성격이 짙다.[16] 지속적인 한·미·일 군사 협력은 – 비록 72,2%의 한국인의 지지를 받는다지만 – 아마도 중·러, 북·러, 그리고 종합적으로 중·북·러의 안보·외교적 밀착의 지속적 강화를 초래해, 북한에의 러시아 첨단 무기 기술 이전 등에 의한 한반도 정세 불안의 심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상당하다. 이 경우에는 동맹이란 안정의 보장이라는 순기능보다 타자 배제, 그리고 배제되는 타자들 사이에서의 결속 강화의 촉발이라는 역기능을 훨씬 더 많이 지니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동아시아가 한·미·일과 다른 개념인 만큼 동아시아 평화 공동체로 나아가자면 한국 역시 한·미 동맹의 테두리를 필요할 때에 상대화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동맹을 깰 필요도 없고 쉽게 깰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이 동맹은 다소 “느슨”해질 필요는 있다. 즉, 한국은 동맹이라는 틀을 벗어나 남북 관계에서 신뢰를 구축하고, 나아가서 적당한 시점에서 북한과의 쌍방 군축 협상 정도 벌일 수 있는 단계까지 가야 “평화 공동체 만들기”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쌍방 군축" 이야기는 긴장된 시국에 어울리지 않는 일장의 감몽(甘夢)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불과 5년 전인 2018년에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채택된 평양공동선언의 부속 문서인 ‘4·27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에서 “신뢰 구축”과 “군비 통제”가 명시적으로 명기돼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17] 즉, 이미 이 문제들은 통일 의제의 일부분으로서 남북한 교섭 과정에서 다루어진 적이 있었다. 이외에는 한·미 동맹의 틀과 별도로, 중국과도 적어도 양군 (兩軍) 사이의 기본적 소통과 적당한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동아시아에서 “평화 공동체 만들기”의 기초적 작업일 것이다. 이런 작업에 먼저 필요한 여론을 조성하는 것부터 단순치 않은 일이겠지만, 전문가들이 시청자·독자들에게는 한·미 동맹에의 무비판적 “중독”과 한·미·일 동맹으로의 확장이 결국 북·중·러 동맹의 공고화, 그리고 긴장이 팽팽한 한반도에서 중·러가 북한에 최첨단 군사 기술을 이전하는 위험천만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설명할 줄 알아야 한다. 동맹시스템이 주는 안정보다는, 지금 이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위험부담은 사실 더 높다.

 

3. “우리는 하나의 유구한 민족”? “우리 모두가 피해자”?

 

일찍부터 통일된 관료 국가가 만들어지고, 국가에의 소속 의식이 강력하게 작동되는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19세기말부터 민족주의 (nationalism) 본위의 집단 자의식으로의 이동은 비교적 빠르고 순조로웠다. 좌파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에 비판적일 수 있었지만, “반제 민족주의”인 이상 대개 민족주의를 수용·장려하는 태도를 가지곤 했다. 국민 내지 인민 통합의 주된 기제로 작용돼 온 민족주의는, 동시에 중요한 역기능도 지니고 있었다. 대부분의 민족주의들이 다 그렇듯이, 동아시아 지역의 민족주의들도 동시에 “유구한 역사” 등 “우리들의 위대성”과 “우리들의 수난사/피해의 역사”에 대한 서술을 내포한다. “위대한 우리 과거”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동시에, 민족의 구성원들이 각종의 외부로부터의 피해를 넘는 “우리 민족의 웅비 (雄飛)”를 준비하는 작업으로 소환되곤 했다. [18] 이런 형태의 민족주의에 대한 예리한 비판도[19] 최근에 강력하게 제기되었지만, 이 동아시아적 민족주의들이 단순한 “허구”만이 아님을 동시에 기억해야 한다. 동아시아가 유럽 제국주의의 “서세동점” 이전에는 유라시아적 세계 체제의 하나의 중심이었다는 점도 엄밀히 사실이고[20], 유럽 내지 일본 제국주의가 동아시아 각국의 주민들에게 입힌 피해 역시 사실일 뿐이다. 세계체제 중심부, 즉 구미의 패권 세력들의 침략 내지 압박에 대항해, 또한 동아시아 지역 내에서 일본 제국주의나 침략이나 압박에 대항해 이런 식의 민족주의적 대응들이 제시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이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와 같은 형태의 민족주의들이 미래 지향적인 동아시아 평화 공동체 만들기 과제와 전혀 어울리지 않다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민족주의 서술들이 각국 안에서의 “민족 공동체 통합”을 추구하면서 만들어진 것이지, 그 어떤 초(超)국가적인, 지역 전체의 공동체를 목적으로 해서 만들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유구한 역사의 위대함”은 일단 “우리 민족”에만 해당되며, 이웃나라들은 그 “위대한 역사”가 서술되는 마당에 매우 손쉽게 “적국”이나 “조공국” 정도로만 서술된다. 한국 남부 (가야 및 옛 마한 지역)의 고분에서는 흔히 일본열도에서 생산된 유물들이 발견되는 등 고대 한·일 간의 교섭은 매우 적극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21] 한국의 민족주의적 서사에서는 고대 일본은 기껏해야 “선진 지역”인 한반도로부터 그 문화를 전수 받은 “후진 지역” 정도로 서술될 뿐이다. 재미있게도 이런 “후진 일본 지역으로의 선진 문화 전수”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주 등장하는 “왕인 (王仁) 박사”와 관련된 자료는 한국의 고대·중세 문헌에 전혀 없고, 그 이름과 “업적”은 오로지 고대 일본 자료 (『고사기(古史記)』· 『일본서기(日本書紀)』·『속일본기(續日本記)』)에만 보인다는 것이다 (조선에서 “왕인 박사”가 일본으로 다녀오는 사신이 가져온 자료를 통해 처음 알려진 것은 15세기다).[22] 즉, 고대 일본을 자민족 중심적인 민족주의 입장에서 “우리”보다 하위 배치하면서도 동시에 그 사료 (史料)에 계속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한국 민족주의 담론에서 고대 일본이 “후진 지역”이라면, 중국 민족주의 담론은 고조선이나 고구려를 비롯한 고대 한국의 국가들을 중국사에 편입시키면서 중원 왕조들의 번속 (藩屬) 정도로 설명한다.[23] 일본 민족주의는 메이지 시기 이후부터 동아시아 대륙의 역사를 타자화시키면서 일본사 (“국사”)의 “서설” (序說) 정도로 위치시켜 왔다.[24] 궁극적으로 한·중·일의 민족주의적 역사 서술들은 서로의 호환성이 결여되며, 상호 배제적 (mutually exclusionary) 성격을 지니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어떤 초국가적 공동체 만들기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는 서사들이다.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근·현대사의 “피해” 위주의 서술에서 더더욱 더 명확히 나타난다. 중국의 경우, 피해 서사의 중심은 “백년국치” (百年國恥)의 개념이다. 이 “백년국치”는 제1차 아편전쟁 (1839-1842년)과 불평등 조약, 홍콩 조차 (租借) 강요로 시작되고, 1949년 “신(新)중국” 건국과 1950-53년의 “항미원조” (抗美援朝)로 끝났다는 것은 중국의 최근 민족주의 서사의 골격이다.[25] 그런데 이 서사는 과연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화, 각종의 전쟁과 국가 폭력으로 점철된 근대를, 그리고 동아시아 민중들이 그 삶 속에서 경험한 실질적인 방식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가?

일단 “백년국치” 서사는 중국 내부 주변과 외부 주변의 경험을 송두리째 무시한다. 중국 내부의 경우에는, 비록 청나라가 세계 체제 중심부에 속하는 영국이나 프랑스 등의 침략을 받아 불평등 조약 체결을 강요 받았지만, 청나라 지배자들이 19세기에는 그 내부 변경 지역에 대해서 매우 잔혹한 진압 작전을 수행할 만한 군사력을 충분히 보유했다. 1869-79년의 중국 회족 (回族)과 신강 (新疆) 이슬람 계열의 주민들의 봉기를 진압하면서 수만 명을 학살한 좌종당 (左宗棠, 1812-1885)의 “토벌” 작전은 대표적일 것이다.[26] 중국 외부 주변의 경험으로는, 청나라 “예속화 정책”의 피해를 고스란히 받아야 할 1884-1894년 사이의 조선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면서 또 자국 상인 (商人)들이 조선 시장의 잠재력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조건을 조성하는 등 경제적 착취까지 겸하고 있었다.[27] 한데 청말 (淸末) 시절에 잔혹한 토벌에 희생된 중국 변강 지역의 이슬람 신도나, 청나라의 간섭에 노출돼 있었던 조선인들의 체험들을, 중국 주류의 “백년국치” 서사는 전혀 담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 서사가 강조하는 홍콩 조차의 강요 등 제국주의 열강들의 대(對)중국 폭력은 어디까지나 사실이었다. 하지만 과연 태평천국 (太平天國) 진압 과정에서의 대량 학살과 곳곳에서의 각종 봉기와 그 진압 과정에서의 피해, 그리고 한발과 홍수, 기근 등에 시달렸던 청나라 말기 중국 민중들에게 홍콩 영토를 빼앗긴 것이 과연 가장 큰 트라우마이었는가를, 한 번 물어볼 수 있기도 한다.

 

중국의 정치화된 주류의 “피해자 민족주의”가 수많은 “주변부”들의 경험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은 자명하다. 그런데 과연 한국의 피해 서사는 어떤가? 이 서사 역시 ‘사실’에 입각하지만, “자국민 중심”은 그 맹점이 아닐 수 없다. 평균적 한국인에게 “일제 시대의 대표적 피해 사례”를 물어보면 아마도 “위안부”, 즉 일본 군대의 성노예 착취 등을 들 것이다. 그런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 군대의 성폭력을 오로지 “우리 문제”만으로 치부한다는 것은 사실 위험할 수 있다. 애당초부터 위안소에서 조선 여성과 함께 수많은 중국 여성 등이 갇혀 있었으며, 오히려 일본군에 점령을 당한 중국 지역에서 납치나 인신매매를 당해 위안소에 끌려온 중국인 피해자들이 상상 이상의 잔혹한 대접을 받는 경우들이 허다했다.[28] 사실 “위안부” 피해자 중에서는 한국인이나, 중국인, 필리핀인 이외 인도네시아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성노예가 된 네덜란드 여성이나 인도네시아 현지 여성 등이 있는 등[29] 매우 다양한 민족과 인종들이 있어, 위안소 제도는 조선인만을 상대로 한 일본의 범죄라기보다는 초대형 국제 전시 성범죄에 해당될 것이다. 이는 일차적으로 “우리가 당한 피해”라고 “민족화”시켜 보는 시각은, 그 피해자 구성의 다양성, 그리고 그 피해자들이 불특정 다수의 “조선인”이라기보다는 주로 “가난한 여성”이었다는 젠더적, 계급적 피해의 “현실”을 호도하는 측면이 있다.

배타적인 “우리”만의 “위대성”이나 “기여”, 그리고 “우리”만의 피해만 강조하는 자국 중심의 역사 서술 태도를 극복하여 중심과 주변, 주류와 비주류, 여러 계급과 계층의 남녀들의 역사적 체험을 월경적 (越境的)인 방식으로 공정하게 다루는 동아시아 지역사 (地域史)는 과연 가능한가? 특히 근·현대사, 그리고 특히 근·현대사 교육이 어느 나라에서나 극도로 정치화돼 있는 만큼 아마도 초중고 교과서의 경우에서는 “동아시아인들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근·현대사 서술”의 출현을 기대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런데 학계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시민 사회가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은, 역사 전문가 차원에서 일국사 (一國史) 위주 서술의 극복, 포괄적 지역사 (地域史)로의 이동, 그리고 자국 중심 사관의 극복과 피해자 민족주의의 지양 등을 부단히 논의하고, 이 문제들에 대한 국경을 넘는 전문가, 그리고 시민 사회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의 인식부터 유의미한 진전을 보이면, 동아시아에서 현재와 같은 동맹시스템의 규정력이 약화되는 시점에서 다시 한 번, 그리고 과거의 경우[30]보다 더 효과적으로 각국의 사학자들이 공저(共著)하는 역사 서술의 시도를 해볼 수 있을 것이다.

4. “대림동은 강력 범죄 온상”?

아마도 동아시아에서 인구 구성 차원에서 “동아시아적 혼종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회는 한국일 것이다. 노동력이 구조적으로 부족한 한국은, 일본이나 대만, 중국 등에 비해 자국민 인구 대비로 훨씬 더 많은 외국인의 유입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외국인의 절반 정도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인들이다. 2023년 현재 한국에서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 중에서는 중국 여권 소지자들의 비율은 37,8%이며, 베트남 공민의 비율은 10,5%이다.[31] 한국은 동아시아에서 “동아시아 담론”이 생산·유포되는 중심지가 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와 같은 동아시아와의 인적 교류의 한국에 있어서의 중요성이다. 하지만 한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적인 인적 교류의 현실과 별도로, 동아시아로부터의 – 특히 중국으로부터의 - 이민자들을 마주보는 한국인의 시선은 차갑기도 한다. 중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위에서 이야기한 비호감의 화산은 어디까지나 최근의 지정학적 미·중 대립과 사드 (THAAD) 사태 이후의 이 대립에의 한국의 연루 (連累) 등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중국인 – 그 중에서도 특히 재중국 동포 (“조선족”) – 에 대한 차별적 시선들은 자국 중심의 역사 서사를 포함한 한국적 민족주의 담론과 경제·사회·정치적 우월감, 그리고 신자유주의적인 대타적 경쟁 의식 등이 한국인의 집단 의식에 얼마나 많은 부정적 변화들을 일으켰는지 잘 보여준다.

약 70만명 정도 되는, 즉 현재 중국의 옌볜 (연변) 자치구보다 더 많은 (!) 한국에서의 재중국 동포 인구는,[32] 경제적으로는 한국의 여러 지역의 노동 시장에는 그야말로 “없어서 안될” 중요한 존재지만[33] 미·중의 지정학적 대립으로 인한 2016-17년 한·중 관계의 위기 이전부터 계속해서 차별적인 국내인의 시선에 시달려 왔다. 한·중 관계의 악화는 그 시선을 더더욱 더 차갑게 만들었다. 한국인의 집단 의식을 반영하면서 그 의식의 형성과 변모에 동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영화의 부문을 보자면, 영화 '황해'(2010년)와 '신세계'(2013년), '차이나타운'(2014년), '청년경찰'(2017년), '범죄도시'(2017년) 등에서 재중국 동포들은 계속해서 “잔인한 범죄자”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범죄 중에서는 총인구의 4,1%를 차지하는 외국인이 저지른 범죄가 2%에 불과하고, 중국 국적자들의 비율이 많은 범죄는 살인이나 강도가 아닌 단순 폭력 건이지만,[34] 한국의 대중 문화나 일부 언론 매체 등은 “강력 범죄자 조선족”, “범죄 소굴 대림동”과 같은 왜곡되고 차별적인 이미지를 이미 꽤 오랫동안 생산·유포해 왔다. 이런 환경에서는 상당수의 국내 체류 재중국 동포는 일상에서 차별을 느끼면서 살아야 한다. 재중국 동포의 비율이 높은 서울 구로구의 경우, 약 40%가 자주, 내지 간헐적으로 국내인으로부터의 차별을 겪었던 것으로 최근에 조사된 바 있다.[35] 차별이 지속되는 가운에 한국 인구 구성의 심화되는 혼종성은 새로운 양상의 사회적 고통을 낳는 셈이 된다.

한국 체류 중인 재중국 동포 등 “중국인”에 대해 벌어지고 있는 악마화의 근원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이 이민자이자 대부분은 단순 노무자 등 사회적 약자의 범주에 속하는데[36] 보수화된 신자유주의 사회 같은 경우 복지 수당을 수취하는 취약층이나 이민자 등은 종종 보수 언론에 의해 마녀 사냥을 당하는 경우들이 있다. 약자층에 대한 우파 포퓰리스트적 언론 린치, 즉 약자에 대한 혐오의 생산·유포는 대개 보수 지지층 결집 효과 등을 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약자층에 대한 악마화를 진행할 때에는 보수 언론들이 대개 그들을 복지 등 혜택의 “부당 수혜자”이자 국내 토박이들과 “일자리 경쟁”을 벌이는 “경쟁자”로 서술하여 신자유주의적 경쟁 의식을 내면화한 대중들의 “의분” 및 경쟁심을 유발시킨다. [37] 한국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극우 미디어와 네티즌들은 사실에 전혀 근거하지 않는 “조선족을 위한 정부 혜택”설[38] 등을 퍼뜨려 보수의 결집에 유익한 “대중적 분노 유발”에 노력한다. 아울러 “담배꽁초 무단 투기, 고성방가, 노상방뇨, 폭력” 등 위주의 많은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재중국 동포를 포함한 중국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39] 한국인 중산층이 한국인 저임금 노동자 등 하류층을 보는, 계급적 우월감 본위의 시각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즉, 보수적 주류가 부추기는 타자 혐오는, 어디까지나 “올바른 처신” 내지 “매너” (manner)에 대한 중산층의 집단 의식에 기반하기도 한다.

다수가 장기간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는 저임금 노무자인 중국 이민자들의 스트레스 해소법 등이 달라지자면 필요한 것은 편견과 혐오가 아닌 그들의 노동과 삶에 있어서의 실질적 개선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국내에서의 동아시아 공동체, 즉 한국인과 다른 동아시아 국가 출신들이 아울러서 평화롭게 사는 공동체를 만들어나가자면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은 대중 문화와 언론의 “혐오 장사”에 대한 사회적 제동·제재일 것이다. 재중국 동포 등 특정 종족·국적 집단을 표적으로 삼는 과도하고 의도적인, 그리고 사실에 기반하지 않는 부정적 묘사는 언론 윤리 강령 차원의 제재를 받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시민 단체들이 주도해서 제중국 동포를 “범죄 집단”으로 매도하는 영화 등에 대한 강력한 사회적 대응이 필요할 것이다. 핵심적으로는, 차별 방지법이 통과되어 국적·종족 차별을 포함한 각종 차별에 대한 사법 처리가 가능해져야 국내에서의 혐중 (嫌中) 정서 확산에 따르는 차별 문제는 어느 정도 그 해결의 실마리가 잡힐 것이다.

5. “K-무기 수출 만세”?

평화는 스스로 찾아오지 않는다. 일본의 보수적 지배자들이 1950년대 이후로 재무장 등의 “보통 국가화”를 꿈꾸어도 계속해서 개헌에 성공하지 못해온 것은, 그 만큼 평화주의적 정서와 그 정서에 기반을 두는 각종의 평화 지향적 사회 운동들이 강했기 때문이다.[40] 이런 의미에서는, 정부가 추진·장려하는 군사주의적 “애국 문화 상품”[41]에 의해서 탄력을 계속 더 받는 중국의 대중적인 군사주의적 애국주의는 상당히 위험하기도 한다. “전쟁”에 대한 거부감을 희석시키고 “애국적 전쟁”에 대한 긍정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이런 “애국 문화”의 목적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한국에서의 평화 인식과 평화 운동의 현주소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대체로 한국인들이 – 당연히도 – 한반도에서의 평화를 염원하며 남북 사이의 평화 공존 내지 그 이상의 긍정적 관계 맺기 (경제 협력 등) 등을 바란다. 2022년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의 63,5%가 북한을 협력 내지 지원 대상으로 여겼으며, 대북 적대 의식을 표현한 응답자는 13,6%에 불과했다. 한데 같은 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독자적 핵무장을 지지하는 응답자 역시 55,5%에 이르러 절반을 넘었다.[42] 한반도에서의 남북한 핵무장 경쟁은 평화라기보다는 긴장과 대립의 첨예화로 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절반 넘는 한국인들은 남북 사이의 대화보다 ‘핵’의 힘을 더 믿는 것이다. 2003-4년에 한국 정부의 이라크 파병에 대한 여론은 나빴지만, 2020년에 이르러 결국 대체복무제 신설이라는 커다란 정책적 변화를 이끌어낸 한국의 병역거부자 운동이라는 급진적 평화 운동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나 지지 역시 다소 저조한 편이다.[43] 즉, 한국인들은 대체로 한국이 그 어떤 전쟁에도 연루되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무장 강화”에 의한 평화 유지를 당연시하는 경향이 강하며 급진성을 띠는 평화 운동에 보통 손쉽게 나서지 않는다. 그리고 한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서 높아진 세계적인 긴장, 무장 경쟁의 분위기를 이용하여 무기 수출을 대대적으로 늘려 돈을 버는 데에 대해서는,[44] 국내에서 반대의 목소리는 그다지 들리지 않는다. 즉, 한국인들에게는 “우리들의 평화 염원”과 “죽음의 장사”로 종종 불러지는 무기 수출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만큼 “평화”를 필요로 하는 사회도 드물 것이다. 한반도에서의 전면전은 하루에 몇 백만 명의 인명 손실 등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45] 한데 전쟁의 위험성이 동아시아지역에서의 지정학적 긴장의 첨예화와 남북한 사이의 냉기류 등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커지는 판에, 한국에서의 적극적 평화 운동은 너무나 부족한 것도 현실이다. 이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운동적 방식을, 한국 시민 사회가 고민해야 할 것이다.

 

6. 나가며: 동아시아 위기 극복에의 노력

서언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여태까지 고속 개발의 가도를 달리며 여러 면에서 승승장구해온 동아시아의 전(全)지역은 2010년대후반-2020년대초반부터 복합적 위기에 부딪치게 됐다. 그 동력이 고갈돼 가는 성장은 둔화돼 가는가 하면, 깊어지는 미·중 갈등은 중국(과 북한), 그리고 한·일 사이의 괴리를 넓혀 나간다. 한·중·일 주민들에게 그 일차적인 소속은 각각 그 국가들이다. 그런데 강력한 민족주의적 서사로 무장된 국가들과 타자의 배제를 통한 내부 결속을 기도하는 미디어 등은, 한·중·일 주민들에게 서로에 대한 반감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종종 하는 것이다. 사실 “동아시아 지역”이라고 하지만, 한·중·일 주민들에게는 “국가”의 범위를 넘는 그 어떤 지역적 소속감도 그다지 없고, 공통의 지역 언어 (지역적 링구아 프랑카)도 없다. 내가 살고 있는 노르웨이에서 한국인과 일본인, 중국인이 같이 만나면 대개 (많이 부족한) 영어로 서로 소통하는 방법 이외는 없다. 그런 판에 특히 중국과 한·일 사이의 심적인 장벽까지 높아지는 것은 미래 차원에서는 대단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과거와 같은 성장 모델의 위기나 글러볼 패권을 둘러싼 중·미 갈등은 한국 시민들의 힘으로 바꾸기가 힘든 “객관적 상황”에 속한다. 한데 이 상황에서의 행동 방식을,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각국의 시민들은 충분히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일단 한국인들이 한·미 동맹의 안보·외교 분야에서의 거의 절대적 규정력을 어느 정도 적당히 상대화시켜야 동아시아의 “뇌관”이라고 할 수 있는 한반도의 상황이 좋아져 충돌의 위험성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한·미 동맹을 당장에 벗어날 수 없어도 동맹에 대한 맹신을 벗어날 수 있고 벗어나야 한다. 한국의 시민 사회가 중국의 국가 주도의 역사 서술 태도, “백년국치” 등에 대한 극도로 정치화된 서사 등을 변화시킬 수 없지만, 적어도 한국 국내에서 전통 시대에 대한 국수주의적 신화들을, 나아가서 일국사 (一國史)와 같은 역사 서술의 방식을 과감히 벗어날 줄 알아야 하고, 근·현대사에 있어서는 “우리”만의 피해 아닌,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화의 모든 피해자들의 고통을 아울러 알아 주어야 한다는 데에 대한 공감대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일부 대중 문화 작품이나 보수 언론 속에서 보이는 한국 체류의 재중국 동포 등을 포함한 중국인 등 한국에서 사는 동아시아 이웃 국가 출신들에 대한 악마화를 차단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여과 장치를, 국가와 사회가 힘을 합쳐서 만드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목적이 ‘평화’라면 평화 운동에 대한 열성과 국가간의 무기 거래 등에 대한 비판적 의식 등 평화주의 정신과 행동도 시민 사회 구성원들에게 요구된다. 탈국가·탈민족의 동아시아 평화 공동체는 절로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국경을 넘고, 국가주의적 신화들을 벗어나고, 타자들과 공감대를 이루고, 평화를 만들어나가는 시민들의 의식적인 노력들이 필요할 것이다.

[출처] 탈국가・탈민족의 동아시아 평화공생체로 가는 길|작성자 박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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