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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글챌린지 푸틴의 러시아, 대중 독재의 전형 - 박노자

소련 시대에 각급 학교의 역사 교사들에게는 한 가지 아주 어려운 과제가 부여돼 있었습니다. "조국 대전쟁" (제2차 대전 때의 소독 전쟁)을 설명할 때에는, "소련을 침략한 병사들 중에서는 독일 노동자와 농민들도 있었느냐?", "만약 독일 병사들이 농노 대중의 출신이었다면 왜 그들의 계급 의식이 발동되지 않은채 그들의 계속 히틀러 침략의 도구로 살았느냐?" 같은 학생들의 질문에 어떻게든 답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사상적 내용은, 노동계급이 본질적으로 혁명적 잠재력을 내표하고 있으며 장차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게 돼 있다는 부분을 그 주된 요지로 했습니다.

그런데...독일 노동 계급은 1930년대 유럽에서 최대이었으며, 1933년의 마지막 연방 선거에서는 독일 공산당은 4백80만 표 이상, 독일 사민당은 7백만 표 이상 각각 득표하는 등 노동계급의 좌파 정치는 상당한 지지기반을 갖고 있었습니다. 독일 공산당 당원수는 1933년에 약 40만 명 정도 됐습니다. 그들 중에서는 약 2만 명의 활동가는 나치들의 집권 직후에 체포, 구금되고, 또 그 정도 되는 숫자는 망명 내지 은신 및 지하 활동으로 들어갔지만, 도대체 나머지 수십만 명의 옛 공산당원들과 수백만 명의 사민당 당원 및 열성 지지자들이 나치 집권기에 뭘 했는지 전 학교때부터 너무 궁금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소련 교과서들은 그냥 침묵했고, 교사들도 이렇다 할만한 말이 없었습니다. 그 교과서들의 "노동 계급의 내재적 혁명성" 논리로 나치 집권기의 독일 노동자 계층의 실질적 경향을 전혀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련 교사들은 히틀러 독재를 코민테른 시절의 디미트로프의 명언대로 "금융자본 등 대자본의 테러적 독재"라고 설명해야만 했습니다. 정적에 대해, 그리고 각종의 "제거 대상" (유대인, 동성애자, 장애인 등등)에 대해 "테러"라는 말은 당연 적절했고, 일부 금융자본과의 유착이 히틀러 집권에 역할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디미트로프를 포함한 그 당시 많은 코민테른 지도자들이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사실은, 바로 히틀러 독재의 상당한 "대중성"이었습니다. 물론 - 정말로 "밑바닥"부터 올라온 소련 공산당 간부의 대다수와 달리 - 나치당 관료들은 대개 노동자가 아닌 중산계층 출신이었습니다. 물론 1933년 이후 재무장과 군수공업의 확창, 이웃나라 침략과 약탈 등은 일차적으로 대기업 관계자와 고소득 직종의 중산층 종사자, 그리고 주로 중산층 출신의 히틀러 당과 군 관료들에게 유익했고, 곡가 인상과 동유럽에서 끌려온 징용 피해자들의 노예 노동은 농민들에게 유익했습니다. 노동자들이 여러 사회 계층 중에서도 그다지 전시 경제의 "수혜자" 대열에서 좀 밀려난 입장이긴 했습니다.

한데 특히 무기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에게 후한 보너스가 주어지고, 완전 고용은 직장 안정성을 의미했습니다. 히틀리 집권기의 독일 노동자들의 편지나 수기를 분석한 사학자들은, 같은 공장에서 동유럽 출신의 징용공들을 "열등한 인간"으로 취급한 독일 노동자들의 특권 의식이나, 봉기에 나선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를 초토화한 모습을 보고 "우리 동료들이 대단한 일을 해냈다!"고 칭찬해주는 노동자 출신 병사들의 반응 등을 전해줍니다. 마르크스가 노동자들의 "혁명적 잠재력"을 이토록 높이 평가해주었지만, 히틀러의 패색이 짙어졌던 1944-5년에도 독일 노동자들의 그 어떤 대중적 저항 운동도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독일을 이웃을 약탈할 수 있는 패권 국가로 만들려 했던 독재는, 노동자들에게도 일정한 몫을 배분해줌으로써 그들의 유럽 전체에 대한 나치들의 지배를 행사했던 지배 블럭의 하위 파트너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과거에 공산당이나 사민당의 당적을 보유했던 수만 명의 독일 노동자들이 소련 침략에 동참했지만, 그들이 예컨대 탈영을 하거나 유대인 학살 등 범죄 행위에서의 참여를 거부하는 경우들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이 부분은 소련 교사들이 쉽게 발설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렇다면 노동계급이 무조건 혁명적이라는 학설의 근거가 뭐냐"와 같은 다음 질문에 답할 자신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야, 사유재산으로부터 소외된 이들이 결국 사유재산제의 혁명적 부정에 나선다는 이론은 틀리지 않습니다. 문제는 바로 이 "궁극적으로"라는 단서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자본과 노동의 내재적 모순은 어떤 형태로든간에 발동되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는 지배자들은 노동자 계층, 또는 이 계층의 일부분을 충분히 특권화시켜 그 지지 기반으로 만들 수도 있고, 또는 적당한 잉여 배분 등을 통해서, 채찍과 당근을 다 사용하면서 그 헤게모니에 복속시킬 수 있습니다. 노동자, 또는 적어도 노동자 계층의 상당부분까지 포섭한 독재를, 우리는 흔히 "대중 독재"라고 보릅니다. 사실, 오늘날 푸틴의 독재는 아마도 히틀러 시대 독일 만큼이나 "대중 독재"의 정의에 그대로 부합되는 것입니다.

사실 특히 노동자 계층의 "푸틴 지지"는 애당초부터 비교적 높았습니다. 한 번 2012년 대선 때의 각 계층 투표 동향에 대한 레바다 센터 (자유주의 지향의 여론 연구 센터)의 분석 자료를 봤는데, 거기에서 "노동자"들의 푸틴 투표율은 55%나 되는 반면 "기업인"의 푸틴 투표는 31%에 그치고 "관리자"들의 푸틴 투표는 50% 정도이었습니다. 기업인들 중에서는 공산당의 쥬가노프 후보를 지지하는 비율으 (16%)은, 노동자 (12%)보다 더 높았습니다. 동시에 "저소득 가구" 구성원의 푸틴 투표율 (59%)은, "고소득 가구" 구성원 (33%)보다 거의 2배나 높았던 것입니다. 푸틴과 푸틴주의에 대한 지지, 그리고 현재 푸틴 정권이 자행하는 전쟁에 대한 지지는 실업자나 비정규직 노동자 사이에서는 약간 덜 나오지만, 대기업 노동자일 수록, 노동자 인구가 많은 중소 도시 주민일 수록, 농촌 주민일 수록, 저임금 근로자나 연금 생활자일 수록 더 높이 나옵니다. 사실 이건 "대중 독재"의 거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왜 범죄적인 침략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독재자를, 노동자와 저소득자들이 이토록 지지하고 있을까요? 관건은 "재분배"입니다. 범죄적 전쟁의 현장에 가게 되는 - 주로 저임금 근로자나 농촌 출신의 - 러시아 병사들은, 거기에서 최저 월급으로 19만 루블, 즉 한달에 거의 3백만원 가까이 받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라면 이게 평균 임금에 가깝겠지만, 러시아의 가난한 지방에서는 엄청난 "고소득"입니다. 지금 이 "전시 군인 임금"과 전몰자 유가족 보상금 등은 러시아 지방에서는 거의 주된 소득 평준화 요인으로 작동된다는 분석 등도 나옵니다. 동시에 3교대로 일해야 하는 군소공업 노동자들이 상당한 보너스를 챙기고, 전시 완전 고용은 임금을 높여주는 시장적 요소로 작용됩니다. 그러니 푸틴의 지지율이 80-81%라는 레바다 센터의 최근의 데이타는, 범죄적 전쟁을 벌이는 독재의 "대중성"이 어느 정도인지 거의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푸틴의 군수 공업 부흥책이나 수입 대체 프로그램에 대한 상당수 노동자들의 지지는, 이미 2000년대 이후부터 노동자 계층 대부분의 푸틴주의에 합류로 이어졌는데, 그 경향은 지금 오리혀 강화된 것입니다.

히틀러주의는 베를린의 폐허에서 끝났지만, 모스크바가 이처럼 폐허가 될 가능성은 현재로서 거의 없습니다. 즉, 러시아 사회가 푸틴주의를 내부로부터 극복해야 할 것이란 뜻입니다.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소련 공산당의 통치가 점차 더 복지주의적, 개방주의적 방향으로 진화했듯이, 아마도 푸틴의 퇴장 이후에 푸틴주의적 통치의 성격에도 어떤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이고, 이 변화 과정에서는 노동 계급의 자율적 조직, 민주 노조 운동의 성공 여부 등은 결정적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푸틴주의의 러시아 장악의 관건이 재분배이었다면, 그 극복을 보장할 수 있는 건 자율적인, 밑으로부터의 노동 운동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자면 1980년대의 한국처럼 진보적 지식인과 노동자 사이의 "접점"을 찾아야 할 거고, 진보적 지식인들이 "현장"을 찾아가야 할 것이죠.

 

 

[출처] 푸틴의 러시아, 대중 독재의 전형|작성자 박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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