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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글챌린지 230602 일기

 지난 세 해는 살면서 어쩌면 가장 갑갑했을지도 모르는 시간이었다. 사회복무 담당자는 나를 개새끼 보듯 보며 후임과 차별대우하면서 폭언을 쏟아냈고, 가족들은 침체돼가는 나를 보며 답답해했고, 그 기간 전부를 만났지만 지금 와서 보니 나를 내내 외면하거나 초라하게 만들었던 옆사람은 카톡 한 줄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글을 배운답시고 학교를 결정해놓고 그 세 해 동안 쓴 게 아무것도 없었다. 김연수 작가는 최근작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쓰고 싶은 것이 없으면 쓸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도 콱 죽어버리고 싶어지는 순간들을 이리저리 돌려막는 데에 모든 신경을 던진 나는 그 '쓰고 싶은 것이 없어 쓸 수도 없던' 기간이 못미더웠고 걱정됐고 한심했다. 

 

 선수가 세 해를 쉬는 건 은퇴와 별 다를 게 없는 일이다. 운전을 아무리 잘 하는 사람도 3년 동안 스티어링을 잡지 않으면 운전석에 앉는 것 자체가 불안해질 것이다. 학기 초의 나는 명백하게 그랬다. 군살을 달고 뛰는 한물 간 선수(뭐 한물갔다 할 만큼의 전성기는 있고?)같았고, 어느 각도로 돌려야 앞에 놓인 길이 원하는 만큼의 회전이 되는지 까먹어버린 운전자 같았다. 문학은커녕 창작 계획서조차 쓰지 못해 머리를 싸매는 내 모습이 처음엔 한심했는데 몇 주를 같은 모습으로 허비하니 두려워졌다. 계속 아무것도 안 나오면 어떻게 하지, 이 상태가 과제물을 내고 성적을 받는 날까지 바뀌지 않으면 그땐 어째야 하지 싶었다. 어쩌면 언어를 알고 책을 읽게 된 후의 평생을 읽고 쓰며 살아왔던 사람이 하는 고민이라기엔 너무 기초적이었고 말도 안 됐지만 그때의 나는 정말 그렇게 느꼈다. 이대로 무엇도 쓰지 못한 채 눈앞의 모니터가 암흑으로 백지로 남는 상상이 너무 구체적으로 머릿속에 스미었다. 눈앞에 맺힌 상보다 그 머릿속 화면이 더 현실 같았다. 세 해째 같이 살고 7년 동안 알고 지내는 룸메이트조차 그런 나를 걱정하며 바라봤으니 내 마음은 엄살이 아니었고, 내 심리는 정말 어떤 것도 내놓지 못하는 상태에 가닿아 있었다.

 

 "걱정하지 말고 일단 쓰세요. 볼품없는 글은 고칠 수 있지만 백지를 수정할 순 없습니다."

 

 4학년이지만 이번 학기에 처음 만난 스승의 말씀이 가라앉아있던 내 밑둥을 후려쳤다. 올라가고 싶었다. 아니, 올라가고 싶었다기보단 '백지는 못 고친다'는 말에 감화돼서 꾸역꾸역 썼다. 글이 안 나갈 땐 3시간 7시간 10시간을 앉아서 나올 때까지 모니터를 노려봤고 다른 과제가 많아 시간이 없을 땐 1장 내라는 걸 반 장 써서 내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며 완결하고 싶다는 의지를 놓지 않았다. 비록 토할 것 같은, 글같지도 않은 글을 썼지만 어제 끝을 냈다. 좋아하는 가수가 제주 바다에서 노래하는 영상을 보고 들으면서 그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했다. 절대 못 넘을 것 같던 잃어버린 3년을 나는 전공에서 넘었으니까. 평가가 가혹하든 인의없든, 수준이 떨어지든 개판이든 그건 내 영역에서 벗어난 일 같았다. 끝냈으니 되었다 생각했고 노래와 파도소리는 행복했다.

 

https://youtu.be/zEpUn9pg7UM

 

 

 오늘은 두 가지 과목의 평을 듣는 날이었다. 하나는 교양수업의 평가였는데,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명문대에서 연구를 하시는 교수의 수업이다 보니 시험이고 과제고 참 어려웠다. 본인께서도 어렵다는 걸 아시는 건지 "학점의 변별력을 위해 시험이나 과제 개별의 절대평가는 A~F까지 6등급으로 진행하고 거기서 B가 나와도 학점은 A 받을 만한 수준이다, 개별평가 A는 나를 감동시키는 답안을 내놔야 받을 수 있다"고도 하셨다. 그런 고난이도의 과목이니 내 과제물이 얼마나 망가졌을까를 생각하며 떨면서 평가가 뜬 학교 인트라넷에 접속했다. A가 찍혀 있었다. '한 학기 동안 수업 열심히 들어줘 고맙고 좋은 결과 있길 바란다'며, 그동안 봐온 이 과목에 들어간 교수자의 성의와 난도를 생각하면 상상하기도 어려운 평을 내리셨다. 어제까지 머리를 싸맸던 수업을 위해 강의실로 나서기 전부터 오랜만에 기분이 좋은 채였다. 너무도 오랜만에 성취로 인한 행복을 가진 순간이었다.

 

 학기 내내 악을 써가며 완결한 원고에 대한 평이 오후에 이뤄졌다. 쓰면서 가장 많은 자괴감이 느껴졌던 글이었음에도 평은 생각보다 괜찮다 못해 그전보다 나아진 부분까지 있다는 긍정적 방향이었다. 나조차도 내놓기 부끄러운 글이었기에 의문이나 타인들의 비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으나, 약점으로 생각해 노력했던 부분에서 설득력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고 스스로 답답해했던 형식이 내용과 부드럽게 이어진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며 핍진성에 대해 큰 고민을 했던 긴 시간은 있을 법한, 현실적인 글이라는 평으로 전부 보상받았다. 

 

 학기 내내 고민했다. 스스로를 한없이 낮춰봤다. 나는 복무 끝나면 안 볼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메신저 한 줄로 차일 사람에게 너무 오랜 시간과 정성을 낭비했다. 그렇게 휘둘린 결과를, 그러면서 정작 했어야 할 일을 등한시한 업보를 이번에 받는다고 내내 생각해왔다. 정말이지 이번 학기는 하나하나가 다 어려웠고 이해가지 않았으며 스스로가 기초도 다 없어진 상태로 다리찢기를 하겠다고 설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가 나를 감정적으로 밀어붙이며 괴로워하던 시간에도 뭔가에 도전하고 다른 뭔가를 이루고 있었다. 버려진 시간이, 외면한 자신이 헛되지 않았다고 다른 누군가가 말해주기도 했다. 3년 반 동안 이룬 게 없는 나는 오늘 하루 두 가지를 이루며, 증명받으며 그 오랜 기간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

 

 아직 학기가 끝나지 않았고 다음 주까지 마쳐야 할 점수에 영향 가는 일이 산더미지만, 정말 이 정도면 됐다고. 할 수 있는 걸 다 했고 받을 수 있는 빛은 다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하루가 지났다.

 

 오후수업이 끝나고 내려가는데 학교 축구부 경기의 막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저녁 약속 때문에 가야 할 길을 가던 나는 이벤트 덕에 학교 축구부 사상 처음으로 모인 홈 관중들이 웅성거리다가 탄성을 지르는 장면을 목격했다. 라스트미닛 골이었다. 홈팀의 극적인 골이 들어가자마자 경기는 끝났다. 그게 도저히 앞이 안 보이던 3년을 어떻게든 뚫고 나온 내 3개월에 대한 축포처럼 느껴졌다. 다섯 시쯤 눈부셔지는 초여름의 해와 푸르른 인조잔디, 그들이 만나 나는 빛과 반짝이는 한 골, 나의 성취.

 드라마틱했던 날이 끝나간다.

댓글 1

리나군 2023.06.03. 06:34
멋진 글이네요.
저도 이제야 동점골인것 같습니다.
이제 역전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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