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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글챌린지 푸틴과 박정희의 차이 - 박노자

2000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저는 한국을 떠나기 전에 서울의 한 대학에 계시는 중진파 고대사 연구자 분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대체로 1980년대와 같은 민족주의 좌파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지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역사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그 당시 러시아 현실로 화제가 옮겨졌습니다. 그 때에는 체첸 침략 전쟁을 배경으로 해서 푸틴이 막 집권한 시기이었습니다. 저는, 전쟁 살육으로 정치 자본을 축적해서 집권한 인간이 아주 싫다는 제 소박한 소견을 밝혔습니다. 한데 상대방은 제게 "조금 기다려보라"고 했습니다:

"푸틴이 지금 48살이지? 그죠? 나하고 똑같네. 박정희는 집권했을 때에는 44살이었는데...내가 보기에는, 이 사람이 어쩌면 러시아의 박정희가 돼서 모종의 개발의 성과를 이룰 것 같기도 한데, 좀 지켜보게"

1980년대에 데모를 많이 하신 분이 박정희에 대해서 상당히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이 놀라웠는데, 그 비교는 저로서 유의미하게 들렸습니다. 더군다나 푸틴이 2004년에 러시아의 최고 부호인 호도르코브스키를 감옥에 보내는 등 신흥 재벌에 대한 절대적인 생사여탈권을 확립했을 때에는, 정주영 같은 재벌들에게 중동 건설이나 조선업 착수를 지시했던 박정희의 상이 떠올랐습니다. 대자본에 대한 절대적 우위를 확보한 개발 독재 정권이 탄생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에 비해 개발 성과가 그다지 없었지만, 유신 독재와 같은 푸틴의 사실상의 종신 집권 구도나 군수 공업 진흥, 전반적인 군사화, 관제 복고풍과 "방첩" 광풍 등은 정말로 한국의 1970년대를 빼닮은 것 같은 느낌을 계속 주었습니다. 한데 한 가지 큰 차이도 확인되었습니다. 박정희와 달리, 푸틴에게 "김대중", 즉 승산이 있는 자유주의 진영의 대항마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단 1950년대의 한국은 혁신 정당 운동에 관심과 지지가 높았던 사회이었습니다. 나중에 법살을 당한 사민주의자 조봉암은, 1956년 대선에 23%나 거두고, 서울이나 대구 등 대도시의 표를 휩쓸었던 거죠. 그래서 "두번째 조봉암"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게 1960-70년대 혁신계에 대한 탄압은 태심했습니다. 한데 공식 야당의 김대중 같은 "젊은 기수"들은 온건 좌파의 면모까지 띠면서 1960년대말부터 박정희에 대한 유력 대안으로 떠오릅니다. 1971년 대선에 박정희는 53%를, 김대중이 45%를 각각 얻었는데, 조작이 없었다면 김대중에게 실질적 승산이 있었던 구도이었습니다. 한국이 실제적 정치 성향의 차원에서는 이미 1960년대말에 양당제 사회로 발전했는데, 그 구도를 무력화시켜 종신 집권을 도모하려고 박정희가 다음해부터 유신을 선포한 겁니다. 한데 그 무리수를 두었다가는 7년도 못가서 경제 위기와 민심 동요 속에서 자기 부하의 손에 죽고 만 거죠. 한데, 2012년에 대통령직에 컴백해서 박정희와 같은 종신집권 구도를 굳히려 했던 푸틴은, 사실상 그 목표만큼 달성한 것처럼 보입니다. 전쟁의 상황에서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대부분의 분석가들이 푸틴의 "사실상의 종신 집권"의 가능성이 유력하다고 지금 보고 있는 겁니다. 왜 박정희와 달리 푸틴에게 온건 좌파나 자유주의 진영으로부터의 "대망마"가 없는 것이죠?

여기에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박정희에게 있었던 "대항마"가 푸틴에게 없는 이유는, 한국과 러시아의 당위적인 정치 패러다임, 혹은 정치적 명분을 얻는 방식과 다수가 당연시하는 정치 체제가 각각 상이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경우, 1912년 신해 혁명 등의 성공에 힘입어 이미 독립 운동가들부터 차후의 "새나라"를 "민국", 즉 공화국으로 1910년대말 이후 당위적으로 인식해 왔습니다. 더군다나 1945년 이후 한국에 이식된 "교과서적" 민주주의란 미국식 양당제이었습니다. 한국이 미국의 군사 보호령이었던 이상 박정희가 야당을 아예 근절시킬 수 없었고 용인해야 했죠. 그리고 정부-재벌의 개발 블럭으로부터 소외된 이들이 자연스럽게 야당의 품으로 오고, 권위주의적 지배 방식에 거부감을 느끼는 고학력자들의 경우에는 특히 젊은층 (학생 등) 같으면 친야당 성향은 거의 당위에 가까웠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국은 궁극적으로 군부 정치를 극복해 지금 같은 안정적 양당제로 나아간 겁니다.

이와 달리 소련 몰락 이후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에게는 여전히 당연시되는 국가는 유일 지도자를 "모시는" 유일당 국가, 즉 당국가입니다. 단, 공산당이 1989-91년에 공중 분해를 한 뒤에는 그 빈 자리를 메운 것은 푸틴을 정점으로 한 안보 관료 위주의 관료시스템입니다. 한국을 번갈아서 양당 정치인들이 관리한다면, 러시아를 영구집권하는 관료제가 지속적으로 지배합니다. 그 관료시스템이 내치 차원에서 소련식 재분배 메커니즘 (무상 의료 및 교육, 노후 연금)을 어느 정도 계속 가동시키면서 외치 차원에서 다수가 "적"으로 인식하는 "서방"과 적당히 대치하면서 계속 신무기 등의 발표로 "국위선양"을 하기만 하면, 다수는 그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고 있고 선거마다 그 수반에 찬성표를 던집니다. 수반의 이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푸틴이 죽은 다음에 그가 임명했거나, 그 사망 뒤에 경쟁자를 제압해 권력 장악에 성공한 후계자도 같은 방식으로 이 시스템을 계속 운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스템에서는 "공식적" 연방 공산당은 푸틴 등 지배 관료들의 하위 파트너이며, 자유주의는 "서방 공기를 많이 마신" 일부 지식 분자나 젊은 도시 중산층의 신념입니다.

전쟁을 할 때에 푸틴은 "최고"의 지지율을 얻습니다. 2014년 (크림 반도 병합)에는 84%를, 2015년 (시리아 내전에의 무장 개입)에는 88%를 기록했으며, 우크라이나 침략이 벌어졌을 때에는, 즉 2022년2-3월 사이에 그 지지율은 70%에서 83%로 껑청 뛰었습니다. 코로나에 대한 무능한 대응 등으로 몇 번 60% 정도까지 인기가 내렸지만, 그 이하로 떨어진 적은 최근에 거의 없었습니다. 박정희가 꿈에서도 볼 수 없었단 지지율이겠죠? 푸틴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 12-14%는 대체로 대도시의 지식 분자와 젊은 중산층들입니다. 그들 중에 침략 전쟁에 대한 비판 등으로 이미 수백 명이 수감되고, 또 그 계층 중에서 수십만 명이 작년과 금년에 이민을 갔지만, 푸틴은 대체로 이 계층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노동자들과 거의 교감이 안되는 중산층들이 결국 "집단 반항"이 아닌 "이민"을 택할 것을, 푸틴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관료 독재가 제대로 흔들리자면, 러시아의 노동계급부터 계급 의식을 갖고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조직"을 시작해야 합니다. 한데 전쟁 동원과 탄압 속에서 바로 이 부분이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가. 저는, 진정한 변화들이 러시아에서 그래서 조만간에 오기 힘들 것이라고, 다소 비관적으로 생각합니다. 단, 중장기적으로 노동계급의 조직이 언젠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그래도 믿고 있는 것이죠.

 

출처 : 

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223088967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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