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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글챌린지 반미, 반서방 - 푸틴 정권의 정서적 기반 - 박노자

지금이야 대한민국은 일본이나 이스라엘, 폴란드처럼 세계에서 미국에 대한 호감도가 가장 높은 사회지만, 1980년대의 "반미 시대"를 제 나이 이상의 분들이 지금도 잘 기억하실 겁니다. 지금 한국인들이 스스로를 부자 나라의 시민으로 간주하지만, 그 때에는 스스로를 "제3세계인"이라고 규정하여 제3세계에 대한 "미제"의 각종 악랄한 침략, 착취, 점령 등을 성토하곤 했습니다. 이처럼 이미 제3세계를 벗어나가고 있었던 나라에서 반미가 성행했던 이유는 물론 일차적으로 살인마 전두환 정권의 뒷배를 바로 그 "미제"가 봐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불평등한 소파 협정과 미군 범죄, 그리고 미국의 무역 압박 등 전반적인 한미 관계의 비대칭성은 그 때의 반미 기운을 더더욱 더 강화시켰던 거죠. 한미 관계는 지금도 극도로 비대칭적이지만, 반미를 죽인 게 결국 혐중이 아닌가, 싶습니다. (상당 부분 보수 언론이 심어준) 중국에 대한 공포 심리는, "보험"이라고 생각하는 한미 안보 관계에 대한 보수적인 재인식을 초래했다고 봐야 됩니다.

이제 끝났지만, 한국의 반미는 충분히 "이유 있는 반미"이었습니다. 한미 관계는 태생적으로 불평등했으며, 미국이 그 지정학적 관심사 차원에서 한국의 군사 독재 정권들을 지지, 지원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냉전 질서가 다소 느슨해진 1970년대 이후에 한국에서 미국에 대한 비판적 재인식의 기운이 흐르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겁니다. 한데 러시아의 반미나 반서방 정서는 "현실"에 그다지 기반하지 않은 부분이 더 큽니다. 사실, 러시아에서 가장 보편적인 반미, 반서방 정서야말로 보수적 기득권층이 주민 다수의 현실 인식을 어떻게 주도, 조종할 수 있는가의 교과서적인 본보기에 가깝습니다.

러시아의 킴차크 칸국 (欽察汗國)의 조공 국가이었지만 서방의 "식민지"가 된 적이 없습니다. 정교회 신도인 러시아인과 달리 서방인들이 천주교 내지 개신교 신도인 만큼 "이도교"이었지만, 대체로 "쓸모 있는 외국인"으로 간주되곤 했습니다. 지금 모스크바에 가셔서 보실 수 있는 크렘린의 웅장한 성곽과 일부 성당을, 15세기의 이탈리아 건축가인 아리스토텔 피오라반티 (Aristotele Fioravanti)가 초빙돼 와서 디자인한 것입니다. 러시아의 국가 상징인 크렘린을 서방인 건축가가 설계한 만큼, 러시아의 국가적 생존에 서방으로부터 전수되는 지식은 애당초부터 절대적이었습니다. 18세기 초반부터 1917년까지 "서방 열강" 중의 하나로 꼽혔던 러시아는 물론 서방에 대해 어디까지나 "선진 기술이나 사상을 배우고 수용하는" 후진국의 입장이었지만, 적어도 국가 대 국가 관계의 차원에서는 국민적 트라우마를 남길 수 있는 비대칭적 관계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일부의 유럽 지역들을 러시아가 속지로 만든 것이죠 (폴란드, 핀란드 등).

소련 시대에 접어들어 미국과의 관계 역시 소련을 "구해주는" 역할을 몇 번이나 했습니다. 1927-37년의 스탈린의 초고속 공업화는 (박정희의 한국의 공업화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기술 없이는 불가늘했을 것입니다. 스탈린 공업화의 상징은 지금의 우크라이나에 있는 드니프로 수력발전 (Dnieper Hydro Electric Station)이지만, 그 기계의 70%는 미국산이었으며, 그 설치 역시 파견 나온 미국 전문가와 숙련공들이 다 한 겁니다. 스탈린 시대에 지어진 스탈린그라드나 첼랴빈스크, 하리키우의 트랙터 생산 공장들은 하나 같이 포드사의 Fordson이나 International Harvester, 아니면 Caterpillar 등 기존의 미국 모델들을 복제해서 생산했습니다. 포드사의 헨리 포드는 반공주의자이었지만, 1930년대 중반까지 소련의 기술자들에게 그의 회고록은 필독서이었습니다. 공업화 시대도 그렇지만, 제2차 대전 때에 미국산 전투기나 트럭 등의 공급은 소련군으로서 결정적이었습니다. 미국이 공급한 1만4천대의 전투기와 40만대의 지프차, 트럭 없이는 소련의 승리는 가능했을지 몰라도 훨씬 더 힘들었을 겁니다. 냉전기에 미-소는 경쟁적 블럭의 주도 국가이었지만, 미국이 핵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만큼 소련 영향권에 직접 손댄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련은 미국의 간섭에 대한 걱정없이 1956년에 헝가리를, 그리고 1968년에 체코를 침략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반미와 반서방은 도대체 어디에서 파생되는 것이죠? 러시아인들에게 미국과 서방이 직접 고통을 안겨주었다기보다는, 옐친 등 공산당 관료 출신들이 주도한 1990년대의 자본화 과정은 엄청난 고통을 준 겁니다. 미국 내지 서방은 다수의 러시아인들을 가난하게 만든 그 자본화를 지지하긴 했지만, 그 주도 세력은 어디까지나 옐친과 함께 집권한 구소련 간부층의 출신들이었죠. 사실 1990년대에 상트-페테르스부르그의 부시장과 연방보위국 수장 등으로 옐친 시절 관료 생활을 했던 구소련 보안 관료 출신인 푸틴도 스스로 자본화 과정에 동참했으며 스스로 치부하기도 했습니다. 한데, 그와 다른 보안 관료 출신들이 2000년에 집권을 했을 때에 그들이 1990년대 혼란기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 문제를 호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1990년대에 그 역할이 자문 등에 불과했던 서방인의 역할을 전략적으로 부각시켜 다수 러시아인들의 불행인 자본화에 대한 "서방의 책임"을 더 돋보이게끔 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 다음에 "서방 탓"은 중국 등 러시아를 이미 추월하고 있었던 동류의 개도국의 지배층에 비해 경제 관리 능력이 현저히 부족했던 푸틴 지배층의 "전가의 보도"가 됐습니다. 러시아 안팎에 어떤 문제가 있어도 관제 언론들이 무조건 "서방"에서 그 근원을 찾곤 했습니다. 관제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1990년대 혼란기 이후 다수의 러시아인들이 백안시했던 국내 자유주의 세력도 그저 "서방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우크라이나인 다수가 경제 발전이 지지부진한 데다 부정부패가 태심한 러시아가 아닌 유럽연합을 그 시니어 파트너로 삼으려 하자 그것 역시 러시아에서 "서방의 음모"처럼 보도됐습니다. 푸틴 정권과 갈등을 빚은 미국 투자업체의 러시아인 법률가인 세르게이 마그니츠키가 모스크바에서 옥중 의문사를 당한 뒤에 미국이 일부 러시아 관료에 대한 제재를 가하자 러시아 관제 언론들의 미국 성토는 아예 절정에 이른 것이었습니다. 결국 푸틴 등 집권 중인 초강경 민족주의자들이 바라고 바랐던, 내부의 결속을 위해 절실히 필요했던 "외부의 적"이 발견된 겁니다. 물론 이라크와 아프간 침략 등 미국이 2000-2010년대에 벌인 일련의 대외적 폭거들은, 이와 같은 러시아측의 초강경 민족주의 프로파간다의 신빙성을 높이는 데에 크게 도움 준 것이죠.

지금 미국에 대해 "비호감"을 갖고 있는 러시아인들은 71%나 됩니다. 우크라이나 침략에 대한 지지도 70-80% 정도이며, 미국에 대한 비호감과 겹쳐집니다. 즉, 미국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을 갖고 있는 러시아인들이 우크라이나는 "미 제국주의와의 전쟁터"라는 차원에서 침략을 지지하는 셈이 되죠. 1980년대 한국의 반미는 어띠까지 미 제국주의가 지원한 군사 독재에 대한 반감의 연장이었지만, 오늘날 러시아에서의 반미란 자국 제국주의에 대한 지지와 겹쳐지며, 초강경 민족주의적인 독재가 내부 결속을 위해 이용하는 담론적 도구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반대의 성격이죠. 한데 한국에서는 1980년대의 "반제국주의적 반미"의 기억을 여전히 갖고 있는 일부 좌파 민족주의 지향의 분들이, "반미 코드"가 공유되는 만큼, 푸틴의 제국주의적 반미를 높이 사서 우크라이나 문제에 있어서 친푸틴적 입장을 취하곤 합니다. 그들이 우크라이나 민중의 저항 역시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왜 간과하고 있을까요? 물론 우크라이나 역사나 러-우 관계사에 대한 극단적 "무지"의 소산일 가능성도 많습니다...

 

출처 : 

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22306872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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