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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글챌린지 전쟁, 제조업 진흥의 도구? - 박노자

저는 1973년생입니다. 만약 그 해에 누군가가 오스트리아 동쪽의 유라시아 대륙을 거시적인 안목으로 봤다면 그 눈에 들어올 것은 온갖, 여러 가지 종류의 발전 (개발) 국가들이었습니다. 물론 유라시아의 개발 국가들의 종류는 실로 다양했습니다. 당국가에 의해서 농업 부문의 잉여가 수취돼 제조업으로 투자되는 내포적인, 내자 위주의 성장/개발을 지향하는 중, 소, 북이 있었는가 하면, 독재 국가가 차관 등의 형태로 들어오는 외자를 관치 금융을 통해 기업들에게 배분하여 수출 주도적 성장을 치밀히 계획하는 한국이나 대만도 있었습니다. 인도같이 국가가 5개년 경제 개발 계획을 입안, 실시하면서도 민간 경제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혼합 모델들도 있었지요. 좌우간, 어딜 가도 강성 국가들이 국내 생산 발전을 주도하면서 수입품의 국산화를 지향하는 등의 풍경을 목도할 수 있었지요. 어딜 가도 국가 주도의 교육, 시험 시스템을 통해서 밑바닥의 인재들이 "오로지 공부"에 올인해서 결국 국가 공무원이나 기업 임원으로 입신양명하는 "개천에서 나는 용들"의 형상도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체제 순응적인 이 "개천 출신의 용들"은 북한에서 주체사상 시험을 쳐서 통과되는가 하면, 한국에서는 국민윤리 시험을, 소련에서는 과학적 유물론 시험을 각각 쳐서 몸을 일으켜야만 했습니다. 한데 그들에게 수직성 신분 상승을 보장해주는 메커니즘 자체는, 평양과 서울, 모스크바 등지에서 크지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 발전 (개발) 국가의 세상은, 약 1978년과 1997년 사이에서, 대체로 대략 20년 동안 신자유주의의 엄습으로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1978년의 중국 개혁개방부터 1997년의 한국의 IMF구조 개혁까지, 소련/동구권 몰락과 북한의 사실상의 시장화 등으로 인해서 서쪽의 헝가리, 폴란드부터 동쪽의 한국, 대만, 월남까지의 엄청난 규모의 대륙은, 영미권발 신자유주의 시스템으로 편입된 것입니다. 내자, 국내 생산과 시장, 관치 금융, 5개년 계획 중심의 개발 시스템이 와해된 자리에서, 다국적 기업의 투자, 국제화된 공급망, 이윤 위주의 뱅킹, 국가가 아닌 재벌들의 발전 계획들이 새로운 "노멀"이 된 것입니다. 사실, 제가 살아가면서 소련의 몰락부터 한국의 외환 위기까지, 온갖 "급변"들을 차례로 봤지만, 그 대부분은 바로 발전 국가 시스템의 와해와 신자유주의 시스템으로의 편입이라는 커다란 과정의 일부분들이었습니다. 이 변동들의 와중에서는 국가 주도의 교육, 시험 시스템을 통한 "개천 출신의" 인재들의 등용 시스템도 상당부분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한국에서 여전히 국가 고시를 통해 인재들이 공무원으로 영입되고 개벌 공채도 원칙상 "공정"해야 하는 "시험"이지만, "개천에서" 국가 공무원이나 재벌 중간 이상 간부 레벨로 올라가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는 건 이미 주지의 사실입니다.

한데, 1978-1997년 사이의 유라시아 대륙의 신자유주의화는 승자 국가와 패자 국가들을 낳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수많은 한국인들이 과로사와 산재사, 실업,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 질환 등을 겪고 극단적인 양극화와 사실상의 신분 대물림, 세계 최저 출산율이 보여주는 사회 재생산 불능 상태 등의 문제들이 매우 가시적이지만,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은 신자유주의화로 "승자"가 된 것입니다. 지속적인 GDP 성장으로 인해서 군사력도 랭킹이 올라 지금 경제력 순위 10위, 군사력 순위 6위의 "소강대국"이 된 것입니다. 한류의 세계적 유통으로 연성 권력이라는 프리미엄까지 얻은 거죠. 이렇게 국가적 성공을 안게 된 이유는, 애당초부터 무역 중심의 경제라서 신자유주의화가 비교적 쉬웠고, 강성의 관료 국가라서 필요할 때에 국가가 나서서 수출 재발들을 "챙겨줄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중국도 빈국에서 구매력 기준으로 봤을 때의 세계 최대의 경제로 성장한 것이죠. 화교, 대만, 홍콩, 싱가포르부터 시작해서 1978년 이후 막대한 외자가 들어오고, 세계 공급망의 "기반"을 제공할 수 있는데다 역시 강성 관료 국가가 화웨이 등의 수출 재벌들을 "육성"하는 방식으로 강력하게 작동했기 때문이죠. 반대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를 포함해서 발틱 3국을 제외한 구소련의 공화국들은 새 질서의 최악의 패배자가 된 겁니다. 소련 경제의 대외 접촉면이 크지 않아 신자유주의화가 힘들었던 데다, 관료 국가의 와해, 국가 기구들의 사유화 등의 문제들까지 겹쳐져서 결국 새 국제 질서의 낙오자가 된 것이죠. 제가 대학생이 된 1989년만 해도, 소련과 한국의 구매력 기준의 1인당 GDP는 거의 같았습니다. 한데 지금 러시아의 (구매력 기준) 1인당 GDP는 한국의 약 60%에 불과하고, 우크라이나의 경우에는 한국 수준의 약 23%에 불과합니다. 구소련의 실패와 동아시아 경제 개발 속도의 대조야말로 엄청 극적인 편이죠.

이 상황을 타개하려는 방식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는 각각 매우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발틱3국 경제의 비교적 선전 등에 착안한 우크라이나 지배층은, 유럽 연합 가입 등으로 외자자 유치를 해서 발틱 국가나 폴란드와 체코의 모델, 즉 독일 등 재벌들의 "조립 공장"의 역할을 해주는 모델로 세계 공급망에 편입하려 한 것입니다 (이외에는 물론 곡물의 무관세 수출, 철강의 무관세 수출 등도 노린 것이죠). 반대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시대는 어차피 끝나가고, 다시 강성 국가 중심의/안보 위주의 경제 시대, 국가화된 경제의 시대가 재도래한다고 판단한 푸틴 등 러시아의 관료 지배층은, 여태까지의 패배와 낙오를 청산할 수 있는 "설욕"의 방식으로 바로 침략 전쟁을 택한 것입니다. 그들의 노림수는 바로 전시 상황에서의 국가 관료에 의한 경제의 완전한 "장악"입니다. 외자 공급이 끊긴 상태, 즉 구미권 은행에서 더 이상 돈을 빌릴 수 없는 상태에서는 국가야말로 러시아 경제계의 거의 독점적인 "대투자자"가 된 것이죠. 국가의 지배적 영향 아래 있는 국내 은행들은 사실상 "관치 금융"으로 돌아온 겁니다. 푸틴과 그 주변 관료들이 기대하는 것은, 그렇게 해서 기업들로 하여금 수입 대체, 수입품 국산화 등을 유도해 러시아 제조업을 다시 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미국에서 최근 재공업화의 방식이 바로 노골적인 보호주의 ("인플레이 감소법" 등)라면 러시아에서의 재공업화 방식은 전시 경제로의 전환이라는 거죠.

이런 방식으로 해서 러시아가 다시 제조업 대국이라는 과거의 영화를 되찾을 수 있을는지 미지수입니다. 한데 그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전시, 전쟁 "특수" 등이 "경제 발전"의 촉매체가 되고 개발 도구의 역할을 하는 자본주의의 보편적 법칙이야말로 얼마나 야만스러운 것인지 우리가 지금 목격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크라이나 주민들이 도륙을 당하고 그 나라가 초토화를 당하는 판에, 노르웨이나 사우디,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 생산, 한국의 무기 수출, 미국의 LPG와 무기 수출 등 여러 나라의 여러 부문에서의 영업 이익과 수출 이윤이 막 올라가는 것입니다. 수많은 인간들의 끔찍한 고통들이 결국 부자들의 "벌이"로 연결되는 거야말로 자본주의의 기본 "룰" 중의 하나입니다. 과연 이 제도를 안고 사는 인류에게는 밝은 미래라고 있을 수 있을까요?

 

출처 : 

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223062239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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