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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글챌린지 군사주의: 러시아와 한국 - 박노자

똑같은 개념은, 서로 이질적인 두 개의 사회에서는 각각 전혀 다른 함의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예컨대 "극우"라면, 노르웨이에서는 진보당 (Fremskrittspartiet)처럼 "세율 인하, 이민 감소" 위주로 여론전을 펼치는 단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데 한국이라면 "극우"는 이민 정책에 있어서는 중도 우파 (민주당 등)와 그렇게까지 다르지 않으며 "감세론" 위주로 정치 켐페인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한국적 "극우"의 특징은 예컨대 외교 정책 (한-미-일 사실상의 군사 동맹 공고화, 확고한 반북 등등) 분야나 정적 탄압 같은 데에서 훨씬 더 강력하게 나타납니다. 동시, 미국의 "극우"인 트럼프주의자들이 사실상 보호 무역을 선호하는 것과 매우 대조적으로,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서는 강경 우파는 반대로 "자유 무역"쪽에 더 가깝죠.

"군사주의"도 사회마다 그 함의가 다를 수밖에 없죠. 예컨대 미국의 군사주의적 극우라면 집에서 자동총 하나쯤 갖고 그 자동총을 아주 잘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대로, "태극기 집회"의 단골 참가자는, 아무리 성조기와 태극기를 같이 흔들며 집회한 경력이 많아도 한국에서 불법인 총기 소지를 당연 못할 것이죠. 미국 극우들의 일부는 이미 시가전 등 "내전 상황"에 대비하려 군사 훈련을 받지만, 한국 극우들에게 "싸움"이란 인터넷 댓글전이나 시위 정도를 의미합니다. 사실 한국에서는 군사주의란 그 어떤 비제도적인 행동과는 아주 사이가 먼 것이죠.

미국의 "군사회된 남성"이란 때때로는 엄청 폭발적이고 공격적일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군사 문화"라는 것은 지금 대체로 "규율"을 의미합니다. 이 규율은 사실상 엄청 폭력적일 수도 있는데, 이 폭력성이란 개인적인 폭발, 공격과 차원이 다른 시스템적 폭력성이죠. 예컨대 5년 전에 국민은행이 신입 사원들에게 100킬러 행군을 시키면서 여성 직원들에게 생리 주기와 겹쳐지지 않도록 피임약까지 지급한 일이 있었죠. 여성의 신체적 특징까지 깡그리 폭력적으로 무시하면서 엄청 무리한 "초장거리 걷기"를 무조건 시킨 이유는? 이렇게 해서 "순치"된 사원들이 나중에 잔업, 특근 등의 지시를 순순히 받아들이도록, 상명하달 질서에 미리 익숙해져 반항하지 않도록 복종의 "예방 주사"를 놓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군사주의의 목적은 예컨대 살상 행위를 익히도록 한다든가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제도적 폭력성에 대한 신체적인 "순치"를 체계적으로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외에는 한국에서의 대표적인 군사주의 문화란 예컨대 직장에서 회식을 시키거나, 각종 등산, 해병 켐프에 직원들을 강제로 불러들이는 것인데, 역시 여기에서도 목적은 순응주의적인, 무조건 "인내"하고 폭력적 위계질서를 받아들이는 자세를 키운다는 것입니다. 이런 군사 문화는 전장에서의 직접적인 살상 행위와 다소 사이 멀고 그것보다 초착취 본위의 한국형 자본주의의 축적 레짐에 정확히 맞추어진 "노동력 규율화 프로그램"에 더 가까운 겁니다.

한국에서는 대개 군 복무 면제를 받거나 쉬운 보직으로 가는 사회의 최고 지배층 이외에는 90%의 남성은 현역 복무를 합니다. 말 그대로 "전국민적인 복종의 학교"에 대부분이 무조건 가서 복종 훈련을 받도록 돼 있는 시스템이죠. 이와 반대로 러시아에서는 징병 적령기 남성의 절반 정도만 실제로 징병돼 현역 복무를 하는 것입니다. 부유하거나 고학력 집안들의 아들들은 대개 외국에서 공부하거나, 러시아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한다는 근거로 소집 연기 처분을 받다가 결국 나이가 차서 소집이 안되거나, 무슨 "건강상의 이유" 등으로 면제됩니다. 대체로 "허리 디스크"로 병역 면제를 받아도 승마 등 스포츠를 잘 즐기고 있는 삼성의 이재용을 보시면 그런 면제들이 어떤 종류인지 잘 아실 터인데, 러시아에서는 이런 "질병에 의한 면제"를 받자면 굳이 이재용일 필요도 없습니다. 중소기업인이나 고급 전문가 집안으로서도 가능한 일이죠. 러시아 군대란 결국 빈민 군대이며 지방민 군대입니다. 그러니까 2022년2-12월간 우크라이나에서 전몰된 것으로 확인된 약 1만 명의 러시아 군인들의 출신지 등을 분석한 한 연구에 의하면 이 침공에서 찢어지게 가난한데다 민족 차별까지 받는 부랴트 공화국의 남성으로서 군에 (끌려) 가서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죽을 확률이란, 부유한 모스크바 거주의 남성보다는 약 120배나 더 높은 것입니다. 평상시에 경제적 착취를 받는 빈민들이, 결국 전장에 가서 노동력도 아닌 그 몸 전체를 괴물 같은 제국에 바치게 돼 있는, 그런 시스템인 셈이죠.

그래서 러시아에서 군사주의란 그 종류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상류층이나 중상층의 "이념형" 군사주의죠. 대부분 군 복무와 관계 없는 이들은, 그저 "이념"의 차원에서 러시아가 군사 대국으로서 미국과 자웅을 겨루고 제국을 복원한다는 것을 꿈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생활형"입니다. 지방 빈민, 하층민 가정 출신의 남성들이 어릴 때부터 "싸울 줄 알아야 진짜 남자다"와 같은 남성성의 프레임을 익히고, 청년기에 "군사-애국 클럽" 같은 데에서 무술 등등을 배우고, 그 뒤에는 징집 내지 지원병으로 복무하고 나서 경찰이나 경비원 등으로 근무하는, 그런 궤도를 꽤나 많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들 "생활형" 군사주의를 뒷받침하는 것은 "싸움/힘"과 "남자"를 동일시하는 남성성의 프레임 이외에는 바로 "돈"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한달에 벌 수 있는 돈은 가난한 지방민의 한달 벌이보다 8-10배일 수도 있는 거죠. 그리고 예편하고 나서 운좋게 경찰 등으로 진출할 수 있다면 역시 평균 노동자 월급보다 4-5배의 돈을 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성공"하는 사람들이 소수지만, 러시아 하층 남성의 문화에서는 "남자다움"과 "힘", "싸움", 그리고 "애국", "전쟁", 그리고 "성공"의 담론들이 서로 얼키고 설킨 것이죠. 그래서 러시아인의 약 82%가 푸틴을 지지하고, 70% 이상이 전쟁을 지지한다는 것은 아쉽게도 정권의 조작이 아니고 매우 슬픈 "현실"입니다...

한국에서는 전국민을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군인으로, 직장을 전장으로 각각 설정하는 "군사 문화"가 청산 안되는 만큼이나, 러시아 하층-중하층 남성들의 "힘"/"싸움" 숭배나 군사적 "애국주의" 등에 있어서는 균열 내기가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러시아의 자유주의자들은 대개 하층/중하층 "애국적" 남성들을 아예 상대조차 하지 않으려는 경향은 강합니다. 한데 좌파는 이들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것보다, 이들을 상대로 결국 계급 의식을 키우는 작업을 계속 해나가야 할 겁니다. 이들의 가치의 서열에서 "국가"가 아닌 "계급"이 윗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그 순간부터 러시아가 좀 좋게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저는 솔직히 별로 기대 없어요....

 

출처 : 

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223055445344

 

댓글 1

사요리 2023.03.25. 22:02
글구보니 그 며칠 전에 온 러시아 지도 책에서도 푸틴 정권이 지속될수록 화려해지는 건 전승절 퍼레이드뿐인데, 러시아 국민들은 그걸 매년 볼 때마다 자부심을 느끼기보다는 “소련 시절처럼 언제든 포위될지 모른다”라는 두려움을 심어준다고… 하던데 저거랑 어느정도 맥락은 통하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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