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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글챌린지 언어, 세계의 제일 불평등한 시장 - 박노자

저는 제 아버지쪽 증조할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습니다. 사진 몇 장 이외에는 남은 게 거의 없는 거죠. 하임-예호수아 시프만 (1872–1942)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제 증조할아버지를 만난 일이 없는 건 물론이거니와, 그를 만난 사람도 만난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만났다면 아마도 그와의 대화는 별로 신통치 못했을 것입니다. 증조할아버지의 언어는 동유럽 유대인들의 언어인 이디쉬어이었습니다. 그에게 러어란 어디까지나 겨우겨우 배운, 그리고 잘 모르는 다수자들의 언어, 외부자들의 언어이었죠. 그런데 저는 어릴 때부터 러어를 모어로 하여, 이디쉬어 단어 몇 개, 포현 몇 개 이외에 아는 바 잘 없습니다. 황천에서 증조할아버지를 뵐 일이 있어도 아마도 무언의 대화를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저뿐만 아닙니다. 이디쉬어는 사실 "죽어가는 언어"라고 이야기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홀로코스트 이전에는 세계에서 거의 천만 명에 가까운 이디쉬어 모어 화자들이 살았지만, 히틀러 학살과 스탈린 시대 후기의 소련에서의 이디쉬어 교육 폐지, 이스라엘에서의 히브리어 국어화, 재미 유대인 사이의 영어 사용의 보편화 등으로 그 숫자는 계속 줄어들어온 것입니다. 지금 백만명 정도 될까 말까인데, 대부분은 종교적 신념이 강한 보수주의자들입니다. 언어 사용자들의 수가 막 줄어드니까 그 언어를 중심으로 한 문화도 자연스럽게 점점 광채를 잃어 붕괴돼 갑니다. 가령, 유대인 출신의 작가들은 미국에도 러시아에도 프랑스에도 많지만, 그들이 작품 활동을 잠재 독자가 백만 명 밖에 안되는 소수자들의 언어로 하겠어요? 아니면 사용자 숫자가 15억 명이나 되는 영어, 내지 그 숫자가 각각 거의 3억 명이 되는 러어나 불어로 하겠어요? 답은 자명합니다. 특별한 변수가 있지 않는 한 그 사용자의 수가 애당초 적고 계속 줄어들기까지 하는 언어를 기반으로 해서 "시장성이 있는 문화"를 발전시킬 수 없죠.

이디쉬어만의 문제도 아니죠. 조선어 계열의 언어들을 말하더라도, (함길도 육진 방언을 기반으로 한) 구소련 고려인들의 고려어는 매우 빠른 속도로 죽어나가는가 하면, 연변 조선족 동포들의 세계로의 분산과 중국내에서의 중국어 사용으로의 이동 등으로 연변 조선족 언어도 사용자들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조선어 계열 언어들만의 문제도 당연 아니죠. 세계에는 사어가 아닌 활용 중의 언어는 6909개나 있지만, 그 중에서는 473개의 언어는 멸절의 위기에 빠져 있으며 그외의 대부분은 아직 생명력이 있어도 계속해서 언어 시장을 독과점하게 돼 있는 "주요 세계 언어"들에게는 사용자들을 빼앗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게 해서 세계의 언어 시장이 가면 갈수록 "독과점 체제"를 향하여 가고 있는 셈이 되지요. "주요 세계 언어"란 사용자들의 수가 가장 많은 10개의 언어,즉 영어, 중국어, 서반아어, 아랍어, 힌디어, 불어, 벵갈어, 러어, 포르투갈어, 우르두어 (파키스탄) 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많은 소수자들이 계속해서 이들 "주요 언어", 즉 다수자들의 언어 사용으로 갈아타고 있는 만큼 세계 언어 시장의 큰 그림은 "부익부빈익빈"입니다. 사용 범위가 이미 큰 언어들이 계속 커져가고 있고, 소수자의 언어들이 그 영역마저도 지키지 못해 계속 축소 일로를 치닫고 있는 것이죠.

시장은 결국 독과점을 향해 가게 돼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이미 이야기한 진리죠. 시장이 낳는 불평등을 해소해야 하는 게 사회, 그리고 그 사회를 대표하는 국가입니다. 예컨대 특히 국제 경쟁에 노출돼 있는 학술 연구의 분야에서는 연구자들이 소수의 언어는 아니지만, 세계 "주요 언어"도 아닌 한국어 (총 사용자 숫자 약 7천5백만 명, 세계 14-15위)로 학술 논문을 굳이 써서 발표할 아무런 "시장적 필요성"은 없습니다. 경제학 내지 예컨대 통계학 연구 논문을 영어로 써서 발표하면 한국어로 발표하는 경우보다 잠재적 독자수는 바로 20배나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영어 논문을 다 읽는 한국어 사용자인 한국 국내 연구자들을 포함해서입니다). 만약 우리가 경제학 내지 통계학 연구를 위한 한국어 학술 어휘 등이 발전되는 것을 원한다면, 시장의 논리를 거슬러서 "그래도" 한국어로 논문을 집필, 발표하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포상을 주는 등 "인센티브 제공"이 필요합니다. 한데 신자유주의 논리를 그대로 추종하는 한국이라는 국가는, 시장의 논리를 거스르는 사람들에게 인센티브를 주기는커녕, 반대로 그 시장 논리에의 복종을 적극 장려합니다. 한국어 아닌 영어로 써야 점수를 훨씬 더 후하게 주는 것이죠. 그러니까 한국어 등 "비주류" 언어의 생존과 발전에 대한 관심이라고 전무한 것이죠.

언어 시장은 엄청나게 불평등합니다. 한국어도 예컨대 영어나 중국어와 당연히 경쟁할 위치에 있지 않지만, 예컨대 연변 조선족 동포들의 독자적 언어나 고려말도 표준 한국어와 경쟁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제주의 탐라어나, 아니면 한국에 이주온 많은 베트남인들이 외지에서도 보존하여 다음 세대에 전수하려 하는 한국내 베트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어도 "글러벌 주요 언어"가 아니지만, 또 한국 땅에 수많은 소수자 언어들이 어렵게 그 생존을 도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 분야 등에 있어서의 한국어의 지속적 발전, 한국 국내에서의 소수자 언어들의 생존과 발전 등을 국가가 책임져야 할 터인데, 정권은 여에 있든 야에 있든 한국이라는 국가는 소수 언어에 너무나 무관심합니다. 통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거죠.

 

출처 : 

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223034853256

 

댓글 2

김대의감독님 2023.03.05. 11:32
국가의 역할이 그런 시장이 낳는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함이라는 것도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의 공용어를 익힐 필요성도 있지 않나 싶음.. 결국 국가가 국어나 공용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지 않아도, 어느 공동체에서는, 어느 전문가 집단에서는 더 메이저한 언어를 쓰기 때문에 그 위치까지 올라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언어를 배워야만 하듯이.

저 말의 논지는 뭔지 알겠는데, 역으로 마이너한 언어를 유지함으로써 갖게 되는 경제적인 불이익에 대해서는 좀 빼놓은듯함. 뭐 기업이나 관료 시스템까지 갈 필요 없이 말 다른 외국인끼리 시장에서 장사를 하면 결국 쪽수 밀리는 쪽이 더 손해보고 장사해야 하는건데 그런거는 쏙 빼놓는 것 같음. 그냥 인간의 본능이 이런건데
댓글
김대의감독님 2023.03.05. 11:42
 김대의감독님
아니다 충분히 거론된 편인가? 껜지 얼마 안 되서 헛소리 좀 함 ㅈ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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