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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글챌린지 문화에 죄가 있느냐? - 박노자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미 거의 9개월이나 됐습니다. 전체 피해의 규모를 이 시점에서 당연히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미국 합동참모의장 밀리의 "우크라이나도 러시아도 약 10만 명씩 사망자와 부상자를 냈다"는 발언을 충분히 취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마을을 가지고 벌이는 공방전에서 하루에 400-500명이 양쪽에서 전사하거나 중상을 당하는 판에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숫자죠. 우크라이나 민간인 피해 (적어도 3-4만 명 이상 사망 및 부상)까지 합하면 이미 약 25만 명이나 사망했거나 부상을 당했는데, 이는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전쟁들 때의 손실 (약 14만 명의 사망자)을 상회하는 정도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1945년 이후 유럽에서의 최악의 대량 살육이죠. 이 상황을 매일매일 뉴스를 통해 접하면서, 저와 러시아 사이의 '관계'를 심각하게 고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 여권을 소지하고 러시아 국적을 포기한지 이미 21년이나 됐지만, 노르웨이 사람들은 저를 대개 "러시아인"으로 보는 듯합니다 (한국도 이제 다민족 사회가 돼간다는 것은, 노르웨이에서는 아직 '통념'으로 자리를 잡지 못한 이야기죠....). 한데 이 '러시아인'이라는 게 과연 무슨 뜻인가 라는 질문을 저는 스스로에게 가끔 던집니다. 모어가 러어라는 게 아마도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겠지만, 일상에서 하도 그 모어를 쓰지 않고 있기에는 많은 경우에는 이제 러어 표현도 아니고 노르웨이어나 한국어 표현들은 먼저 떠오릅니다 (아이들이나 동료들과 노르웨이어를 쓰니까 노르웨이어 표현들이 더 친숙할 때가 많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저는 지금도 구소련을 모국/고국으로 생각하지만, 러시아에서 다시 한 번 좌파적 지향의 혁명에 기반을 두는 정권이 생길 때까지 아마도 수십년의 시간이 흘러야 할 것이라는 것을 현실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1917년 혁명의 유산에 대한 충성 같은 것을 느끼지만, 현실적으로는 현재 러시아의 정권은 세계적 기준으로 봤을 때에는 "중도 우파"도 아닌 한참의 "극우"입니다. 결국 남는 것은 문화, 즉 어렸을 때부터 읽어온 러시아 고전 문학 작품 같은 부분이죠. 그런데 이 '문화' 같은 러시아적 정체성의 부분도,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살육을 보면서 더 이상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문화란 다양합니다. 그 해석도 엄청 다양할 수가 있기에, 일반화시켜서 러시아 내지 한국 문화가 '이렇다', '저렇다'라고 말하기가 아주 힘들죠. 월남에 파병된 한국인들을 현지인의 "구원자"처럼 재현시켜 사실상 월남 파병이라는 제국주의에의 부역 행위를 미화하는 <국제시장> 같은 보수적 색깔의 영화도 한국의 (대중) 문화지만, 월남전을 예리하게 분석, 비판하는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도 엄연히 "한국 문화"입니다. "님을 향한 일편단심", 충효 등 사림 사회의 도덕률을 찬미하는 시조들도 많지만, 이 무명씨의 글도 시조 중의 하나입니다:

"사랑이 어떻더니 둥글더냐 모나더냐

길더냐 자르더냐 밟고 남아 자힐러냐

하 그리 긴 줄은 모르되 끝간 데를 몰라라."

저는 '사랑'에 대해 고민할 때에 학생 시절에 배운 이 시조를 속으로 종종 읊곤 했죠. 왕조, 사림 사회의 도덕률 따위와 전혀 관계 없는, 너무나 인간적인 문학이죠? 그러니까 "문화" 내지 "문학"에 대해서 단순화시켜서 이야기하는 것은 절대 쉽지가 않습니다. 

이는 제가 어렸을 때에 의무적으로 배워야 했던, 그러다가 결국 제 정체성의 일부가 된 러시아 고전 문학에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그 고전 문학 속에서는 물론 반전, 평화, 반제국주의를 지향하는 요소들도 만만치 않게 발견됩니다. 톨스토이의 <하지 무라트> (1904) 같은 작품은 예컨대 코커서스 전쟁 현장에서의 러시아 군대의 살인, 약탈 행각을 본격적으로 고발하고 러시아 제국의 "원주민"에 대한 차별, 멸시, 폭력을 그대로 보여준, 피해자 입장에서 쓰여진 세계적 "반제국주의 문학"의 걸작이죠. 그러니 2010년에 톨스토이 서거 100년이 됐을 때에 러시아 정부가 이를 기념하는 그 어떤 행사도 개최하지 않은 것도 아마도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국가, 교회, 군대, 전쟁의 반대편에 섰던 톨스토이야말로 푸틴에게는 가장 껄그러운 존재죠. 그런 자랑스러운 면들도 러시아 고전 문학에 있지만, 아쉽게도 톨스토이 같은 작가들이 차라리 "예외"에 가까웠다는 점도 인정해야 합니다. 

푸쉬킨이나 도스토예브스키부터 노벨상 수상자인 요시프 브로드스키 (Brodsky)나 현재의 러시아 원로 시인 알렉산드르 고로드니츠키 (Gorodnitsky)까지 러시아 문학의 "당연한 배경"이 되는 것은 바로 '제국'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보수적 문학자들이 '제국'을 '문명화'를 추진하는 긍정적 행위자로 의식, 무의식적으로 간주하고, '현지인'이나 '적국'의 저항에 부딪치는 경우 '제국'의 군사력을 옹호하곤 했습니다. 푸쉬킨이 그 시 ("러시아의 비방자들에게" 등)를 통해 1830년 폴란드 독립 운동에 대한 러 군의 진압 작전을 적극 지지했으며, 도스토예브스키는 중앙아시아에 대한 러 군의 점령이나 터키와의 전쟁을 열성적으로 옹호하면서 터키의 수도인 이스탄불까지 러시아가 "탈환"해 다시 비잔틴 시대와 같이 "기독교 도시"로 "복원"해야 한다는 제국주의적 "꿈"을 드러내곤 했습니다. 브로드스키의 <우크라이나 독립에 관해서> (1992년)는 "땅이 낳은", 그리고 이제는 [돈이 많은] "독일인들과 폴란드인들에게 나에게 항문 성교를 하라고 무조건 대주어야 할" (Пусть теперь в мазанке хором Гансы

с ляхами ставят вас на четыре кости, поганцы) "우크라이나놈"들에 대한 각종 인종주의적 욕설과 클리쉐로 가득차 있으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비판한 고로드니츠키마저도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이 러시아 도시로 남을 것이다"와 같은 노래를 한때에 지을 정도이었습니다. 톨스토이와 같은 "예외"들을 제하면 러시아의 주류 문학은 "제국"과 "전쟁" 없이는 그 구성이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물론 문학자들이 침략을 직접 감행하는 건 아닙니다. 한데 제국주의를 내면화한 문화는 분명히 침략주의를 쉽게 키울 수 있는 "토양"이 됩니다. 제 정체성의 구성 요로로서의 '러시아 문화'를 이제 다시 생각하면서, 그 문화에도 분명히 죄가 있다는 결론을, 저는 스스로를 위해 도출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읽은 책들도, 결국 침략이라는 범죄가 벌어질 수 있는 하나의 "베경"이 된 거죠.

 

출처 : 

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222932977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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