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설정

아무글챌린지 러시아 반전 운동이 미약한 이유 - 박노자

2022년2월24일,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 군의 공격 개시가 임박한 상태에서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젤렌스키가 러어로 연설한 바 있었습니다. 러어가 그의 모어인 만큼 그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겠지만, 그 의미는 러시아 국민에게의 "호소"이었던 겁니다. 그는 자신이 "나치"가 아니라는 점, 자신의 가정이 소비에트 시절의 붉은 군대 장교를 배출하고 홀로코스트에 피해를 봤다는 점,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위협한 적도 없고 할 수도 없다는 점 등을 조목조목 설명하고 러시아 국민들의 반전 저항을 당부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의 당부가 헛되지 않은 것 같기도 했습니다. 침략 초기에 러시아 곳곳에서 반전 집회가 열렸는데, 그 규모 역시 상당했습니다. 그 집회 과정에서 약 1만5천명이 경찰이 붙잡힌 것으로 보면 적어도 수 만명이 집회 참석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한데 집회는 있어도 반전을 외치는 파업 등 조직 노동의 반전 행동은 보이지 않았고, 그 반전 집회도 약 한달 지나서 거의 그 흔적을 감추었습니다. 지난 9월에, 침략의 현장에 보낼 군인들을 이제 강제 징집하기에 이르자 수십만 명의 남성들이 러시아 국경 밖으로 달아났지만, 역시 일부 지역 (다게스탄 등 소수자들의 거주지) 이외에는 반대 집회가 없었고 "적극 저항"의 주된 형태는 산발적인 개인적 행동 (병무청 방화 등)이었습니다. 도대체 상당수의 러시아인들이 친척과 친지, 친구를 갖고 있는 이웃나라를 향한 명백한 침략 행위에 대해 러시아 국민들이 왜 이토록 저항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외신을 보면 러시아인 저항의 부족을 "탄압"과 "국가적 프로파간다의 흡입력" 등으로 설명하는 게 보통입니다. 물론 틀린 말도 아닙니다. 이미 전쟁에 대한 "허위 사실 유포", 즉 전쟁을 "특수군사작전"이 아닌 "전쟁"이라고 불러서 징역 5-7년을 받은 수많은 탄압의 피해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전쟁을 비판하는 페북의 포스터에 "좋아요"를 눌러도 감옥 갈 수 있는 곳은 금일의 러시아입니다. 국가적 프로파간다가 그 프로파간다에 노출된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일종의 "별도의 세계", 즉 푸틴의 국가에 유리한 상당히 시종일관한 "세계의 그림"을 만들고 있다고 이야기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프로파간다가 만들어 놓은 그 세계 속에서는 "도덕적으로 타락해서 동성애 같은 죄악에 빠진 서방, 특히 앵글로색손 국가"들이 "유일하게 전통 가치와 도덕 규범이 남은 러시아"를 상대로 해서 그 "흉계"를 벌이고 우크라이나를 "그 흉모의 도구"로 만든 것입니다. 이 프로파간다를 듣다보면, 태평양 전쟁의 시절에 "이익 공동체"인 서구 국가와 "도덕 공동체, 가족 공동체"인 대일본 제국, 그리고 "흉측한 귀축영미가 그 도구로 만든 중국의 장개석 정권"에 대한 일본 신문들의 기사들이 연상될 정도입니다. 전시의 일제든 푸틴 정권이든 극우 민족주의 정권에는 늘 양면의 칼처럼 억압과 선전이 필요한 것이지요.

한데 푸틴 정권의 억압과 선전 전략 그 자체는 그 정권, 그리고 그 정권이 벌이는 침략 전쟁에 대한 저항의 부족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유사 파시즘이라고 부를 만한 극우 민족주의 정권들을 근현대사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그들이 - 그들의 억압과 프로파간다에도 불구하고 - 강렬한 저항에 부딪치는 경우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박정희-전두환에 대한 한국에서의 저항을 다 기억하지만, 지금 다시 브라질 대통령에 당선된 룰라만 해도, 1985년까지 지속된 브라질의 극우 (유사 파시스트적) 독재 정권과의 투쟁 속에서 그 정치적 기반을 처음으로 다진 사람입니다. 경찰에 의한 체포, 고문, 징역 등등이 다 인간으로서 두렵지 않을 수 없지만, 한 나라의 정권이 그 나라의 다수가 용납할 수 있는 어떤 '선'을 넘는다면 결국 그 다수가 정권에 대한 동의를 철회하는 분위기 속에서 체포, 고문, 징역을 각오하고도 투쟁에 나서는 이들이 속출합니다. 1917년에 무너진 제정 정권은 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억압적인 정부이었는데 말이죠. 그 정권을 급기야 무너뜨린 "민중의 힘"을, 왜 오늘날 러시아에서 볼 수 없게 된거죠?

결국 해답은 민중을 저항에 이끌만한 "정치 세력"의 유무에 찾아야 할 것입니다. 1987-8년도의 한국이나 1985년의 브라질, 아니면 1917년2월의 러시아에서는 독재를 무너뜨린 "힘"이란 계급적으로 노동계급과 중간/중산계급의 연합이었으며 정치적으로는 국회 장내의 (중산계급을 그 기반으로 한) 자유주의 야당과 길거리, 공장에서의 좌파 운동의 연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연합이 지금도 불가능하고 앞으로 아마도 10-20년동안 어렵울 것이라는 점은 바로 오늘날 러시아 '특수 사정'의 주된 특징입니다. 지금 당장에 전쟁 중지를 위한 혁명적 움직임들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의 노동계급은 1970-80년의 치열한 파업 등 계급적 전투 속에서 그 투쟁 역량을 키워 나갔습니다. 한데, 2000-2010년대 러시아를 보면 파업이 일어나는 것은 주로 외자 기업 (특히 자동차 생산 부문)이었습니다. 외자 기업이 아닌 대부분의 국내 제조업이 군수 공업이거나 군수 업체의 유관 업체인 러시아에서는, 사실 많은 노동자들이 2007년부터 현제까지 푸틴 정권에 의해 6배나 증가된 군부 예산의 증액을 쌍수 들어 환영했습니다. 이는 이들에게 당장의 "일거리"가 있음을, 그리고 임금 인상이 가능함을 의미했기 때문이죠. 특기할 만한 점은, 지난 9월에 징집을 피해 국외로 탈출한 사람들 중에서는 제조업 노동자들이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대기업과 그 노동자에 대한 국가의 "관리"도 촘촘하지만, 그 노동자들이 아직도 소련 시절에 무료로 받은 아파트에서 살고 무료 의료 혜택을 받고 그 자녀들이 무상으로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아는 겁니다. 즉, 대기업 노동자 등 "옛" 노동계급에 대한 국가의 "포섭"은, 아직도 그들의 조직 행동을 미연에 차단시킬 만큼 철저하다는 거죠. 서비스 부문 비정규직 등 "새" 노동계급의 사정은 전혀 다르지만, 러시아의 주류 좌파 정당인 연방 공산당은 이들 비정규직의 이해관계를 표방하지 않고 있으며 주로 대기업 노동자와 공무원 노동자, 즉 국가에 포섭돼 있는 노동자들을 그 기반으로 삼는 거죠. 연방 공산당의 일부 풀뿌리 일꾼들이 침략 전쟁을 반대해도, 당책 차원의 입장은 어쩌면 푸틴 정권 이상으로 더 호전적입니다. 중산 계급의 일부와 그 일부를 기반으로 하는 자유주의 정치 세력 등이 반전 입장을 취하지만, 이 자유주의 정치인들은 다수의 러시아인들에게 1990년대의 신자유주의적 자본화의 "참극"부터 연상시키는 것입니다. 자유주의가 1990년대의 마이너스 성장, 양극화, 약육강식을 연상시키는 이상, 수많은 노동자들부터 자유주의보다 푸틴 정권의 국가주의적 프로파간다 세계를 더 지향하는 것입니다....

푸틴 정권이 우크라이나 침략에서 참패를 당할 경우에는 이 패배는 어쩌면 국가주의 프로파간다의 "아성"을 흔들어 러시아 노동자들의 계급적 각성에 도움을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여태까지의 푸틴 정권 자체에 대한 비교적 미약한 저항이나 이번 침략에 대한 반전 저항의 미약함으로 봐서는, 러시아의 다음 혁명은 아직은 가깝지 않은 듯합니다. 노동자들의 자의식이 "국민"이 아닌 "계급"의 축으로 다시 이동하자면 더 긴 시간 동안 더 많은 투쟁 경험을 쌓아야 할 것입니다. 투쟁 경험이 없는, 스스로를 일차적으로 "국민"으로 의식하는 노동자들이 결국 너무나 쉽게 "총알받이"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을, 우리가 역사 속에서 너무나 많이 본 것입니다....

[출처] 러시아 반전 운동이 미약한 이유|작성자 박노자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이벤트 이번 이벤트는 따로 당선작을 뽑지 못했습니다. 4 리나군 77 17
이벤트 헌혈 이벤트 5 jacksonville 319 18
공지 미디어/도서/음악 갤러리 통합 규칙 8 리나군 772 20
이벤트 도서 구입 / 영화 예매 / 음반 구매 / 공연 및 전시 인증 이벤트 3 리나군 756 7
공지 후원내역 (2024/05/26) 리나군 605 3
공지 추천시 최소한의 정보는 주세요 안녕안녕반가워 907 15
인기 자정의 꼬들을 기적이라 불러보자 1 잼아저씨 11 2
인기 자기 전 꼬들 1 운석열 8 1
아무글챌린지
기본
리나군 23 8
아무글챌린지
기본
비빔냉면 90 11
아무글챌린지
기본
취급주의 36 9
아무글챌린지
기본
mrfeelgood 33 5
아무글챌린지
이미지
사실은이렇습니다 26 9
아무글챌린지
기본
비빔냉면 70 11
아무글챌린지
기본
고정닉 38 11
아무글챌린지
기본
취급주의 35 9
아무글챌린지
기본
시나모롤 49 9
아무글챌린지
기본
리나군 16 6
아무글챌린지
기본
고정닉 91 18
아무글챌린지
기본
Jarrett 27 8
아무글챌린지
이미지
사실은이렇습니다 40 8
아무글챌린지
이미지
사실은이렇습니다 17 6
아무글챌린지
이미지
사실은이렇습니다 46 9
아무글챌린지
이미지
사실은이렇습니다 28 8
아무글챌린지
이미지
사실은이렇습니다 26 6
아무글챌린지
기본
운석열 63 7
아무글챌린지
기본
데미안 2 [도르~]
사도요한 124 13
아무글챌린지
이미지
우리들 2 [도르~]
사실은이렇습니다 58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