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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역사 6.25 초기 HLKI 대전중앙방송국의 전시활동[발롱도르~]

HLKI_대전방송국_청사_1.jpg

-6.25 전쟁 초반 HLKI 대전중앙방송국의 모습. 18일 동안 KBS 네트워크의 키 스테이션 역할을 수행한 HLKI 대전방송국은 대전 함락 이후 파괴되고 만다.

6.25 전쟁 발발과 함께 북괴군의 급속한 진격 그리고 수도 서울 함락은 대한민국의 모든 부문에 있어서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육군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한국은행은 대량의 금은괴와 현금을 적에게 탈취당했으며 통신상황이 급속도로로 악화되었고 수많은 일반 시민 반공열사 공무원 정치인 경찰관 군인 등이 학살당하고 납북당했다. 기업체 대다수가 강탈되거나 파괴되었고 수많은 문화재와 기록들 또한 약탈되거나 소실되었다. 이중에서도 방송계는 특히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할 당시 당시 한국에는 공보처 방송국(放送局) 소속 HLKA 서울중앙방송국을 키 스테이션으로 하는 KBS 네트워크 밖에 없었다(이외에 주한 미 공보원 방송과에서 소규모로 운영하는 WVTP 라디오 방송이 있었으나 6.25전쟁 발발 2일 후 서울 철수와 함께 방송이 중단됨). 당시 HLKA를 제외한 KBS 네트워크의 지방방송국들은 1~2개의 스튜디오와 극소수의 기술진 및 아나운서밖에 없던 관계로 매일 전체 방송시간 중 각각 07시15분 그리고 22시 15분에 10분씩 내보내는 로컬뉴스를 제외하고 전부 서울중앙방송국의 전파를 재송출하는, 실질적으로는 HLKA의 지방송신소에 가까운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세가 악화하면서 적이 서울까지 침입하게 되자 결국 6월 28일 새벽 서울중앙방송국 임직원들은 모두 정부가 피난 간 대전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비슷한 시기에 방송국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춘천방송국원들 또한 대전으로 이동합니다.

HLKI_배지.jpg

 

-1948년 제작된 HLKI 대전방송국 뱃지. 마이크 위에 HLKI-KBS라 적혀있다.

전쟁 발발 당시 <공보처 대전방송국>은 호출부호가 <HLKI>로 주파수는 880킬로사이클이었으며 출력은 500와트로 대전을 중심으로 한 충청남도 일대가 방송권역입니다. 1943년 7월 15일에 개국한 HLKI 대전방송국은 충청남도 대전시 목동에 6,600평의 부지와 130평의 단층 벽돌조 청사 그리고 55미터 높이의 목제 송신탑을 두고 있었으며 소규모 지방방송국으로써 스튜디오 1개에 조정실, 사무실, 송신실 등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또한 서울-부산간 BCN식 4선식 반송 중계 회선과 MS 반송식 전화 회선에 분기 접선하는 방법을 이용하여 서울중앙방송국의 프로그램을 중계했습니다.

대전방송국은 이렇듯 다른 지방방송국처럼 서울중앙방송 릴레이와 소규모 자국제작방송을 위한 기자재와 시설을 보유하였으나 수도 서울의 피탈과 정부의 대전 천도로 인하여 6월 28일 부로 중앙방송국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15만명의 대전 시민과 충남 일대의 청취자들을 대상으로 방송했던 대전방송국은 서울과 춘천 방송국의 인원들이 남하함에 따라 인력이 부족하지는 않았으니 500와트 밖에 안되는 출력에 스튜디오가 1개로 자체제작능력이 부족하였습니다. 보통 아침 6시부터 저녁 12시까지 송출하던 HLKI는 주 프로그램이 보도와 정부 및 군 당국 발표, 연설, 정훈교양 프로그램 등으로 축소되었으며 VOA 미국의 소리 방송이나 대전 미 문화원에서 제공한 프로그램을 저녁에 한국어로 방송하기도 했다.

HLKI 대전중앙방송국 KBS 네트워크의 키 스테이션으로써의 역할 또한 해야 했는데, 열악한 방송 상황 속에서도 동 방송국은 이리(현 익산)와 광주, 목포, 그리고 마산 등의 지방방송국과의 네트워크 연결에 성공하였다. 대전방송국은 중앙방송국으로서 지방방송국의 방송과 운영 통제하였으며 각 지방국에서 자체제작방송을 하기 위해서는 중앙방송에 연락하여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를 통하여 당시 정부가 남은 KBS 네트워크 망을 이용하여 지방의 혼란을 가라앉히고 정부의 지휘하에 일치된 전시방송의 통제를 기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중앙방송시기의 HLKI 뉴스는 주로 전쟁상황, 미군참전, 정부 및 군 당국 발표, 외신 및 기타 소식이 주로 이뤄졌습니다. 방송국 자체의 취재망이 사실상 전무한 상황에서 전황뉴스는 주로 정부(특히 공보처)나 군 당국의 발표에 주로 의존하였으며 외신의 경우 미국 VOA라든지 BBC 등 해외 방송에서 내보낸 뉴스를 다수 인용했습니다. HLKI는 또한 대전 미 문화원에서 매일 비정기적으로 제공한 뉴스에 크게 의존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전쟁 극초기 정부나 군 당국의 발표가 신뢰가 떨어진 상황에서 대전 미 공보원에서 HLKI에 제공한 뉴스는 청취자들의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고. 그 외에 각 지방방송국에서 자체적으로 뉴스를 제작해서 내보내기도 했습니다.

서울 함락 직후 정부는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라디오를 이용하기도 하였습니다. 6월 28일 대전으로 내려온 공보처는 HLKI의 전파로 대전으로 임시천도를 발표하였으며 내무부는 서울과 인천의 경찰관들에게 각각 영등포경찰서와 인천경찰서에 집합하라고 HLKI를 통하여 공지하였다.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 대령과 중앙방송국장 노창성은 타 지방 방송국에게 새로히 중앙방송국이 된 HLKI의 방송을 무조건 릴레이하고 자체방송을 하려면 동 방송국의 허가를 받으라고 라디오를 통해서 공지하였다. 이러한 대전중앙방송국의 보도와 발표는 당시 서울에 위치한 뉴스통신사들의 붕괴로 뉴스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일부 신문에서 인용하기도 했는데, HLKI에서 이근석 대령의 전사를 알린 것을 마산에서 발행된 남조선신보(현 경남신문)가 인용하여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서울 함락 전후로 정부나 군 당국이 국민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한 허위발표들로 인하여 국민과 청취자들 사이에 정부와 군당국, 나아가 (위에서 하라는대로 정부발표를 송출하는 죄(?)밖에 없는)KBS에 대한 불신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서 HLKI에서 대전 미 공보원에서 제공한 뉴스나 VOA 미국의 소리 방송을 중계한 것이 시민들 사이에서 큰 관심을 이끌어 냈다고 합니다. 당시 청취자들은 가능하면 KBS만 듣지 않고 VOA나 BBC, VUNC, NHK 등을 같이 들었다고.

 

1597639032994.jpg

-1949년 7월 26일 본래 300w였던 HLKI 대전방송국의 송신 출력을 500w로 증가시킨 것에 대한 기념사진.

당시 대전중앙방송국은 방송 업무 외에도 추가 임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보 수집 및 전황보고. 당시 정부는 정보의 부족으로 전황 분석에 어려움를 겪었기에 유병은 대전방송국 방송과장은 동 방송국 직원인 방응환에게 단파수신기로 해외방송을 청취하여 이를 국무회의에 보고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렇게 되서 방응완은 서울에서 피난온 박경환 왕종현 김성배 세명과 함께 방송국 방 하나 빌려서 출입금지 팻말을 세우고 정보수집(?)을 시작한 것.

이들을 북한이 장악한 서울방송과 평양방송을 비롯하여 VUNC 유엔군총사령부의소리 방송, VOA 미국의소리 방송, 일본의 NHK, 중국의 북경방송, 소련의 모스크바 방송 등을 청취하고 이를 종합하여 임시 중앙청이 된 충남도청 도지사실에서 열리는 국무회의에 보고하는 것이였다. 당시 대전중앙방송국에서 전황분석을 보내지 않으면 충남도청에서 열리던 국무회의가 열리지 못하기도 했다고. 당시 미국의 CIA 산하 FBIS(해외방송정보청취부)이나 영국의 BBC Monitoring (BBC 해외방송 모니터링 서비스)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차이점은 미국이나 영국의 조직은 체계적으로 활동하는 전문적인 방송정보수집조직이었다는 것이고 대전중앙방송국의 경우 피난 온 방송국 직원 몇명을 뽑아서 방 한칸 단파라디오 한대 주고 투입했다는 점...

그런데 당시 이 전황분석 업무를 수행한 박경환씨는 재미있는 증언을 합니다.

<왕종현씨와 김성배씨 그리고 저는 곧 청취하기에 적합한 방을 골라 그 앞에 출입금지 구역이라는 팻말을 붙였지요. 그리고 쉴 새 없이 그 방송을 청취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한 가지 재미있었던 것은 북괴의 성급한 보도 내용이었어요. 가령 VOA와 NHK 방송에서는 경기도 평택지역에서 국군과 인민군이 교전중이라고 보도하면 그 때 이미 평양방송국에서는 해방시켰다고 떠들어 대는 것입니다. 평양방송국에서 평택을 해방시켰다고 떠들어 대고 VOA와 NHK 에서는 교전 중이라고 보도하면 우리가 전황 판단 할 때는 인민군이 경기도 평택지방 까지 밀고 내려 왔다고 파악하는 것이었어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북한 방송은 너무 거짓말 한다>. 뭐 지금도 그러니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잊는다는 점에서 호평... 해야되나 이거

아무튼 전시국정운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이 전황분석 업무는 정부가 대전에서 철수하는 7월 14일까지 진행되었습니다.

대전미국문화원500706.png.jpg

 

-1950년 7월 6일 대전역 광장에 위치한 대전미국문화관 청사의 모습. 이곳에 자리를 잡은 USIS은 HLKI에 정확한 뉴스를 제공하였고 정훈교양방송 제작에 도움을 줬다.

여기서 잠깐 HLKI가 USIS(미국 공보원)의 도움을 받게 된 이유를 보겠습니다. 해방 후 진주한 미국은 유익한 정보제공과 우호적 여론 조성과 민심 안정을 위해서 USIS는 서울을 중심으로 남한 각지에 미국 문화관과 분관을 설립합니다. 문화관에서 이용자들은 미국이나 역사, 사회, 과학, 기술, 문학 등에 관한 책이나 사진 등을 열람 할 수 있었으며 웅변대회가 열리기도 하였고 다큐멘터리나 영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또 문화관에서는 미술 전시회나 음악회 등 다양한 예술활동이 펼쳤으며 이동공보반을 마련해서 농촌에서 연설이나 강연, 영화상영 등을 제공했습니다. 그러한 관계로 각지에 설치된 미국 문화관은 지역 주민들의 호평을 받았으며 시민들과 학생들, 지식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대전미국문화관도 그렇게 설립된 문화관들 중 하나로 대전역 광장 맞은편에 위치한 3층 건물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면서 서울에 있었던 주한 미 공보원(USIS)이 대전으로 피난와서 대전미국문화관이 USIS 본부가 되었습니다. 대전에 자리잡은 USIS는 심리전의 일환으로써 한국인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여 국민들을 안심시킴과 동시에 그들이 대한민국과 미국, 유엔 그리고 미군과 유엔군에 대한 신뢰를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으며 뉴스 취재망이 매우 부실했던 대전중앙방송국은 당연히 청취자들에게 제공할 프로그램과 신뢰성 있는 뉴스가 필요했기에 HLKI와 미 문화원은 협력을 하게 됩니다.

HLKI는 28일부터 대전 미국 공보원에서 매일 비정기적으로 공급하는 뉴스를 받아서 뉴스 방송에 쏠쏠히 써먹었습니다. 또한 대전중앙방송국은 대전으로 남하한 주한 USIS 본부와 합의하여 HLKI에서 VOA 방송을 중계함은 물론 전국의 네트워크국에 재전송하였는데 광주, 목포, 이리 방송국에서 대전중앙방송국을 경유한 VOA 방송을 내보냈다고 합니다. 이는 보도든 교양이든 자체제작능력이 부족했던 HLKI로써는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었으며 불정확한 뉴스와 유언비어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의 큰 신뢰를 받았습니다. 또 7월 5일 대전에 도착한 USIS 직원 플로이드는 7월 7일부터 HLKI에서 뉴스논평을 밤 시간대에 진행하기도 하였고 남아있는 KBS 네트워크를 조정, 개선하는데 도움을 줬다고 합니다.

한편 6월 29일 극동총사령부는 도쿄 NHK 제2방송에서 밤 9시부터 30분간 심리전의 일환으로 VUNC <유엔군총사령부의 소리> 방송을 내보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방송시간을 연장하자 한국어 아나운서가 부족하던 VUNC에서는 대전중앙방송국에 인력파견을 요청하였고 인력이 비교적 부족하지 않았던 대전중앙방송국은 7월 3일 중앙방송국 방송과장 민재호 아나운서를 도쿄로 보냈다. 도쿄로 간 민재호 아나운서는 매일 오후 9시부터 9시 30분까지 30분간 방송했다고.

불타는_함락직전의_대전.png.jpg

-1950년 7월 20일, 대전천변에서 본 함락 직전의 대전. 북괴군의 공격과 방화로 불에 타는 시가지가 보인다.

이렇게 전쟁 초기의 혼란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중앙방송국과 대전방송국의 직원들은 최선을 다해서 업무를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금강방어선의 붕괴가 눈앞에 다가온 7월 15일 아침 9시 30분에 아침방송이 종료된 후 대전중앙방송국에 대구로의 철수명령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가능한 모든 침을 챙긴 방송국 인원들은 이동시킬 수 없는 방송 기재를 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파괴하고 나서 차량 편으로 대구방송국로 이동합니다. 중앙방송국이 된지 18일만에 다시 짐을 싸고 남으로 내려가게 된 것입니다.

5줄요약:

1. 6.25 초반의 패전으로 중앙방송국은 대전으로 후퇴하고 HLKI 대전방송국이 18일동안 중앙방송국이 됨

2. HLKI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보도, 정훈교양, VOA 중계 방송 등을 전국방송하며 KBS 네트워크를 총괄함

3. 대전방송국은 부차적으로 전황 정보를 수집하여 정부에 보고하는 임무를 맡기도 함

4. USIS가 제공한 도움이 HLKI가 방송하는데 엄청 큰 힘이 되었으며 국민들에게 큰 신뢰를 주었음

5. 북한방송의 구라는 그때도 유명했다

==================

p.s. 당시 대전방송국의 역할에 대한 자료는 전시 초기의 혼란으로 인하여 매우 부족한 관계로 기본적으로 관계당국의 기록라든지 당시 재직자의 증언에 기초한 것이 많으나 다행히도 미국 FBIS의 방송녹취원문이라든지 미국 국무성과 국방부의 문서들에서 추가적인 자료를 구할 수 있었읍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자료대한민국사 18권

한국방송 60년사, 한국방송공사, 1987

대전방송총국 60년, KBS대전방송총국, 2003

1950년 7월 8일자 무초대사 발 미 국무부 착 ​<서울 철수 이후 USIS 활동 요약> 활동 보고 전문

張泳敏. (2013).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라디오 특별방송 관련 자료. 한국근현대사연구, 67, 1000-1001.

장영민. (2014). 한국전쟁기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한국어방송’에 관한 연구. 역사와경계, 90, 263.

남영희, 이진옥. (2020). 해방기 주한미군사령부 공보원 지역분관의설립과 문화 활동. 석당논총, 78, 109~143.

<한국 대사 회고록>, 샤오위린, 2017, 한울

<민족의 증언>, 중앙일보, 1973, 중앙일보사

<60년전, 6.25는 이랬다>, 월간조선, 2010, 월간조선사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남조선민보》 1950년 7월 7일자, 국립중앙도서관

<주간 NHK라디오>, 제28호, 1950년 7월 6일자

6.25 전쟁 18일간 대전 중앙방송국 1~2, 춘하추동방송 누리집

댓글 3

Bleoh 2021.04.05. 17:52
구라북한은 유구의 전통이었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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